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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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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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61

작성
14.04.2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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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글자
7쪽

죽음(10)

DUMMY

그 날도 어김없이 아버지는 벨의 방을 찾았다. 가만히 방 안에 앉아있던 벨은 예전과는 다르게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침부터 뭔가 좋지 않다. 몸엔 계속 오한이 들고, 형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는 게 너무나 불안했다. 오늘만은 제발 무사히 넘어가기를. 내일부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맞아줄 테니까,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가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벨을 옆으로 밀었다.


“하, 하하. 왜? 그렇게 맞으니까 이젠 좀 빌고 싶어지기라도 한 거냐?”

“아버지. 아버지. 제발 오늘만은......”

“진즉에 그랬어야지. 그 동안은 뚱한 표정으로 때리든, 말든 반응도 안 하던 놈이 이제 와서 뭐? 제발 오늘만은? 하하하하.”


실패했다. 그는 오히려 더 신나 보였다. 그제야 벨은 차라리 참고 맞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얼마 더 때리지 않고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것도 그에게 굽힌 반응을 보여준 벨의 모습에 공작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그의 주먹은 어느새 꽉 말아 쥐어져 있었다. 벨은 예견된 참사가 오는 것 같은 불안감에 그저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


마차 안에서 라슈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섭도록 무덤덤한 표정으로 새하얗게 빛나는 검만 닦고 있었다. 어느 자식이 아버지의 목을 직접 베러 가는 길에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그의 옆에 앉은 심복은 절로 전신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이 가문은 전부 미쳐있어.’


심복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들의 임금이 높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간 대를 걸쳐 내려오며 수차례 벌어졌던 아버지와 아들, 딸의 전쟁. 그리고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보냈던 자객들과 암살시도. 이 가문은 밖에서 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인데다가, 사람들의 부러움을 잔뜩 사고 있었지만 조금만 안을 들여다보면 생지옥이었다. 때문에 지옥의 악마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자들이라는 말까지 떠돌았다. 심복은 비록 그렇게까지 허무맹랑한 일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제국에서 지옥에 가장 가까운 가문이라는 것엔 누구보다도 깊게 동의했다.


“도착은 언제지?”

“앞으로 한 시간 후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저택 주변을 봉쇄해. 행여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주민이 있다면 전부 안으로 끌어 들여 죽여라.”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그 말을 끝으로 라슈벨은 더 할 말이 없어 보였고, 마차도 이대로 침묵 속에 길을 달리는 듯 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심복에겐 어떻게 해서든 꼭 물어봐야 하는 말이 있었다. 바로 막내인 벨의 존재. 분명 그가 뒤집어쓸 일에 대해 라슈벨은 진한 웃음으로 답했다. 단지 그 뿐.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건 무엇을 뜻하는 건가. 행여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비참한 운명의 선을 이제 자신의 동생에게 완전히 넘기겠다는 건가. 오랜 세월 라슈벨의 옆을 지켜온 그에겐 이 일에 대해 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굳은 결심을 다진 심복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도련님.”

“말해라.”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다. 라슈벨은 방금 전 사람을 죽였다. 침착해 보이지만 흥분 상태란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그것도 같은 귀족이 아닌 심복 따위가 이미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다시 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복에겐 그 귀여운 아이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갇혀 사라지지를 않았다. 어쩌면 이게 라슈벨을 지키지 못했던 그의 죄악감이 다른 쪽으로 표출된 것일지도 몰랐다. 심복은 결국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벨 도련님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방금 전에도 했던 질문이구나.”

“......죄송합니다.”

“내가 살려두면 그 아이는 우리 가문의 모든 걸 떠안고 추락할 테고, 내가 죽이면 벨은 편해지겠지만 그 주변을 감싼 사람들이 불편해지겠지.”

“아무리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르는 벨 도련님을 죽이는 것은......”

“후후.”


역시 라슈벨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죽일 것인가, 아니면 살려줄 것인가. 지금 그에게 있어선 그런 건 부차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있어야 할 것은 마치 짐승처럼 벨을 패고 있어야 하는 아버지의 존재. 할아버지 다음에 죽여야 할 사람의 문제가 지금 라슈벨에겐 제일 중요했다. 벨의 일이야 어떻게 되던지. 어차피 검을 목에 꽂아 넣어 죽이든, 살아남든 보통 인생은 아닐 것이니까.


그렇게 침묵 속에 잠기고 나서 심복은 더 이상 라슈벨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말에 뼈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질문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그 말을 안 그래도 위험한 가문 속에 살고 있는 그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아직 죽일지, 말지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걸로 안심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마차를 달렸을까.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스쳐 지나가자, 라슈벨은 검을 뽑아든 채로 마차가 서기만을 기다렸다.


“도착했습니다.”

“나간다. 말한 대로 이행해라.”

“예.”


심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으로 나간다. 무겁게 닫힌 저택 문을 제 손으로 열어젖히자, 안에 갇혀 있던 새카만 기운들이 라슈벨의 전신을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죽었다. 대체 제국 어디에 이런 사람들이 또 있을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실망과 두려움이 검을 든 라슈벨을 가득 채웠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수풀 사이에 깔린 돌을 밟을 때마다 소리가 났지만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이 때쯤이면 공작이 벨을 때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비겁한 도망자 놈들.”


입술을 비집고 성난 목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저택 안은 조용했다. 정문을 발로 쾅 차고 들어가자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노 집사가 그를 보곤 숨을 집어 삼켰다. 라슈벨은 집사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들고 있던 검으로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사방에 뿌려지는 짙은 빛깔의 피.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집사로서는 대처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검을 한 차례 휘둘러 바닥에 피를 뿌린 라슈벨이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동생의 방은 2층. 그리고 방에 가까워질수록 그가 바라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아버지.”


낮게 읊조린 라슈벨이 문을 열어 젖혔을 때, 마침 두꺼운 채찍을 들고 있던 공작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작가의말

프리미엄이나 미리보기로 돌리고 매일 연재 할까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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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1 25 12쪽
» 죽음(10) 14.04.23 1,438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2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21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30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2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9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2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1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90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3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9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5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1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8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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