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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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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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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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7)

DUMMY

형을 조심하라. 수수께끼 같은 말은 계속해서 벨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 맴돌기만 한 게 아니라,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계속 찍어 내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형의 문제까지 겹쳐진다면, 이제 고작 6살인 벨이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 그야말로 종말과 죄악을 향해 달리는 마차에 몸을 싣는 격이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벨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일단 저 자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매일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일이 생기려고 할 때만 자신의 앞에 나타났으니까. 확신이 없다면 모습을 드러내진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는 건 이미 형을 만나 뭔가 확신이 설 만한 말을 건넸다는 건데, 대체 그게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오질 않았다. 형이 집에 내려올 수 있는 일은 없다.


사건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물론 더 이상 약을 타지 못한다는 게 문제가 되긴 하지만, 굳이 아버지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잘 다니고 있는 아카데미를 때려 치고 이곳까지 내려올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보기보다 야망에 대한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니까. 누나와의 트러블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더 말이 되지 않는다. 부모님께 내려와 일러바칠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자신의 결정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형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대체 뭐냐. 뭘 노리고 있는 거냐.”


그가 머리를 감싸 쥔 채 고민에 빠진 사이, 아카데미를 빠져나오는 라슈벨의 손엔 학장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긴급 휴가를 받아 집에 내려가는 중이었다. 허락받은 휴가의 내용은 아버지의 병이었다. 평소 지병을 앓고 계신 아버지를 위해 약을 준비해 드렸는데, 최근 하인에게서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믿지 못하는 학장에게 철저하게 준비한 하인의 편지를 증거로 제출하기까지 했다.


“내려가 봐.”

“감사합니다.”

“기간은 정확히 일주일이다. 아무리 우리 아카데미에서 손꼽히는 인재라고 해도 그 이상 무단으로 빠졌다간 다신 발도 못 붙일 줄 알아.”

“예.”

“어서 가봐. 공작님께 안부 전해드리고.”

“예. 학장님.”


아카데미를 나온 라슈벨은 굳은 표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그의 머릿속엔 얼마 전에 만난 악마의 속삭임이 계속 울려 퍼졌다. 그것은 정말 뜬금없다고 생각되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결국 라슈벨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는 작은 창문에 커튼을 치고, 뒤로 몸을 기댔다. 마차 좌석 특유의 푹신한 감각이 그의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혀 주었다. 라슈벨은 두 눈을 감은 채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일주일 안에 무슨 수를 써서든 끝낸다.’


일단 시작지점을 언제로 잡아야 할지가 문제다. 물론 약을 계속 먹여 미치게 만드는 게 더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어머니가 관련되어 있으니 쉽게 배제하기도 어렵다. 초야권을 행사하는 것도 실패하고, 약을 먹이는 것도 제재를 받기 시작했으니 사실상 그 요상한 남자의 말대로 죽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죽이고 난 다음에 어린 벨이나 어머니를 이용해 자신의 가문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게만 하면 된다.


‘어차피 그녀는 나랑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이제 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는다고 해봐야 내겐 아쉬울 것이 없어.’


아쉽다면 리엔이 난리를 치기야 하겠지만, 그에겐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피가 섞인 아버지까지 베어 버릴 생각인 라슈벨에겐 어쩌면 혈육에 대한 감정이 전부 죽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문득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아악!”

“라슈벨! 무릎을 더 곱게 펴라!”

“아, 아버지! 정말이에요. 할아버지가 저를......!”

“더 곱게 피란 말이야!”

“아아악!”


그것은 비명과 피, 살점들로 점철된 고된 고문의 순간들. 인생의 회의를 느낀 아버지가 그에게 손을 댄 건 아직 벨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라슈벨을 강제로 성폭행했다. 설마 남자끼리 그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라슈벨은 강력히 저항했지만, 할아버지의 힘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주변에 있는 하녀들과 집사들은 전부 그 끔찍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덕분에 그 사실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난 라슈벨이 울음을 터트리며 아버지에게 사실을 고하자 그가 내뱉은 첫 마디는,


“네놈이 꼬리를 쳤으니까 아버지께서 그런 짓을 하셨겠지.”


였다. 하물며 여자가 아닌 남자끼리였는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라슈벨을 때리고 윽박질렀다. 더럽다며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바람을 이유로 잠자리를 거부한 것도, 그 폭력에 자그마한 첨가물이었다. 그의 분노는 언제나 자신과 동생에게로 향했다. 매일 조그마한 잘못으로 얻어맞기 일쑤였고,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은 가출을 밥 먹듯이 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에게 말을 하려 해도, 그녀는 리엔을 때리는 것엔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자신을 때리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내아이는 좀 맞아야 돼!”


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덧붙인 채로, 자신을 방치했다. 그 결과 라슈벨은 부모의 기대대로 훌륭히 두 가지 인격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누구에게나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하게 보이는 인격, 다른 하나는 폭력적이고 집착 증세를 보이는 인격. 그리고 아버지의 길고 긴 폭력은 결국 어머니가 잠자리를 허하면서 끝이 났다. 그 때, 자신의 속에 응어리진 증오를 라슈벨은 결국 풀어내지 못했다. 사실 생각 같아선 그 집 자체를 전부 불태워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고상한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조용히 그들의 마음에 드는 자식을 연기하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너는 당장 영지로 가서 가문에서 제일 좋은 마차와 말을 가져 오너라. 내가 아카데미로 다시 갈 때까지 삼 일 이상 걸려선 안 된다.”

“예. 도련님. 오늘 새벽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그래.”


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인 남자가 서둘러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라슈벨은 자신의 앞에 선 으리으리한 저택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철문 안으로 곧게 뻗은 가도가 보이고, 주변을 장식한 식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철문 양 옆에 서서 굳게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그를 보곤 척척 걸어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발렌타인 일가의 라슈벨이다. 문을 열어라.”

“엇. 예! 공자님.”


순간 문이 열리고, 라슈벨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록 입구에서 안까진 20분 정도, 미로 같은 숲을 걸어가야 했지만 자신을 끊임없이 불렀던 할아버지 때문에 이 길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자의 성욕은 왕성하다 못해 더러울 정도여서, 저택의 모든 하녀들은 물론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들에게까지 손이 뻗었다. 라슈벨도 덕분에 엉망진창인 몸을 얻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에겐 나름 감사하고 있다. 기울어가던 발렌타인 가문, 그 중에서도 아버지가 공작 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할아버지인 룩소르 폰 발렌타인 덕분이었으니까.


“할아버지!”

“허허. 그래. 라슈벨. 집에 내려간다더니 어째 이 곳 먼저 들렀누?”

“아무래도 드려야 할 선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원래는 좀 더 나중에 드릴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좀 앞당겨 졌어요.”

“선물? 내게 줄 선물이라니, 그게 무엇이냐.”


너무 오랜만에 라슈벨을 봤기 때문일까. 살이 잔뜩 오른 룩소르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그를 훑었다. 손자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눈이 부셨다. 지금 당장 침대로 안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그는 약해졌고, 손자는 강해졌다. 그의 직접적인 의사가 있다면 모를까, 이제 강제로 행위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쉬움의 눈길을 거둔 룩소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일단 식사를 좀 할 수 있을까요? 배가 고파서.”

“음? 그래. 그렇게 하자. 여봐. 밥을 좀 내와라. 오랜만에 손자가 찾아왔으니, 맛있는 것들을 듬뿍 내오도록.”

“예. 어르신.”


집사가 나가자 라슈벨은 느긋하게 앉아 밥을 기다렸다. 모든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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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1 25 12쪽
33 죽음(10) 14.04.23 1,436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2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 죽음(7) +2 14.03.25 1,420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30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1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9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2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90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3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9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5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7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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