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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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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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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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6)

DUMMY

지옥 같던 시간이 흘렀다. 아니, 이미 이곳은 지옥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공허함에 대비조차 제대로 못했던 영주는 벨을 때리는 것으로 비어버린 마음을 채웠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움직임도 점점 적극적으로 변했다. 얼굴에 손을 올리는 것도 예사였다. 또 다시 파멸의 길로 접어들까 두려워한 벨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자, 거칠 것이 없었다.


“죽어! 죽어버려! 너 같은 새낀 뒤져야 돼!”

“윽.”


그렇게 참아내다 벨의 입에서 비명이라도 터져 나오면,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렸다.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실제로 문 밖에서 듣고 있던 집사가 몇 번이고 부인에게 말하려 했지만, 그 때마다 강하게 제지한 벨 때문에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벨은 인내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그의 밥을 어머니가 직접 챙겨주는 지금, 약을 섞을 기회가 없었을 거고 그로 인한 발작 증세였다. 분명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다. 금단 증상이라는 게 얼마나 심각한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는가.


“죽어!”


퍽. 하고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벨이 구석에 처박히자, 영주는 그날의 폭행을 마무리 지었다. 인상을 찌푸릴 힘도 없이 처박힌 벨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옷을 툭툭 털어내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갈 곳 없는 연민과 길을 잃은 동정이 메아리친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표정. 자신을 소름 돋게 하는 표정에 영주의 이마에 불끈 힘줄이 솟아올랐지만, 그는 다시 손을 대지 않았다.


“내일 다시 보자. 네놈의 표정이 먼저 고쳐지나, 내 성격이 먼저 고쳐지나 한 번 보자고. 벨.”

“들어가세요. 아버지.”

“휴. 어린놈이 벌써부터 비꼬는 것만 배워선. 좋아. 내일 보자고. 집사! 와서 약 발라!”

“예. 주인님.”

“으유. 으유우!!!”


벨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소리를 지르며 나가는 영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폭력을 쓰면 쓸수록 더욱 감정 조절에 힘들어 했다. 이젠 벨을 때리는 것에도 내성이 생겨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벨은 안에 들어와 호들갑을 떠는 집사에게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는 제스처를 취하곤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어쩜. 이렇게 여린 공자님을 이 지경이 되도록......벨 도련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날이 밝으면 제가 말을 할 게요.”

“그러지 말라고 분명히 말 했을 텐데.”

“이러다가 도련님 죽어요!”

“안 죽어. 아버지도 어디까지 때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그 정도로 가정의 평화가 지켜진다면 난 만족해.”

“하지만, 하지만!”

“집사. 괜히 나섰다가 유모처럼 죽고 싶어서 그래? 알잖아. 아버지 한 번 화나시면 아무도 못 말리는 거. 그냥 지켜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실 거야.”

“......죄송해요. 아무런 힘도 되어 드리지 못해서.”

“아니야.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해.”


벨의 말에 집사는 눈물을 삼켰다. 영주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집안에서 미치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벨뿐이라는 것을. 그래서인지, 다들 벨만은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벨이 매일 밤 영주에게 폭력을 당한다는 걸 안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해주려 했다. 늦은 밤, 맛있는 야식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든 부인에게 알리려는 자도 있었다. 물론 벨에게 있어선 모두가 귀찮은 호의일 뿐이었지만. 그저 다정한 관심에 입을 맞춰줄 뿐이다. 본래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들의 상냥한 마음을 표출할 상대를 찾아내기 위해 발악을 하는 법. 앞장서 그 대상이 되어줬다.


‘참으로 피곤한 일이구나.’


벨은 두 눈을 감았다. 검술 훈련은 무슨. 책을 읽기에도 버거운 날들이었다. 제대로 수련을 하지 않은 그의 몸은 과거처럼 바짝 말라, 걸어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벨은 피식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악마가 요구한 대로 과거의 그의 모습을 표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나타나 불만을 토로할 틈도 없이. 오직 그 사실 하나만이 벨의 가슴을 기쁘게 해주는 선물이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거지?”

“헉.”

“매일 얻어맞고 살다보니 혹시 맞는데 도가 튼 건가? 그 쪽으로 쾌감을 느끼기라도 한다면 의뢰인으로선 좀 곤란한데.”


갑자기 창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몸을 바짝 일으켰다. 창가에는 어울리지 않게 하얀색 표지의 책을 든 악마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닫아놓았던 창문이 활짝 열려, 다소 쌀쌀한 봄바람을 방 안에 밀어 넣었다. 탁한 공기들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공기들이 채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벨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 형님에게 다녀오는 건가?”

“그런 셈이지. 아주 눈치가 빠르구먼.”

“무슨 짓을 했나. 대체 그에게 무슨 바람을 불어넣었나?”

“내가 너에게 그걸 일일이 보고하기 위해 이곳에 온 줄 알아?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넌 내가 부리는 종에 불과하다. 네 역할은 이 일그러진 과거를 끝내고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 아니야?”

“......”

“맞는 말을 하니 대답을 못하는군. 자. 지금이라도 그 소망은 이뤄질 수 있다. 어서 여기로 와. 내가 있는 곳에 달려오란 말이야. 벨 폰 발렌타인.”


벨은 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악마를 바라보았다. 왼손에 들린 책의 페이지가 바람에 휘날린다. 지금 당장 인생을 끝내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더 이상 말려들게 하지 마라. 원래 계획대로 네 과거를 끝내버려. 귓속으로 벌레가 꼬물거리듯 듣기 싫은 말들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닌다. 마치 벌레를 털어내듯 고개를 세차게 흔든 벨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두고 봐라. 내 과거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 자리에 서서 똑바로 보란 말이다.”

“후후.”

“왜 웃는 거냐.”

“인간은 어리석다. 그리고 너무나 이기적이야. 나라면 다르지 않을까, 나라면 바꿀 수 있을 거야. 나라면, 나라면, 나라면! 왜 진화과정에서 그 터무니없는 자기긍정이 버려지지 않은 걸까. 난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아.”

“두고 봐. 난 쉽게 죽지 않아. 네가 무슨 이유로 내게 새로운 삶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다.”

“글쎄. 과연 그럴까.”


벨을 바라보며 씩 웃은 악마는 허공에 손을 휘저어, 사방으로 흩어진 책의 장면들을 불러 모았다. 파라락 거리며 모든 종이들이 책 커버 안으로 모여들자, 그는 탁, 하고 양 손으로 책을 덮었다. 그리곤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했다.


“지금 이 방을 가득 채웠던 종이들. 전부 너와 같은 의도로 새 삶을 받고 죽어간 자들이다. 그리고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내가 바란 일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주었지.”

“......”

“너도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기대가 커. 벨 폰 발렌타인.”

“더 이상 할 말 없다. 사라져라.”

“기왕 온김에 서비스 하나 해주지. 형을 조심해. 이건 진심이야.”


벨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악마는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 기분나쁜 웃음에 마치 심장에 차가운 손을 올려놓은 것처럼 싸늘해진다. 그가 대체 무슨 소리냐며 입을 열려 할 때, 이미 악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작가의말

얼마전 4권을 출간했습니다 :)

그 때문에 조금 시일이 걸려버렸네요.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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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0 25 12쪽
33 죽음(10) 14.04.23 1,435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0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7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2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6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1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799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39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49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2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3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2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3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79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5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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