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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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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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23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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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DUMMY

얼마 뒤부터, 그러니까 얼떨결에 군단을 만들겠다고 선포한 지 꽤 지난 뒤부터 혼자 달리던 벨의 주변엔 만군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뒤이어 재미있어 보인다며 따라온 멜리아, 그리고 멜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온 이셀리아가 같이 달리고 있었다. 혼자 걷던 길을 나란히 달리는 기분은 참으로 묘한 것이라, 벨은 가끔씩 그 자리에 멈춰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조용하기만 한 길거리엔 아이들 특유의 맑은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이제 이런 기분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벨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과 함께 웃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젠장!”


아이들과 헤어져 씻으러 들어온 욕실에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욕을 내뱉는다. 그렇게 당하고도 왜 다시 정을 갈구하는지 모르겠다. 제 이름자 쓸 줄 모르는 천출도 한 번 당하면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또 다시 아이들 사이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고 있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그 살인마 집단에서 자란 자신만 이렇게나 불완전한 존재란 말인가. 벨의 작은 손이 연신 욕실의 벽을 때린다. 빨갛게 변한 주먹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밖으로 나왔다. 마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한 입 뜨고 있던 라슈벨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벨. 무슨 일이야. 욕실이 다 떠나가라 욕을 해대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그 동안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잖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럼 형에게 다 털어놔봐. 형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형도 가지고 있잖아요.”

“응?”

“형도, 누나도 평소와는 다른 사람을 속에 가지고 있잖아요. 저도 그래요. 저도 발렌타인 가문의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제발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


라슈벨은 처음 겪는 벨의 반항에 가만히 입을 닫았다. 평소와는 다른 사람.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도 동생이 말하니 괜히 석연치 않았다. 화가 난 중에도 차마 이중인격이라는 말을 하지 못한 벨이 최대한 순화한 단어가 그의 마음을 흔든 셈이다. 잠자코 수프를 먹던 라슈벨이 침대 옆에 놓아둔 벨 전용 지갑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벨이 의아한 표정으로 라슈벨을 바라보자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너도 나도, 그리고 리엔과 어머니, 아버지조차도 모두가 가슴 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지. 어쩌면 우리 가문엔 저주가 내린 건지도 몰라. 제국의 총애를 받는, 잘 먹고 잘 사는 가문은 하루 빌어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에겐 증오의 대상이거든. 하지만 벨, 형은 널 사랑한다. 비록 이렇게 지갑을 던져주는 것으로 밖엔 표현하지 못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널 사랑해. 내 동생아.”

“......죄송해요. 형. 엉뚱한 소리를 해서.”

“아니야. 괜찮으니까 오늘은 다 잊고 그 안에 있는 돈으로 친구들과 나가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하렴. 가끔 형 이름도 팔고 그래. 아이들이 더 좋아할 거다.”

“후후. 네.”

“얼른 밥 먹어. 식겠다.”

“네.”


벨은 지갑을 품에 꼭 안은 채로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그릇 뚜껑을 열었다. 수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저으며 그는 몇 번이고 울컥하는 마음을 달래야 했다. 실패다. 높이 쌓아올린 벽이,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던 벽이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차라리 그들을 따라 아카데미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 미친 집안에서 하루하루 하녀로 분장한 채 아버지의 수발을 들어야 했던 불쌍한 신부들을 구했더라면. 전생처럼 이들에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을 텐데. 사내는 어느새 자신에게 검을 가르쳐주는 리엔에게까지 미미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벨은 죽고 싶을 만큼 싫어졌다.


***


여섯 살로 되돌아왔더니 생각도 어려진 것인가. 아니면 정에 휘둘리기 쉽게 된 것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은 쉽게 나오질 않는다. 벨이 복잡한 표정으로 기숙사 식당 안에 들어오자, 마침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멜리아가 손을 높이 흔들었다. 잠시 멈칫한 그가 한숨을 내쉬며 원탁에 앉았다. 5층까지 배달을 시킨 자신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는 모양이었다. 뜨끈한 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포크로 찍은 멜리아가 벨에게 말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라슈벨님한테 한 소리 들었어?”

“아니. 그냥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서.”

“뭔데. 뭔데. 고민이 있으면 내게 말해줘. 난 네 여자 친구잖아!”

“유세떨기는. 나도 여자 친구거든? 너만 특별한 것처럼 말하지 마.”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여자 친구보단 더 가까운, 음...그래 애, 애인이라고!”

“그거나 그거나!”

“그만들 해. 안 그래도 머리 아픈 벨이 더 아파하겠다.”


새벽 조깅의 성과가 있었는지, 그간 살이 꽤 빠진 만군의 말에 두 사람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벨은 그 모습을 보곤 피식 웃었다. 언제나 어른 같이 보이더니 이럴 때만 놓고 보면 영락없이 어린 아이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 정에 이끌리니, 뭐니, 라는 말을 하다니. 자신답지 않게 순수한 마음에 휘둘린 모양이다. 벨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난 놀러 온 게 아니다. 내 과거를 바꾸기 위해 온 거야.’


그를 위해선 차가워져야만 한다. 냉정하게 더욱 냉정하게 자신을 다듬어야 한다. 전생에도 정에 휘둘려 결국 죽여도 되지 않아도 될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대었다. 특히 이 곳, 벨슈포드 아카데미를 복수를 하겠다며 미친 듯이 날뛰었던 일은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살인 행위 중 가장 후회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세운 전략이 아니던가. 이들을 그의 말로 써먹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은 우정을 쌓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계략에 그가 말려들어가선 말이 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입술에 무언가 닿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거기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 조각을 포크에 찍은 이셀리아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이거 먹을래?”

“어? 어. 고마워.”

“오늘 빵이 참 잘 됐어. 한 접시 더 받고 싶을 정도다.”

“나도! 나도 받으면 안 될까?”

“안 돼. 넌 살 빼는 중이잖아. 벨의 시간은 전부 뺏는 주제에 마음대로 먹어 또 찌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줄 알아.”

“......알았다. 알았어. 안 먹으면 되잖아.”


제멋대로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벨은 입을 우물거렸다. 확실히 갓 만들어진 빵 맛은 기가 막힐 정도다. 하지만 벨에겐 빵 맛 보다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더 문제였다. 그렇다고 공을 들인 아이들과 하루아침에 돌아설 수 없으니, 그것 또한 문제다. 한숨을 내쉰 벨은 의자 뒤로 고개를 확 젖혀버렸다. 될 대로 되라지. 이런 썅. 정말 될 대로 되라지. 그는 냅킨으로 얼굴을 덮은 채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귓가에 아이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마치 꿈속의 소리처럼 아련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자. 가자!”

“어딜.”

“주말인데 어디라도!”

“그래. 벨. 오늘 퍼레이드가 있다고 하던데 거기 가볼까?”

“퍼레이드? 누구의?”

“누구긴 누구야. 왕자님과 공주님이지.”


그 말에 벨은 얼굴을 덮고 있던 냅킨을 얼른 치워버렸다. 그의 동그랗게 뜬 눈이 아쉬운 표정으로 그릇을 바라보는 만군에게로 향했다.


“몇 시, 몇 시 인진 알아?”

“아카데미의 종이 치는 시각이니까 12시겠지 뭐.”

“그럼 3시간 동안 린델을 어떻게 빼올까 작전회의를 하자!”

“좋다! 작전회의 좋아!”

“너희들 작전회의가 뭔진 알고 말하는 거야?”

“그럼! 일단 회의에 쓸 과자랑 빵을 사는 게 필요해!”

“휴......제대로 회의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러지 말고 얼른 가자. 벨.”


벨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는 이셀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앳된 얼굴에서 훗날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그 얼굴이 겹쳐져 보여, 그의 입술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잠지 머뭇거리던 벨이 내민 손을 잡자, 이셀리아는 손을 앞뒤로 흔들며 정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벨의 정신은 온통 12시에 있을 퍼레이드에 가 있었다. 그녀만큼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솔직히 어렸을 때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그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공주에게 연정을 품었던 벨에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회의에 필요한 과자를 사기 위해 나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걸어나갔다. 어느새 도시를 가득 채운 따스한 햇볕이 그들을 차별없이 비춰주고 있었다.


작가의말

어떤 일이든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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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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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6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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