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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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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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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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2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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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DUMMY

벨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올 줄 알고 일부러 빨리 부른 건데. 리엔의 시선을 붙잡는 덴 성공했지만, 그에 비례해 라슈벨이 돌아오는 시간 또한 당겨져 버렸다. 위험하다. 평소라면 다정한 형의 모습을 연기했을 라슈벨은 이미 그 껍질을 벗어 던졌다. 이 자리에서 빼든 검으로 그녀와 자신의 목을 벤다 해도 이상할 상황이 아니란 것이다. 역시 과거를 바꾸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닌가. 벨이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걸 마른 눈으로 지켜보던 리엔이 라슈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척이 아버님의 접시에 뭔가를 탄 것 같아서. 조사 중이야.”

“하하. 뭐야. 음모론? 설마 내가 데려온 요리사가 음식에 그런 장난을 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척.”

“다, 당연하지요. 제가 감히 어떻게 주인님의 음식에......어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느낌입니다.”

“그렇다는데. 리엔.”

“인정할 수 없어. 저 자를 보내는 건 상관없으니까 접시라도 내놔.”

“아버님!”


라슈벨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이제 막 숨을 몰아쉬며 몸을 진정시키던 공작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평화롭던 저택 안은 날 선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만 같다. 리엔도 라슈벨도 서로를 노려본 채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아들과 딸이 서로를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모습이 낯선 것 같다. 공작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일이냐. 라슈벨.”

“리엔이 척이 아버님이 드신 접시에 약을 탔다고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없다. 척은 라슈벨이 데려온 요리사가 아니냐.”

“하지만, 여기 그릇에 있는 알갱이를 좀 보세요! 이건 분명히......”


다음 순간. 라슈벨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접시를 반으로 조각냈다. 척의 손에서 떨어진 접시조각은 바닥에 부딪쳐 산산 조각이 나 버렸다. 예상치도 못한 모습에 벨은 몸을 비틀거렸다. 어쩌면 이렇게 당당히 행동할 수 있는 거지? 아버지가 자신이 준 약에 취해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척을 죽여 꼬리를 자르기엔 그가 너무 아깝게 느껴진 것인가. 잠시 바닥에 떨어진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작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등을 돌렸다.


“괜한 오해 하지 말거라. 오죽하면 라슈벨이 직접 나서서 검을 휘둘렀겠느냐. 화근의 싹은 키우는 것이 아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아버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셨어요.”

“아버지. 그만 들어가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당신도 따라오시오.”

“후우.”


하지만 부인은 따라가지 않았다. 전신에 피를 묻히고 나타난 라슈벨의 모습에 말로 다 못할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그녀는 얼른 다가온 리엔의 어깨에 몸을 기댄 뒤, 공작을 모시고 돌아가는 라슈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저게 누구냐. 내가 알던 라슈벨은 분명 저렇지 않았는데.”

“저 모습이 진짜 라슈벨이에요. 엄마.”

“뭐? 그럴 리가 없어. 태연하게 검을 휘두르고, 광기어린 눈동자만 치켜 뜬 저게 라슈벨일 리가 없어.”

“벨과 함께 물레방앗간을 찾아갔을 때 봤어요. 아버지한테 불만이 있었던 구보 씨 가문을 전부 도륙 내던 오빠의 모습을요.”

“말도 안 돼.”

“엄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부인을 리엔과 벨이 얼른 부축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벨은 그녀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자랑스러운 장남이었을 테니까. 분명 이런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나면 눈물 밖에는 나오지 않겠지.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어머니를 부축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하지만 몸을 숙인 그에게 들리는 목소리는 터져 나오는 울음이 아닌, 환희에 젖은 웃음 소리였다.


“어머니?”

“푸흐. 푸흐하하하. 잘 되었다. 정말 잘 되었어!”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주제에 너무나도 반듯하게 큰 라슈벨을 상대로 너희 둘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다. 저게 그의 본성이라면 이제 허들은 똑같은 높이까지 내려온 셈이야.”

“......확실히 허들이 낮아진 건 인정해요. 물론 그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벨. 넌 반드시 누나를 도와야 한다. 그래서 라슈벨을 꺾어야 해. 리엔 너도, 벨을 잘 가르쳐서 항상 네 옆에 둬라. 언제든 이 거대한 저택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알겠어요.”

“네. 어머니.”

“벨. 너는 그만 들어가라. 리엔과 나는 할 얘기가 남았으니.”

“네? 아. 네.”


벨은 얼른 두 사람의 곁을 빠져나왔다. 언제 불렀는지 라슈벨의 기사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시체를 치우고 있었다. 벨이 흘끔 쳐다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뜻대로 죽긴 했다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과거를 바꾸기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지옥에 가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자신의 인생은 이번에도 파멸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중이었다. 어느 쪽으로든 말이다. 잠자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눌지 궁금하지도 않다. 어차피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것이겠지. 자신은 그저 리엔이 시키는대로 따라하면 그만인 일이다. 집사가 죽은 탓에 아무도 자신의 방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깨달은 벨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라슈벨.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냐.”


어떻게든 잠을 자려 했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아마 이렇게 흘러간다면 라슈벨은 죽고 말 것이다. 그럼 그걸로 족한 것인가. 이대로 2년 뒤에 라슈벨의 죽음을 방관해도 좋은 것인가. 만약 그의 죽음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후에 리엔의 죽음과 어머니, 아버지의 반역까지 연달아 간다면 자신은 그걸 막아야 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하다. 그냥 전생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전부 죽여 버리고, 가문을 닫아버릴 생각이었는데. 막상 돌아온 전생에서 그는 기왕이면 자신의 인생을 좀 더 빛나는 쪽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집 사람들은 전부 미쳐있어.’


정상적인 사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서로가 각자의 파벌을 만들고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과연 이 사람들을 데리고 밝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일까. 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사람을 죽이고, 서로를 귀신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나이는 이제 고작 15살과 14살, 6살이었다.


****


역사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강물과도 같다. 그 역사의 앞에 선 벨은 강물 안으로 힘껏 돌멩이를 던져 넣고 있는 셈이다. 한 번 던질 때마다 잠깐의 파문을 일으키던 돌은 금세 가라앉아 버리고, 강물은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다시 천천히 흘러간다. 저택에서의 일을 겪고 다시 벨슈포드 아카데미 기숙사로 올라온 벨은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선 강물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거대한 돌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신학기를 맞은 벨이 변화를 맞은 또 하나의 기점이었다.


“벨!”

“이셀리아!”


벨은 교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셀리아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딘가 수줍어 보이던 그녀는 반듯하게 접힌 편지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뭐. 따로 보지 않아도 안다. 저건 분명 저택에서 자신이 그녀에게 부쳐준 편지일 것이다. 벨은 괜히 낯을 붉히며 그녀에게 말했다.


“편지, 가져왔어?”

“응. 정말 기뻤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거든.”

“네가 기쁘다면 나도 기뻐.”

“여, 여기 답장이니까 꼭 집에 가서 읽어봐. 아카데미 안에선 읽으면 안 돼!”

“응. 알았어.”


벨은 쓸데없이 호화로운 봉투를 보곤 피식 웃었다. 아마도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졸라 받아낸 것이겠지. 이 나이 때의 애들은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니 말이다. 뭐. 확실히 좋아보이긴 하다만. 하지만 의미없이 감탄사를 내뱉은 벨의 시선은 봉투보단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박혀 있었다. 과연 저들이 누구일지. 그녀가 언제 소개해 줄 지만 계속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잘 숨겨두었던 선물을 개봉하듯 두근거리는 시선으로 벨을 바라보던 이셀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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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0 25 12쪽
33 죽음(10) 14.04.23 1,435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1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9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2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5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7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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