라슈벨 폰 발렌타인(5)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쌀 과자를 빼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벨은 배가 고팠지만, 본래 집 주인인 아버지가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저녁을 먹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형이 준 돈으로 나가서 해결할까, 아니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까 고민하던 그는 방문 앞에 서 있는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서재에 계십니다.”
“저녁은 드신 거야?”
“아니요. 라슈벨 도련님께서 오시면 같이 드시겠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혹시 리엔 아가씨나 벨 도련님이 배가 고프시다 하시거든 따로 챙겨 드리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드시고 주인님과 같이 서재에 계십니다.”
“그럼 내 식사를 좀 준비해줘. 식당은 너무 넓으니까 내 방으로 가져오도록 해.”
“네. 작은 도련님.”
공손히 허리를 숙인 집사가 밖으로 나가자, 그는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이미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서재에서의 아버지의 발작,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 집사들의 방정맞은 발소리가 울려 퍼지겠지. 흐릿하게 남아있는 어린 날의 기억 중에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일. 각자의 방에 떨어져 있던 리엔과 자신은 밖으로 나와 목을 피가 나도록 긁어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머리를 감싸쥐며 비명을 지르던 자신과 다르게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던 누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뒤이어 라슈벨이 들어오고 나서 겨우 진정 되었던 그 날의 일. 그 때, 형이 아버지를 어떻게 진정시켰을까. 대체 무슨 방법으로? 벨은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밖은 어두워졌지만, 지금 잠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간 중간 구멍이 나 있는 기억들을 메울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집사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도련님, 식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어. 수고했어. 나가봐.”
“예?”
“이제 식사를 할 참이니까 나가보라고.”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 너도 나가 있어야 이야기가 맞물려. 발작을 일으킨 아버지의 검에 제일 먼저 베이는 건 너거든. 벨은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한 조각 베어 입 안에 넣었다. 오물오물. 어렸을 그 맛이다. 한 때 궁중 요리사까지 도맡았던 ‘척’의 요리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벨은 한 조각을 더 베어 입에 털어 넣었다. 가느다란 아이의 목에 걸린 냅킨 위엔 육즙이 마치 피처럼 떨어져 방울졌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포크를 집어 들고 주변에 있는 야채들을 집어 먹었다.
‘일단 약에 의한 발작이라 치자. 그렇다면 척이 분명 관여되어 있을 거다. 의심 많은 아버지에게 약을 먹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럼 궁중요리사 척이 우리 중에 제일 가까운 사람은 누굴까.’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바로 라슈벨, 그 자다. 제일 먼저 집에 척을 추천한 것도 그였고, 아버지의 식사를 직접 들고 간 것도 그였으니까. 만약 거기에 성욕을 억제할 수 없는 약을 집어넣고, 옆에서 초야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면. 모든 것은 계획대로 흘러가게 된다. 형은 오늘 물레방앗간에 있는 구로 일족을 전부 몰살했다. 그것은 반발이 일어날 싹을 짓밟으면서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회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이 아버지를 노리는 이유는 뻔하지.’
벨은 스테이크를 한 조각 더 베어 물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린 소년의 칼질엔 힘이 들어가고,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추악한 진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될 지도 모르는 거짓말 같은 과거. 냅킨 위엔 떨어진 육즙이 계속해서 방울지고, 성인이 겨우 먹을 만한 스테이크를 한 점도 남김없이 해치운 벨은 냅킨을 뒤집어 더럽혀진 입가를 닦아 내려갔다.
“으아아악!!”
그와 동시에 벨의 귓가에 비극의 전주곡이 울렸다. 벨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알고 있다. 발작한 아버지를 말리려던 집사가 죽고, 검을 내던진 그는 무릎을 꿇고 헐떡인다. 그리곤 손톱에 피가 맺힐 정도로 자신의 목을 긁어댄다. 모든 것이 잡힐 듯 눈에 선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마침 아버지는 바닥에 엎드려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베, 벨! 리엔! 아버지를 말려! 어서!”
“어머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모르겠다. 서재에서 잘 계시다가 갑자기 눈이 뒤집히시더니 밖으로 뛰쳐나오셨어! 어서! 어서 막아!”
“집사. 얼른 가서 아버님을 막아. 검은 내가 가지고 있을 테니.”
“예!”
집사들이 달려가자 리엔은 팔짱을 낀 채 바닥에 엎드린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추하다. 한 때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아버지는 무언가에 취해 바닥에서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리엔은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벨을 바라보았다. 역시. 저 아이. 어딘가 달라. 보통 아이라면 아버지가 집사를 벤 시점에서 구토를 하고 만다. 사람이 내뿜는 역한 피 냄새는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벨은 너무나도 의연한 자세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눈치 챘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벨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어느새 리엔의 곁에 다가온 벨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린다. 그녀는 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니? 벨? 누나한테 할 말 있어?”
“네. 저기 저 요리사 좀 보세요.”
“요리사?”
벨의 말에 무의식중에 고개를 든 리엔의 눈에 서재에서 빈 접시를 들고 급히 주방으로 사라지는 척의 모습이 보였다. 두 쌍의 눈이 번쩍 빛난다. 재미있는 일이지 않는가. 아버지가 발작을 일으킴과 동시에 나타난 빈 접시. 그리고 그 접시를 가지고 사라지는 척. 리엔은 몸을 미친 듯이 떨어대는 아버지의 옆을 지나가 척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잠깐 멈춰. 척.”
“......예. 아가씨.”
어깨를 움찔한 척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덩치에 맞지 않게 몸을 덜덜 떠는 꼴이 꽤 우스웠다. 그제야 리엔은 벨이 자신에게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이 자가 음식 속에 뭔가 더러운 짓을 했고, 그 음식을 먹은 아버지는 과도한 약 복용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이거로군. 아무래도 이 요리사와 흑막간의 사인이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황을 깨달은 리엔이 사납게 웃자 척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딱 그만큼 거리를 좁힌 리엔이 입을 열었다.
“내게 그 접시를 보여줘.”
“이, 이건 주인님이 드시고 남은 빈 접시일 뿐입니다.”
“알고 있으니까 그 접시를 이쪽으로 주라고.”
“......알겠습니다.”
리엔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압도된 척이 순순히 접시를 내놓자, 벨은 발돋움을 하여 접시를 살폈다. 자신과 똑같은 양념이 묻어있는 접시. 아무리 봐도 스테이크가 담겨 있던 것 같다. 그리고 양념 주변에 보이는 새하얀 가루들. 분명 긴장하여 원하는 부분에만 뿌리지 못한 것 같았다. 벨은 그 가루들을 보자마자 씩 웃었다. 확실해. 이 자가 범인이야, 라고. 당장이라도 리엔의 어깨를 붙잡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 역시 그 가루들을 눈치 챘는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여. 모두들 모여서 뭐해?”
“형!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응? 일이 빨리 정리되는 바람에. 그건 그렇고. 내 말에 대답을 안 했잖아. 여기서 뭐하냐고.”
벨을 보며 새하얗게 웃는 형의 얼굴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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