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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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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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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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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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22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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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글자
11쪽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DUMMY

“헉헉!”

“만군. 발이 느리다.”

“자, 잠깐만 기다려! 네가 너무 빠른 거라고!”

“뛰어! 주말이라고 봐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벨!”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도시에 두 아이의 모습이 나타난다. 한 명은 일정한 호흡과 여유로운 표정의 금발머리 아이, 다른 한 명은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표정의, 터번을 눌러 쓴 아이였다. 만군이 올 때까지 제자리 뛰기를 하던 벨이 금세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전은 만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만군. 거의 다 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달려가면 아카데미 정문이야!”

“허억. 헉. 제발 기다...려...줘.”

“이쪽까지만 달려와!”

“으아아!!”


팔을 크게 흔드는 벨의 격려에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달려간 만군은 결국 오르막길 중턱에서 퍼져 버렸다. 급히 물통을 꺼내들었지만, 아무리 거꾸로 잡고 흔들어도 물은 나오지 않는다. 낙담한 만군은 물통을 내던지곤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다. 뜨겁다. 햇볕을 받지 못한 찬 바닥 위에 누웠는데도 몸에서 나는 열 때문에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한동안 누워서 숨을 헐떡이던 만군은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자 좁아졌던 시야가 천천히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우와......”


서서히 밝아져 오는 하늘, 달리기를 멈추니 그제야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 그 어떤 것도 새벽 조깅을 하기 전엔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두 눈을 감고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던 그는 갑자기 얼굴 위로 떨어지는 물 때문에 방정맞게 몸을 흔들어야 했다. 바위 같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다음 고개를 드니, 거기엔 환하게 웃으며 물통을 건네는 벨이 서 있었다.


“자. 마셔. 목마르지?”

“고마워. 벨!”

“고맙긴. 그래도 처음 달린 것 치곤 잘했어. 특히 마지막에 끝까지 달려와 준 것도 감동이었고. 아. 천천히 마셔. 탈난다.”

“알았어.”

“아침은 기숙사에서 먹을 거지?”

“응. 근데 정말 괜찮겠어? 이셀리아와 먹지 않아도?”


만군의 말에 벨은 갑자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상인의 아들답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만군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셀리아 쪽에서 굉장히 반대를 한 모양이다. 아니면 어지간해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벨이 당황할 만한 짓을 했거나. 그가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자, 겸언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던 벨이 입을 열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안 괜찮아 졌어. 이셀리아가 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바람에 결국 우리 둘만 먹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거든.”

“아. 그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끼리 먹어.”

“그래서 셋이 먹으려고.”

“......뭐?”

“설마 이제 와서 도망칠 셈은 아니지? 나 한 번 불 붙으면 아무도 못 말린다?”

“휴우. 알았다. 알았어. 따라갈게.”

“좋아. 방에 가서 씻고 1층에서 만나자.”

“응.”


만군은 손을 흔들며 달려가는 벨의 모습에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그러셨다. 안은 전쟁터다. 너를 무시하려는 자들과 이용하려는 자들 밖에 없다. 친구가 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 헛된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하지만 벨은 그런 아이들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어떤 일에도 함께 해주려 하고 있었다. 벨이라면 언제든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다고, 그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벨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


개운하게 씻고 나타난 만군은 자신을 향해 눈을 흘기는 이셀리아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벨 때문에 오긴 했지만 역시나 뒤통수가 따끔거린다. 따끔따끔. 이렇게 있다간 그녀의 시선에 머리가 뚫리는 건 아닐까. 그런 이셀리아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침 식사를 가져오던 벨이 환히 웃으며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만군. 약속대로 와줬구나.”

“응. 나도 얼른 음식 가지고 올게.”

“오다가 발에 걸려 넘어져라! 부-우.”

“이셀리아!”

“쳇. 주말 아침은 항상 나 혼자서만 볼 수 있었단 말이야!”

“괜찮잖아. 설마 만군한테까지 질투하는 건 아니지?”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좀 봐줘.”

“오늘 데이트 해주면 봐줄게.”

“알았어. 밥 먹고 놀러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응!”


그녀보다 어리면서도 오히려 벨이 이셀리아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나이 차가 있어서 그런가. 마치 딸을 키우는 느낌이다. 눈을 사르르 감은 채 기분 좋게 웃는 그녀를 보며 마주 웃어준 벨은 멀리서 밥을 받아 돌아오는 만군에게 손을 흔들었다. 만군은 기본적으로 사람들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하는 터라, 고개를 바짝 숙이고 다닌다. 행여 이쪽을 지나쳐 갈까 벨이 꽤나 신경을 써준 셈이었다. 그 모습을 본 만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두 사람의 자리로 걸어왔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아니야. 우리도 얘기 나누는 중이었어.”

“자리가 좀 남아 보이는데 나도 좀 껴도 될까?”


갑자기 쾅. 하고 원탁에 새로운 식판이 놓여진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전부 꿰뚫고 있던 벨에게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셀리아나 다가오는 만군에게도 놀라울 만한 일이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목을 꽉 조인, 이니셜이 새겨진 금 목걸이, 어린 아이 답지 않은 짙은 감색 상의와 짧은 청바지, 그리고 징이 박힌 검은색 부츠. 바로 용병 집안의 기대주, 아이들 사이에서도 친해지길 꺼려하는 붉은 머리의 멜리아가 스스럼없이 그들의 원탁으로 다가온 것이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벨이 입을 열었다.


“볼 일이라도?”

“아버지가 널 마음에 들어 하셔서. 강제로라도 친해지라는 명령이셔. 아. 나는 확실히 싫다고 말했어. 정말이야.”

“내가 어디가 마음에 드신대?”

“너. 나이도 어린 게 벌써 정보원을 두고 부릴 줄 알잖아. 나에 관한 거나, 여기 있는 만군 그리고 린델에 관한 정보까지 남김없이 조사하는 걸 보고 반하신 것 같아.”

“응? 내 정보?”

“그래. 이 녀석, 우리 둘의 정보를 마구 끌어 모으고 있었다고. 이해가 되니? 만군?”

“그, 그건 내가 벨에게 준 사람들이야! 벨이 작정하고 너희들의 정보를 모은 건 아니라고!”

“정말이야. 벨?”


어딘가 의심쩍어하는 멜리아의 시선에 벨은 양 손을 들어 올렸다. 정말이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대체 어디가 8살이란 말이냐. 이런 귀엽지 않은 8살은 처음 본다. 처음 봐. 정보를 모으면 누군가 또 그 사실을 알아채고 물고, 그럼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아채고 물어댄다.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사슬 위에서 벨은 위태롭게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용병집안이라 뭔가 다른 것일까. 무엇보다 자신에게 목이 베였던, 멜리아의 아버지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니. 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피식 웃으며 속이 꽉 찬 빵을 한 입 물은 그는 멜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일부러 모은 거 맞아. 난 너희들과 더 친해지고 싶었거든.”

“친해지고 싶다고 사람 뒤를 캐? 그건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은데. 네가 하는 건 뒷조사라는 거야. 벨. 아니? 뒷조사.”

“알아. 하지만 너희들은 그냥 친해지긴 어려운 성격들이잖아. 내겐 좀 더 쉽고 빠르게 친해질 방법이 필요했을 뿐이야.”

“왜지? 왜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랑 친해지려고 한 거지?”


멜리아가 목소리를 낮춰 묻자, 벨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멍하니 서 있던 만군도, 이셀리아도 그를 따라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진지한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던 벨은 이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벨의 군단을 만드는 중이거든!”

“......뭐?”

“만군은 듬직해 보여서 좋고, 멜리아는 날쌔보여서 좋고, 이셀리아는 내 여자친구라 좋고, 린델은 음, 거칠게 보여서 좋아. 처음 본 순간 정한 거라고. 너희들은 내 동료가 될 거라 말이야.”

“......설마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왜? 그게 전부면 안 돼?”

“하아. 돈지랄도 정도가 있지.”

“지랄? 멜리아. 지랄이라는 게 대체 뭐야?”

“시끄러. 온실 속 화초 주제에.”

“힝. 벨. 쟤 무서워.”

“왜 그래! 우리 이셀리아 겁주지 마.”

“예이. 예이. 알았다. 알았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앉는 멜리아를 보며 벨은 피식 웃었다. 상류층의 돈지랄.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누가 봐도 지금 벨이 하는 짓은 귀엽게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의, 딱 6살 먹은 아이다운 행동이었다. 자신의 군단을 만든다니. 이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말인가 말이다.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멜리아도, 그리고 벨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던 만군도 이 어이없는 상황에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푸흐흐......군단이래. 군단.”

“푸풉. 웃기지마. 멜리아!”

“야. 아무리 그래도 푸흐, 군단...푸하하하!!”

“하하하.”


결국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들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가로 새어나온 눈물을 훔치던 멜리아가 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너 꽤 재밌는데? 그 군단이라는 거 나 들어갈래. 어차피 아버지도 친해지라고 했고.”

“나도 나도! 벨은 내 둘도 없는 친구니까.”

“난 벨의 여자 친구니까!”

“자. 그럼 이제 린델만 섭외하면 되겠네.”

“그 녀석 근데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럼 일단 첫 번째 목표는 정해졌네. 바로 린델을 우리 군단으로 데려오는 거.”

“재미있겠는데? 좋아.”

“열심히 해보자!”

“오우!”

“나, 나도!”


훗날.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로, 멜리아와 이셀리아, 만군은 벨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벨은 테이블 위에 올린 손에 턱을 괸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죽을 자들이다. 자신의 손이든, 아니면 질투가 심한 공주의 손이든. 하지만 이번만큼은 죽기 전에 자신의 거대한 강의 흐름을 바꿔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를 벨은 간절히, 더욱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작가의말

벨의 과거 이야기는 언제 나와야 할지 고민중입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우울한 이야기라 언제가 좋을지 간만 보는 중이지만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64 들보
    작성일
    14.02.23 00:19
    No. 1

    슬프네요.. 이렇게 재밌는 글에 댓글이 없다는건!!

    항상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대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화이팅!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 북풍광
    작성일
    14.02.23 00:25
    No. 2

    감사합니다^^ 그래도 선작과 추천히 꾸준히 늘고 있다는 건 다들 재밌게 봐주신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해요. 건필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아시라비야
    작성일
    14.06.22 01:35
    No. 3

    오랜만에 다시 정주행중...여전히 음울하군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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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7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1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799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39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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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2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3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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