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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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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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2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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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8)

DUMMY

라슈벨의 앞엔 혼자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들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통째로 구운 돼지고기에선 뜨끈한 김이 올라오고, 몸에 좋은 야채들을 담근 샐러드와 불그스름한 색의 고기 스프가 놓였다. 그 외에도 몸에 좋다는 건 전부 식탁 위로 올라오니 세 사람은커녕, 네 사람이 달려들어도 충분할 정도였다. 룩소르는 수프 그릇을 들어 올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차린 게 많지 않지만 많이 먹어라.”

“이것만 해도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아니야. 아니야. 손자 놈이 오랜만에 왔는데 당연한 일이지. 헌데 오늘은 예서 자고 가는 게냐? 느지막한 시간에 왔으니 자고 가는 게 당연한가?”

“예. 자고 가야죠.”

“허허허. 오랜만에 할아비와 한 방에서 자는 게 어떻겠니? 서로 한 이불을 덮고 오손도손 이야기하던 때가 그립구나.”

“알겠어요. 그렇게 할 게요.”

“허허.”


의심할 법도 하건만. 그간 자신에게 접근하는 할아버지를 지독하게 싫어하던 손자가 이렇게 순순히 말을 듣는 걸 의심할 법도 한데, 룩소르는 이미 본능에 눈이 먼 짐승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그의 머릿속엔 오랫동안 줄에 묶어놓은 코끼리라도 떠오른 모양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줄을 끊을 수 있음에도, 어렸을 때의 학대가 떠올라도 결국 줄 주위를 맴돌고 만다는 코끼리. 룩소르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어리석은 자로구나.’


그 모습을 보면서 라슈벨은 씩 웃었다. 그는 코끼리가 아니었다. 줄이라면 진즉에 풀고 줄을 묶은 자의 목을 노리는 사나운 맹수였다. 하지만 자신의 탄탄한 몸에 넋을 잃고 있는 할아버지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본능에 휘둘리는 노쇠한 짐승. 그것이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절로 치가 떨린다. 하지만 그는 눈썹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집안의 씨를 말려버리고자 진행했던 복수는 우그러졌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직접적인 복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자. 그 정도 먹었으면 이만 들어가도 되지 않겠니?”

“서두르지 마세요. 할아버지. 아직 달이 기울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렇게 말씀하실 것 없잖아요.”

“허허. 오랜만에 손주를 보니 내가 너무 반가워서 그런다. 밥이야 저녁이건 밤이건 또 해서 올리면 되는 것이고. 오랜만에 왔는데 이 적적한 할아비와 좀 놀아주렴.”

“......하는 수 없네. 알겠어요.”

“그, 그게 정말이냐?”

“예. 먼저 들어가 계세요. 할아버지 방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 그래! 알았다. 얼른 따라 오너라!”

“예.”


그 자리에 있던 집사와 하녀들이 전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렸을 적, 자신이 울며 매달렸을 때도 외면했었던 놈들. 숨겨주기는커녕 제 목숨이 날아갈까 두려워 덜덜 떨고 있던 년들. 라슈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한 점 더 베어 물었다. 완벽하다. 오늘 밤을 축복하기엔 더없이 달콤한 육즙이 입가에 새어 나온다. 그는 목에 건 냅킨으로 차분히 입가를 정돈한 후에 손짓을 해 집사를 불렀다. 집사가 얼른 그의 옆으로 다가온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가서 최고급 와인을 가져와. 할아버지가 아끼시는 와인이라도 상관없다.”

“예? 하지만 그건 주인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뭐. 오늘 밤이 지나고 목이 달아나도 날 원망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가, 가져 오겠습니다!”

“그래. 적어도 30분 안엔 할아버지의 방 안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해. 기억해라. 30분이다.”

“예! 도련님!”


라슈벨은 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춤에 찬 화려한 문양의 검이 가볍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본래 룩소르의 방에 들어갈 땐 모든 무장은 해제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하녀와 집사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오늘의 도련님은 그전과는 다르다. 체격도 자신들의 옷자락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말할 때와는 현격하게 달라졌다. 이젠 그들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라슈벨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으며 자리를 피하자, 하녀들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50대의 하녀장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각오를 해두는 게 좋을지도 몰라.”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들 각자 마음의 준비들을 해두게. 입학하고 나서 한 번도 오지 않으셨던 분이야. 그런데 갑자기 학기 중에 내려왔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는 게지. 어쩌면 오늘이......”


노파의 눈이 아련하게 허공을 쫓았다.


“모두가 그 죄 값을 치르는 날일지도 모르겠구먼.”


하녀장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떨어트렸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같은 결론들을 떠올리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막을 수 없다. 그들에겐 더 이상 떠날 수 있는 공간도, 숨을 수 있는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들 막막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릴 뿐이었다.


***


라슈벨은 천천히 룩소르가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매 번 그의 눈에 역겹게 들어왔던 가구들이 그대로 놓여있다. 어쩌면 위치하나 바뀌지 않았을까. 그림들은 전부 바뀌어 있었지만, 놓여있던 자리는 똑같았다.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들었다.


“라슈벨, 왔느냐.”

“네. 할아버님.”

“어서 침대로 오너라.”

“할아버님. 제가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음? 이곳에 와서 해도 될 것 같은데.”

“아니요. 너무 궁금한 거라 여기서 물어볼게요.”

“그래. 말해봐.”

“왜 그러셨어요?”


라슈벨은 품에 넣어둔 단검까지 꺼내 놓으며 담담히 물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가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차라리 하인이었다면, 하녀를 건드렸다면, 이라는 마음도 있었다. 대체 왜 핏줄이 이어진 자신을 건드린 건지 그동안 계속해서 궁금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룩소르의 걸쭉한 목소리가 침대 너머에서 들려왔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라슈벨. 넌 내게 없는 모든 걸 가졌어. 그게 부럽기도 했고, 사랑스럽기도 했지.”

“제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요?”

“후후.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이냐. 돈이 필요한 게야? 안 그래도 아범이 요즘 힘들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필요하다면 내가......”

“아. 죽이기 전에 물어봐야지, 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 동안 마음속에선 수십, 수천 번이고 갈가리 찢어 죽였는데, 실제론 그게 안 되잖아요.”

“뭐, 뭐야!”


깜짝 놀란 룩소르가 나체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라슈벨은 그의 몸을 해체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깜짝 놀란 룩소르가 허둥지둥하며 머리맡에 걸린 검을 뽑아 들었지만, 장식용 검은 라슈벨이 휘두른 검 한방에 반으로 조각나 버렸다. 기세에 눌린 룩소르는 침대에 엉덩방아를 찧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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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7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1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799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39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49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2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2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3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5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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