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은다리의 천덕꾸러기 1
[무쌍]은 성장 소설입니다. 시대상과 현실을 접목한 소설입니다. 느긋이 감상해 주십시요.
프롤로그
1MOA는 100야드 거리에서 25mm원 안에 탄착군을 형성 할 수있는 정밀도를 말한다. 4MOA의 파무스는 100야드 거리에서 120mm원안에 착탄 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안정적인 조건하에서다.
꼬레앙 팍은 4MOA 정밀도의 파무스로 도트사이트나 스코프를 사용하지 않고 300m밖의 100mm원안에 탄착군을 형성시켰다. 팍이 소총 자체의 기계적 정밀도를 아득히 초월했다는 의미다. 삐에프 대위의 입이 찢어졌다. -본문 중에서-
여자는 남자가 변하기를 바라고, 남자는 여자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산다 카더라. 그리고 여자는 변하지 않는 남자에게 실망하고, 남자는 변해 버린 여자를 증오한다고 하더군. 사랑을 모르는 멍청이가 지껄이는 개 풀 뜯는 소리지.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난 당신의 본질을 느낄 수 있어. 당신은 전혀 변한 게 없어. 그저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라구. 우리는 여전히 조금은 어설프고, 부족한 사랑을 하는 연인이지. 당신은 지금 내 곁에 있어도 여전히 그립고 안타까운 사람이야. 당신이 내게 미안한 어떤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하는 일이야. 기억은 말로 뱉는 순간에 굳어져 버려. 당신이 소가 되고 말이 되면 나도 소가 되고 말이 되면 돼. 당신과 내가 서로 고백하고 면죄부를 주는 타락한 중세 카톨릭 주교와 신도는 아니잖아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부족해.
-본문 중에서-
한마디로 곰텡이가 삽질하는 거죠. 트로이드를 이용한 토카막은 점화 온도를 잡지 못하고, 손실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짝퉁 초전도체 때문이죠. 곰텡이와 개구리가 토카막을 백년쯤 주무르면 성과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핵융합로의 해법은 1억 도가 넘는 플라즈마를 담을 차가운 그릇과 효율적인 내벽입니다. 그 외에는 해결 가능한 지엽적인 문제들입니다. 이제 내벽인 트리덴템이 준비되었습니다. 블랙맘바가 탈취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온초전도체만 입수하면 진정한 팍스아메리카나가 몇 세기를 지속할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제1장 짚은다리
지축을 울리던 포성과 밤하늘을 밝히던 섬광이 그친지도 이년이 흘렀다. 원한과 증오의 찌꺼기는 태워 먹은 냄비 바닥처럼 까맣게 남았다.
적어도 죽음의 공포와 생존의 위협은 사라졌다. 포성에 쫓겨 남쪽 피난살이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을 찾았다.
몇 년의 타향살이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짚은다리 사람들도 한명 두 명 고향을 찾아 들었다.
쌍팔 년도라 불리는 1955년 섣달, 박진보도 고향인 짚은다리로 찾아 들었다. 자갈치 시장에서 지게질로 식구들과 연명한 세월이 삼년이었다.
홑저고리 입성에 푸석한 얼굴은 피난살이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사고무친한 객지다.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님과 여린 아내를 부양하는 일이 만만할 리 없었다.
짚은다리는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로 손꼽히는 다부동과 채 십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짚은다리에서 야산 몇 개만 넘으면 다부동이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짚은다리의 전쟁 상흔도 만만치 않았다.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불타 버린 집은 대여섯 가구에 불과했지만, 대부분의 집이 폭격의 진동과 총격으로 벽이 무너지거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힘든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짚은다리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은 힙을 합쳐 부서진 집들은 고치고 무너진 집은 새로 지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터전에서 질긴 삶이 이어졌다.
물동이만 한 크기의 항공 폭탄으로 뒤집힌 논바닥과 논두렁도 제 모습을 찾았다. 월송산 포리 계곡 안쪽의 무너진 저수지 둑도 제 모습을 찾았다.
그 와중에 빨갱이로 낙인찍힌 박인보를 도와주려는 동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인보가 조인수에게 적극 부역자의 혐의를 씌웠다는 사실이 알려진 탓이었다.
박인보는 동생인 박진보가 돌아오고 나서야 집을 개축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성이던 타성이던 성실하고 예의바른 박진보를 좋아했다.
형과 달리 훤한 인물도 호감을 주었다. 집을 수리하고 개축한 두 형제는 전쟁 전처럼 부모를 모시고 한집에 살았다. 긴 이야기는 두 형제가 한 지붕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시작된다.
짚은다리는 어설픈 밀양 박 씨 집성촌이다.
어설픈 이란 형용사가 붙게 된 것은 마을 가구 구성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 마을에서 밀양 박 씨가 유출되고, 빈자리를 타성바지가 채웠다. 종내 박 씨 성은 30호 남짓한 마을 가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여전히 박 씨 촌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짚은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박 씨가 유출된 이유는 해방 후 격화된 빨갱이 시비 때문이었다. 짚은다리도 좌우익의 사상 갈등의 깊은 골을 비켜 가지 못했다.
밀양 박 씨는 나름 뼈대 있는 양반이다. 어설픈 사상에 물든 몇몇 친족의 막장 행태가 마을을 찢어 놓았다. 그 중심에 박진보의 형인 박인보가 있었다.
갈등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폭행을 불렀다. 일가붙이 간에 고소와 고발이 빗발쳤다. 할아비 항렬을 각목으로 폭행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진절머리를 낸 일가들이 척박하고 협소한 농토를 버리고 하나 둘 외지로 떠나 버렸다. 박 씨들이 떠난 자리는 좀 더 억센 외지인들이 차지했다.
낙동강 방어 전투로 포탄이 마을에 떨어질 즈음, 삼십여 가호 중에 남은 박 씨는 겨우 열 가구 남짓했다. 그럼에도 짚은다리는 여전히 박 씨 촌으로 불렸다.
육이오 동란 와중에 짚은다리 사람들은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고 두 가구가 남았다. 한 집은 피난을 가지 않았고, 한 집은 피난을 가지 못했다.
피난을 가지 않은 집은 청년 동맹에 가입해 좌익 활동을 하던 박인보였다. 피난 가지 못한 사람은 타성바지인 조인수였다.
박인보는 피난을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해방군인 인민군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박인보의 처가는 만석지기다. 그가 좌익 활동을 한 이면엔 처가에 대한 뿌리 깊은 열패감과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르주아 계급에 가깝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소위 얼치기 부화뇌동 부역꾼인 셈이다.
조인수는 마을 뒷산에서 땔나무를 하던 중에 멧돼지에게 받쳤다. 허리를 크게 다친 그는 가족을 따라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
다부동ᐨ왜관ᐨ팔공산을 잇는 방어 축선은 낙동강 방어선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곳에서 북한군과 대치한 병력은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 사단이었다. 밀고 밀리는 지루한 전투가 두 달간이나 지속되었다.
전차가 증강된 북한군 5개 사단이 방어 축선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으나 연합군은 악착같이 버텨냈다. 왜관을 기점으로 남동쪽은 연합군, 북서쪽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였다.
짚은다리는 전투 기간 내내 북한군과 국군이 밀고 당기는 전투 나들목이 되었다. 북한군이 낙동강 축선에서 패퇴하기 전까지 주로 북한군에게 점거되어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과 더불어 짚은다리는 온전히 한국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마을은 직접적인 포격을 덮어쓰지 않았지만 전쟁의 상흔을 비켜 가지 못했다.
마을에 남은 것은 궤도가 이탈된 전차, 벌집 같은 폭탄 웅덩이와 부서진 차량, 바퀴 빠진 야포, 흩뿌려진 파편, 탄피 무더기뿐이었다.
마을에 남은 박인보와 조인수는 인민군에 부역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청년 동맹 활동이 드러난 박인보는 중형이 불가피한 상태였다.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눈치 빠른 박인보가 상답 스무 마지기를 사찰 기관 책임자에게 찔러 넣었기 때문이다. 중형이 불가피했던 박인보는 강제 부역자로 풀려나고, 강제 부역자인 조인수가 빨갱이 활동자로 분류되었다. 전후 행정이 혼란한 당시로선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박인보의 좌익 활동을 증언했던 조인수는 노역 형을 선고 받고 대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박인보와 조인수는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임에도 원수가 되었다. 당사자로서는 땅을 칠 일이지만 한국전쟁후 흔히 벌어졌던 현상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짚은다리는 척박한 땅이지만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로 풍광이 나쁘지 않았다. 마을 뒤쪽을 월송산과 이름 없는 야산이 반월형으로 둘러싸고, 앞쪽은 폭이 삼십 미터 남짓한 낙동강 샛강이 흘렀다.
야산과 샛강 사이에 뱀처럼 가느다랗게 퇴적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년 계속된 낙동강 범람이 만든 충적 대지다.
월송산 가리를 따라 형성된 논밭과 좁은 충적 들판이 짚은다리를 비롯한 인근 네 개 마을의 연명 줄이다.
짚은다리 사람이 농사를 지어먹는 들판은 폭이 평균 100미터에 불과했다. 들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충적지는 낙동강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수답에 가까웠다.
양수기를 장만하지 못할 정도로 살기 팍팍한 마을이 짚은다리다. 마을 공동으로 양수기를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골이 깊어진 마을이 짚은다리다.
빨갱이 시비로 뿌리박힌 친족 간 이웃 간의 증오는 시간이 흘러도 희석되지 않았다. 양수기를 구해서 논에 물을 대면 야밤에 양수기를 박살낼 이웃이 수두룩한 곳이 짚은다리였다.
그렇게 강 언덕 아래 지천인 강물을 멀거니 쳐다보며 한숨만 쉬는 동네가 짚은다리였다. 가뭄만이 아니다. 매년 범람하는 낙동강으로 인해 마음 편할 날이 없는 동네가 짚은다리다.
짚은다리 앞을 낙동강 샛강이 거대한 아나콘다처럼 구불구불 휘어져 흘러간다. 강을 따라 상곡마, 중곡마, 짚은다리, 하곡마가 긴 띠처럼 자연부락을 형성했다.
성의 없이 붙여진 마을 이름만큼이나 고단한 농투산이들이 살아가는 마을들이다.
짚은다리 사람은 월송산 산줄기와 낙동강 사이에 끼인 코딱지만 한 농토를 파먹고 살았다. 천정천인 낙동강이 매년 범람하다 보니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들었다. 코딱지 농지나마 제대로 소출을 얻기가 가뭄에 콩나듯 했다.
댓글과 추천이 고픕니다아!! 바쁘시더라도 발도장 꽝 찍어 줍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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