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107,749
추천수 :
2,264
글자수 :
123,061

작성
14.04.25 04:00
조회
1,380
추천
25
글자
12쪽

죽음(챕터 完)

DUMMY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잠깐의 정적. 그것은 누구도 섣불리 깨기 힘들 정도로 날 선 기운이 감도는 것. 이제부턴 손 한 번, 발 한 번 잘못 놀려도 모두가 죽는다. 누굴 죽였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선 라슈벨도,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공작도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자들이 주위에 있을 땐 언제 죽을지 모른다.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긴장감이 어린 벨의 전신을 휘감았다.


‘여기서 또 죽을 순 없다. 그놈의 뜻대로 되게 하지 않아.’


어떻게 여기까지 만들어 놨는데, 다시 죽어서 처음부터 시작할 수는 없었다. 눈치를 보던 벨이 슬금슬금 방 안쪽으로 들어갔지만, 누구도 그를 붙잡거나 끌어안아 방패로 쓸 생각을 하진 않았다. 다행히 두 사람의 관심사는 일단 벨에게서 벗어나 있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공작의 눈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는 자신의 아들, 라슈벨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채찍을 바짝 잡아들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라슈벨.”

“아버지야말로 뭘 하고 계신 거죠? 설마 그 두꺼운 채찍으로 벨을 내려치기라도 하신 건가요?”

“아, 아니에요! 형님! 아버지는 그저 훈계를......!”

“조용히 해. 벨. 너한테는 묻지 않았어.”


라슈벨의 말이 방을 낮게 울린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내뱉은 가벼운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살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절로 오한이 든 벨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다고는 하나, 몸은 영락없는 7살 아이의 몸이다. 형이 무의식중에 내뿜은 살기를 받아칠 정도의 기력은 아직 없었다. 몸을 사리지 않으면 죽는다. 벨이 어물쩍거리며 얼른 뒤로 물러서자, 그를 흘끗 바라보던 공작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네 동생도 내 아들이요, 너도 내 아들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바로잡아야지.”

“이제 겨우 일곱 살 아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한 겁니까. 행여 잘못을 했다고 한들 그게 채찍으로 맞을 만한 짓인지, 아무래도 내일 당장 폐하께 여쭤봐야 될 것 같군요.”

“지나친 참견이야. 라슈벨.”


공작의 입에선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그의 아들은 더욱 집요하게 굴었다. 평소에는 자신이 벨을 데리고 뭔 짓을 하던 관심도 없던 아이가, 마치 그건 당연히 잘못된 일이라는 것처럼 자신을 타박하고 있다. 제국의 위대한 공작 가문의 수장인 자신에게 말이다. 때문에 점점 그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입술 근육을 미묘하게 떨며 아들에게 말했다.


“라슈벨. 낄 데와 안 낄 데를 구분할 줄 알아야지. 지금 고작 벨이 내게 훈육을 받는 일 하나 때문에 수업을 듣다가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이냐?”

“저도 귀가 있고 눈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동안 벨에게 어떤 행동을 보여 왔는지 이미 다 듣고 왔다는 얘기입니다. 애가 피투성이인데 지금 저걸 훈육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가 계속 기숙사에만 있더니 아무래도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전부 잊은 모양이구나. 아버지의 저택에 며칠 가 있는 게 좋겠어.”


자신 있게 말하는 그 모습이 한없이 가소롭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할아버지의 사병들은 이미 그의 소유에 들어와 있다. 철이 들고 나서 라슈벨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이 가문의 사병들에게 누가 더 힘이 있고, 강성한지를 알려주고 포섭하는 일이었음을 그의 아버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저택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하녀와 하인들이 떼죽음을 당해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타들어가는 저택 주변을 지키면서 서둘러 화재를 진압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라슈벨은 당장에라도 이 사실을 의기양양한 아버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씩 웃으며 아버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죽었어.”

“......뭐?”

“내가 죽였어. 아버지. 다리와 팔에 전부 검 하나씩을 꽂아서, 우선 그 가증스러운 혀부터 잡아 뽑았지. 그 다음엔 날 욕보였던 더러운 부위를 도려내고, 죄를 물었어. 그 자가 내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빌던 모습을 당신도 봤어야 하는데.”

“하, 하하. 하하하하하.”


순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공작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참을 웃는 그를 라슈벨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혀를 뽑거나, 부위를 도려냈다는 말까지 지어낸 것은 아버지의 붕괴를 빨리 부르기 위함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으면, 정당방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참을 더 큭큭거리던 공작이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엔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들이 잔뜩 뭉쳐 있었다. 그는 채찍을 손에 든 채로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버지를 베었으니 이번엔 내 목이라도 벨 참이냐? 응?”

“이 자리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비세요. 어차피 주범은 할아버지였고, 그 자를 처단했으니 당신에게까지 죄를 물을 건 없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신다면 저도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고......”

“라슈벨!!”


순간 공작은 더 참지 못하고 손에 든 승마용 채찍을 휘둘렀다. 과거 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제국에서 찬사를 받던 공작답게 채찍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날카롭게 라슈벨의 목을 노렸다. 워낙에 기습적인 공격이라 벨조차도 위험할거라 생각했지만, 라슈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채찍을 받아 내었다. 순간 채찍과 검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고,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공작의 이마엔 힘줄이 불끈 솟아 올랐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경우도 있더냐! 제 손으로 할아버지의 사지를 찢고 돌아오는 일도 있더냐! 그리고도 모자라 아버지까지 죽이러 온 악마! 이 악마의 자식! 넌 제국의 역사에서 둘도 없는 악마로 기록될 것이다!”

“어린 아들을 사지에 보낸 아버지나, 손자에게 자신의 더러운 성욕을 채웠던 할아버지는 그럼 대체 지옥의 어디까지 내려가야 한답니까?”

“시끄러! 넌 자식이고 난 아버지다. 그 사실만큼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라고 해서 아들들의 인생을 마음대로 주물러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어째서? 너희들이 입은 좋은 옷, 좋은 환경, 좋은 음식들은 전부 우리 조상들이 이뤄낸 것이다. 평민 가문에 태어났으면 밥조차 빌어먹고 살았어야 할 놈들의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었는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어디가 문제라는 말이냐!”

“아무래도 갈 때가 다 되신 모양이군요.”

“으윽!”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튀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검을 잘 쓰는 검사의 이름도 이젠 전부 오랜 과거의 일. 몇 년 간을 제대로 운동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던 공작에겐 과거의 실력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라슈벨은 무기가 없어진 공작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빨갛게 변한 공작의 눈이 자신을 향한다. 짙은 체념과 경멸, 그리고 두려움. 공작이 쓰러진 나무 바닥이 젖어드는 걸 보면서 라슈벨은 순간 모든 것이 정말 허무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복수를 다짐하고 거창하게 준비를 했는데 이제 보니 언제든 쉽게 이룰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줄에 묶인 사냥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사냥개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보통 제국 내 사냥터에서 살고 있는 사냥감들은 사람들이 잡기엔 버거운 놈들이 대부분이다. 거대한 짐승을 사냥하는 걸 영광으로 여기는 제국에선 거대한 덩치와 날카로운 이빨, 갑옷을 입은 기사의 근력의 2배에 달할 정도로 강한 앞발을 가진 ‘망’이나 날렵한 대신 아무리 높은 나무라도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가 거꾸로 사냥하러 온 사람을 사냥하는 ‘레시간’이 대표적이다. 이렇다보니 제국의 귀족들은 전부 사냥개를 기르는데, 아무래도 저런 짐승들을 잡아야 하다 보니 사냥개들의 덩치도 그들에 못지않게 크다.


‘새끼 때부터 묶어 놓아라. 그럼 처음엔 발악을 해서 풀려고 하지만, 결국 풀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되지. 멍청하게도 나중엔 제 스스로 줄을 끊을 수 있지만, 어렸을 때 해내지 못한 일은 지금도 안 된다 여겨 포기하게 된다. 그게 사냥개의 습성이다.’


라슈벨은 눈을 감고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땐 참 가슴이 두근거렸지. 사냥을 간다고 했을 땐 별 다른 감흥도 없었는데, 사냥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은 절대 그런 사냥개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에 또 다짐을 했었다.


“저리가! 저, 저리가!”


이를 악문 공작이 뒤에 놓아둔 화병이나 그림, 불쏘시게 등을 들고 거세게 저항했지만, 전부 라슈벨의 검에 막히고 말았다. 라슈벨은 검을 들어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공작의 몸이 발발 떨리는 것이 느껴지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씩 웃고 말았다.


“아버지.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먼저 가 계세요.”

“이러면 안 된다! 라슈벨! 네가 이래선......!”

“으아악!!”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한 저택 안에 공작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하인과 하녀들이 잠들어 있는 방에선 아무런 불빛도 들어오지 않았고,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오는 자도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큰 도련님이 어린 날의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고, 지금 막 그 복수를 완료했다는 것을. 이런 상황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바짝 걸어 잠근 문고리만 붙잡은 채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제발 그가 자신들을 찾아 죽이지 않길 바라면서.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라슈벨은 그리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바닥에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뿌리고 나서, 그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는 벨을 바라보았다. 상황에 맞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벨.”

“......”

“벨!”

“네? 네!”

“나가자.”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손. 이건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죽인다는 걸까, 아니면 살려준다는 걸까.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의 검에 직접 죽는 모습을 지켜본 벨로서는 도무지 지금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 벨은 일단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라슈벨. 벨. 방금 비명 소리가......!”


마침 방 밖에 서 있던 공작부인은 라슈벨의 검에 묻어있는 피를 보고선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그녀를 살게 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짓던 라슈벨은 그녀에게 허리를 숙인 후 말했다.


“당분간은 외할아버지께 가 계세요.”

“뭐? 그, 그럼 이집은?”

“여긴 벨 혼자서 살게 될 겁니다. 물론 하녀와 하인들은 그 자리에 있을 거고, 궁중에서 따로 교사들을 파견해 벨을 가르치겠어요. 그러니 걱정 말고 가 계세요.”

“......알았어.”


그녀는 라슈벨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것은 벨에게 있어선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머니가 자신과 누이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두 사람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 믿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 벨은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고 말았다. 그의 표정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아이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회귀자]Regression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1 14.04.24 1,059 0 -
»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1 25 12쪽
33 죽음(10) 14.04.23 1,435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30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1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9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2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5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7 137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