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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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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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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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3)

DUMMY

영지에서의 주민들의 무단이탈이 줄을 잇자, 아무리 영주라도 초야권을 그대로 강행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단 한 번의 시행을 끝으로 하녀 복장을 한 신부가 그의 서재로 들어가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영주는 사람들의 입에서 여전히 오르내렸다. 저잣거리에선 매일 오늘은 누가 이사를 갔느니, 어느 집의 아이가 자살을 했느니, 같은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고 결국 이 일은 쉬쉬했던 과거와 달리 주변 영지들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무식한 짓이었지.”


벨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부인의 말에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따뜻한 아침 햇살아래 체온이 담긴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는 건 이미 30살에 들어선 그에게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 당장 잠이 들면 말 그대로 꿀맛 같은 잠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가끔은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벨의 기분을 날아오르게 만든 건 바로 어머니가 미치지 않았다는 점. 어머니는 강한 여자였다. 아버지의 초야권에 흔들리지도, 울음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 모든 걸 감내할 뿐.


‘또 다시 과거가 바뀌었다. 하지만 이번엔 모순이 아니지. 나는 6살 아이다운 모습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새하얗게 웃고 있는 벨은 어머니가 미치지 않은 게 아버지가 지속적인 외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계속해서 초야권이 시행되고 얼굴도 모르는 젊은 여자들이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면, 그녀는 분명 전처럼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또 다시 바뀐 과거.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게 벨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악마는 지금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겠지. 자신이 만든 룰을 부수고 다시 과거를 헤집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어느 쪽이든 벨에겐 너무나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한참 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어머니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네 아버지도 불쌍한 사람이란다, 벨. 어쩌면 누군가에게 부추김을 당한 걸지도 몰라. 초야권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잘만 이용하면 결혼할 여자들을 서재로 들일 수 있다고.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에 동했던 거겠지.”

“그래도 아빠 옆엔 엄마가 있잖아요.”

“엄마는 아빠에겐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그저 밖에서 안을 들여다봤을 때, 내 옆에는 마누라도 있고, 자식들도 있어요. 라는 말을 하기 위해 세워둔 인형일 뿐이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엄마 말을 잘 기억해둬. 언젠가 네가 그 뜻을 이해하는 날, 우리 벨도 그 땐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네. 엄마.”

“그래. 엄마는 아빠한테 드릴 죽을 만들어야 하니까, 너는 얼른 가서 공부라도 하고 있거라.”

“네!”


힘차게 대답한 벨을 보며 힘없이 웃던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서재에 틀어박히다시피 한 공작을 돌보는 건 온전히 부인의 몫이 되었다. 매일 죽을 비롯해서 갖은 먹을거리를 해다 먹이고, 직접 몸에 좋다는 음식들을 전부 하기 시작했다. 물론 요리를 하는 주방장부터 하녀와 하인들이 있었지만, 부인은 고집스럽게 스스로 하기를 원했다. 어쩌면 그건 아버지와의 조각난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 붙여 보려고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노력일지도 모르겠다고, 벨은 생각했다.


“과연 이번에는 아버지의 반역을, 형의 죽음을, 누나의 죽음을 나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고작 이런 작은 변화에 기대를 거는 자신의 꼴이 우습다. 악마가 말했던, 죽은 사람들이 바라는 건 개과천선한 벨의 모습이 아니라 비참하게 죽어가는 벨의 모습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스스로도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왜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하는 걸까. 죽으려고 했으면서. 이런 저주받은 집안에 다시 태어나면 모두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고 했으면서. 그는 모진 제약에도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몇 십번을 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국 난 구제할 수 없는 멍청이다.”


벨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 순간에도 살고 싶다고 요동치는 작은 심장이 우습다. 어머니가 미치지 않고 아버지를 감화시켰으면, 이라고 생각하는 작은 머리가 우습다. 형이 내려오지 않고 누나와 함께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태평한 자신이 우습다. 결국 과거라는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광대 주제에.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검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마침 풀을 다듬고 있던 집사가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작은 도련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연습을 하러 왔어.”

“네? 연습이요?”

“응. 검을 연습할 거야. 폐하께서 주셨으니까!”

“하하. 기특하십니다. 그럼요. 매일 책만 보시다간 몸이 약해지셔요. 검을 통한 체력 단련은 분명 작은 도련님께 중요한 영양분이 될 겁니다.”

“그래? 그럼 나 가르쳐줘.”

“......예?”

“나 사실은 하나도 할 줄 몰라. 네가 좀 가르쳐줘.”

“아. 저도 누굴 가르칠만한 실력은 못 되는데......공작님에게 직접 가르쳐달라고 하는 건 어떠세요?”

“아빠? 아빠는 검 잘 써?”

“그럼요. 검으로 작위까지 받으신 분인데요. 아. 그렇지. 저랑 같이 가요. 작은 도련님. 분명 크게 기뻐하실 거예요.”

“응. 갈래.”


벨은 군소리 없이 집사의 뒤를 따랐다. 사실 어느 정도 계산된 행동이었다. 어린 아이가 혼자서 말도 안 되는 검을 휘두르는 건 확실히 상황에 어긋난다. 하지만 배움을 구하고, 그 집사가 더 나은 방법을 가져다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게 틀림없었다. 벨은 이제 자신이 변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상황을 바꾸는 일에 어느 정도 능숙해져 있었다.


“흐음.”


그리고 마침 돌담위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악마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저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무식한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이대로 간다면 분명 녀석의 과거는 크게 바뀔 것이고, 어쩌면 죽을 수 있는 자들이 죽지 않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흠흠. 역시 이런데서 먹는 햄버거 맛은 각별하군.”


한 손에 들고 있던 햄버거를 야무지게 깨물어 씹는다. 무의식중에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려다, 하필 시간이 없어 세트가 아닌 단품으로 시킨 게 생각난다. 그는 혀를 비쭉 내밀며 남은 조각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손을 탁탁 털은 그의 눈에 서재로 달려가고 있는 벨의 모습이 들어온다. 마치 좋은 구경이라도 하듯,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던 악마가 입을 열었다.


“벨. 벨 폰 발렌타인. 넌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돼. 지금까지 죽인 자들의 수십, 수백 배는 되는 자들을 말이야. 너는 우리에게 선택된 자이고, 지옥에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 넣기 위해선 네가, 그리고 네 과거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그만 비뚤어져라. 네 과거고 나발이고 다 집어 삼키기 전에.”


씩 웃던 그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악마가 향하는 곳은 바로 수도. 라슈벨과 리엔이 있는 벨슈포드 아카데미 쪽이었다.


작가의말

음. 다음화가 너무 늦었군요. 앞으론 1일 1회 연재 지키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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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64 들보
    작성일
    14.03.03 15:12
    No. 1

    역시 악마는 악마군요
    더 많은 사람을 타락시키기위해 벨을 선택한거니..
    회귀및리셋을 시키는 강력한 권능의 악마에게
    어떻게 벨이 엿먹일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 북풍광
    작성일
    14.03.06 13:17
    No. 2

    벨이 속으로 이를 갈고 있으니, 앞으로도 지켜봐주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4.03.04 01:08
    No. 3

    그냥 커서 전투에 나가서 일하게 하면 되잔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 북풍광
    작성일
    14.03.06 13:18
    No. 4

    아니지. 벨은 지금 악마의 말대로 따라올 생각이 없잖아.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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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죽음(10) 14.04.23 1,435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6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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