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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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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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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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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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글자
7쪽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DUMMY

벨은 우선 가장 쉬운 인물부터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가 눈독을 들인 자는 바로 만군이었다. 넉넉한 인상이나 건장한 체격과는 다르게 만군은 언제나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다녔다. 그가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대상인은 분명 돈을 많이 벌긴 하지만 귀족의 작위를 갖지 못한다. 물론 귀족의 예법이나, 식사예절 또한 배운 적이 없다. 아이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스스로가 모두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가장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삼삼오오 모여드는 아이들과 밥을 먹던 벨은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만군을 불렀다.


“만군! 이리 와서 같이 먹자!”

“어? 아, 아니야. 나는 그냥 혼자 먹을래.”

“에이. 혼자 먹는 건 재미가 없잖아. 같이 먹자~”

“그래. 만군. 같이 먹자. 왜 만날 혼자 먹으려고 해?”

“이리 와. 이리 와~”

“......알았어.”


풀이 죽은 채 다가오눈 그를 보며 벨은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굳이 자리도 비좁은 원탁에 그를 부른 이유. 그것은 모두에게 만군의 식사 예절이 얼마나 뒤떨어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참을성이 없다. 눈에 거슬리는 것을 어른처럼 담아두지도 못하며, 그건 같은 반 친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악의가 없는 그들의 말이 만군에겐 얼마나 상처가 될지 벨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벨의 예상대로 자리로 온 만군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얼떨결에 포크와 나이프를 먼저 집어 들었다. 마침 옆에 있던 이셀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머? 만군. 냅킨은? 목에 먼저 걸어야 하지 않아?”

“아! 으응. 미안해.”

“아니. 뭐. 미안할 것까지야.”


벨은 피식 웃으며 우아한 솜씨로 스테이크를 잘랐다. 냅킨부터 틀려버리면 앞은 더 답이 없다. 과연 나란히 놓인 여섯 개의 포크와 나이프 중 대체 뭘 먼저 쓸 건지 말이다. 만군은 땀을 뻘뻘 흘린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스테이크를 자르는 데 쓰이지 않는 엉뚱한 나이프를 집어 든다. 바로 어딘가에서 지적이 날아든다.


“만군. 그거 말고 옆에 있는 나이프.”

“어? 어어. 미안해.”

“만군. 포크로 고기를 찍었을 때는 나이프를 내려놔야 해.”

“미, 미안해. 잘못했어.”

“만군!”

“만군!”

“으아아악!!”


쾅.

결국 참지 못한 만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금세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이건 아니지. 그렇게 일어서는 건 예법에 어긋난다고. 역시 귀족이 아닌 평민이라 잘 모르는 건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목소리가 만군의 목을 조인다. 진정되지 않는 눈동자는 어디를 봐야 할 지 몰라 흔들거리고, 그의 목은 부드러운 고기 대신 마른 침만 꿀꺽꿀꺽 삼킨다. 결국 냅킨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만군이 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벨. 더 이상 밥은 먹지 못할 것 같아.”

“그래? 하는 수 없지. 나도 미안해. 괜히 억지로 불러서. 창피를 줄 생각은 아니었어.”

“아니야. 이해해. 오히려 날 생각해 준 네게 이런 짓을 한 내가 잘못이지. 먼저 가볼게.”

“응.”


어색한 침묵을 뒤로 한 채 만군은 비틀비틀 걸어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의 자리엔 아직 한 입도 제대로 뜨지 않은 수프와 흉물스럽게 잘려나간 스테이크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당연히 만군이 떠나간 자리에선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언제나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줄리안이었다.


“흥. 돼지 주제에. 아카데미엔 무슨 생각으로 들어온 건지 모르겠네. 안 그래?”

“그러니까 말이야. 벨도 그래. 우리끼리 잘 먹고 있는데 왜 걔를 부른 거야? 덕분에 밥맛 떨어졌어.”

“미안해. 다들. 하지만 만군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소리를 지르려는 생각은 없었을 거야. 그리고 난 그가 평민이라고 해서 따돌리고 싶지 않았어.”

“우,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만군은 뭐랄까.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밥맛 떨어져.”

“맞아맞아.”

“그건 나도 인정.”


이셀리아가 곤란한 웃음을 짓는다. 벨의 앞에서 친구들의 경망스러운 부분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거겠지. 하지만 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오히려 입을 다물고 있는 게 그녀의 수치심을 더욱 더 키우는 데 효과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음 점심 식사 땐 이셀리아는 저 여자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 자들을 아무리 뜯어봐도, 전쟁이 끝난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던져줄 가치 외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벨에게도 좋은 결과였다. 그렇게 다소 어색한 점심 식사를 뒤로 하고, 다시 교실로 돌아온 벨은 막힘없이 걸어 만군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책상에 엎드려 훌쩍거리는 중이었다. 벨은 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만군. 만군!”

“어? 어. 무, 무슨 일이야. 벨.”

“너 솔직히 말해봐. 짜증나지?”

“뭐, 뭐가?”

“눈치 보여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아이들은 네게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 것 같고. 귀족예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아, 아니야. 내가 평민 주제에 이런 곳에 들어오려고 했는 게 문제......”

“한심한 소리 할 거면 돌아갈게.”

“잠깐만!”


벨은 만군의 다급한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만군의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안 그래도 평민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등록금을 내고 이 아카데미에 왔다. 이제 시작이긴 했지만,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초석을 잘못 다지면 집은 세울 수 없다는 말을 하곤 했다. 아직 초석이라는 게 와 닿지 않을 나이였지만, 어린 만군도 ‘기초’의 중요성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벨의 옷자락을 꽉 잡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줘. 벨. 제발 부탁이야!”

“우선 두 가지. 첫 번째론 살을 빼야 하고, 두 번째론 귀족의 예절에 대해 배워야 해. 만약 네 자신을 바꿀 뜻만 있다면 내가 도와주겠어. 살을 빼는 것도, 예절을 배우는 것도. 하지만 지금 이대로 살아도 괜찮다면 더 이상 내가 네게 말을 걸 이유는 없지.”

“해볼게! 진심으로! 내 모든 걸 다 걸고서라도 해볼게!”

“......정말이야?”

“응!”

“휴. 알았어. 도와줄게.”

“고마워. 벨!”

“친구잖아. 당연한 걸 가지고 뭘.”


벨의 말에 만군은 그를 다시 보았다. 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놀리려고 부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 일이 마음에 걸려 찾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굳이 귀찮은 귀족의 예절을 가르쳐주는 것도 모자라, 살을 빼는 것까지 협력하겠다니. 만군으로서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벨을 어깨를 으쓱했다. 첫 번째 목표, 만군은 이미 90% 이상 자신에게 넘어온 셈이었고, 그는 이 자를 얻는 순간 형과 누나와의 싸움에서 자신이 반 발짝 앞서 나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아이들 사이에서도 유독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죠.

어쩌면 그의 속은 누구보다도 시커멓게 탔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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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9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6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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