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1장(7)
“전혀 다른 사람이라니요?”
“그건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기회가 있을 테니까요.”
태연하게 말하는 윌리엄을 보며 엔젤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
“정말 아무것도 하시지 않겠다는 거군요.”
“예. 그 이야기는 아까 끝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윌리엄이 손을 들어 엔젤의 말을 저지했다.
“다시 총장대리로 돌아가신 것 같으니 확실히 제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때 왕실기사였으나 지금은 라이라프의 영주님을 모시는 기사입니다. 왕실 직영지의 일이고 왕실 기사들의 내부문제이기도 하니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최악의 경우 형으로서 동생의 목숨은 살리겠지만 그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후우~.”
엔젤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빠들 중 누군가 길리안과 같은 일을 했다면 집안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대 귀족이라는 백작가문이고 대대로 시종장을 지내온 가문인데도 그렇다. 다른 귀족 가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손을 쓰고 다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 아니 그래야 하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이 평민 출신의 형제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시 부탁드리지만 슈발리에 아카데미 차원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혹여 출신기사들을 움직여 뭔가 하실 생각이라면 절대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오히려 구설수에 오를 일이고 길리안의 뜻이 퇴색될 것입니다.”
“하아~.”
그건 엔젤도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윌리엄을 제일 먼저 만나러 온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아버지께 청해도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고, 기사들을 움직인다면 윌리엄이 더 적합했으니까.
“부인께서는 이미 손을 쓰고 계실 텐데요?”
이베트를 말함이다.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기사들을 움직이시지는 않을 겁니다. 현명한분이시니까요. 아 다른 뜻은 없습니다.”
자신을 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엔젤은 미소로 답했다.
“기사들의 피가 끓어오르면 스스로 움직일 것이고, 왕께서 백성들을 돌아보신다면 순리대로 풀릴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길리안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저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개까지 숙이는 윌리엄을 보며 엔젤은 한숨을 내쉬었다.
“길리안 경이 왕실 기사가 되고 기뻐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큰 의미가 있어보였습니다. 그 길을 더 이상 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엔젤의 말에 윌리엄이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큰 의미라 하셨습니까? 사람들은 모릅니다. 길리안이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기사의 길을 가려 하는지. 녀석이 지금 무엇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러는지. 보장된 앞날이나 부나 명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은 모릅니다.”
윌리엄의 말에 끝나고 한동안 방안엔 침묵이 감돌았다.
“저 또한 길리안 경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궁금하군요. 괜찮으시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엔젤의 말에 윌리엄은 아무대답 없이 한동안 창밖만 쳐다보았다.
그러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길리안을 아껴주시는 분들이니 말씀드리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약조해주셔야 합니다.”
“여자라 해서 입이 가볍지는 않습니다. 안 그런가요? 레이디들?”
엔젤의 말에 라데카와 에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길리안에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녀석의 입을 통해선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얘기니까요.”
다시 한 번 약조를 받듯 세 명의 눈을 한번 씩 쳐다본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프란트가 주고 간 것을 다 읽은 왕이 고개를 돌렸다.
“이보게들 뭐라 말 좀 해보시게.”
그곳에는 넘버즈 No.1 드겔과 시종장 마르콘 백작이 앉아 있었다.
드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폈다.
“크흠.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왕의 일은 왕께서 알아서 하시게.”
“허허.”
비슷한 연배에 대귀족인 둘과 친구로 지낸지가 수십 년.
그때는 자신도 왕이 아니었고, 드겔도 넘버즈가 아니었고, 마르콘도 시종장이 아니었다.
공식석상이나 다른 이들이 있을 때는 왕과 신하의 관계였지만 사석에서는 편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 둘이 있어 왕관의 무게를 버티고 왕좌를 지켜 올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둘은 좋은 친구였고 신하였고 조언자였다.
그만큼 저 둘을 믿고 신뢰했다.
“요즘 여러 일이 발생하고 나서부터 내가 잘못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네.”
왕의 말에 체스 판을 테이블에 올려놓던 드겔이 피식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는가?”
“허허. 마르콘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
그 말에 체스 말을 놓던 마르콘이 웃으며 말했다.
“말해 무엇 하겠는가. 어차피 듣고 싶은 말만 듣지 않는가? 우리 조언만 귀담아 들어줬어도, 아니 왕비의 말만 귀담아 들었어도 지금쯤 성군소리 듣고 있을 걸세.”
그 말에 드겔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 조언만 잘 들었어도 제국은 못돼도 대륙 4강의 이름은 바뀌었을 걸?”
“허허. 내가 자네들의 조언을 그리 안 들었는가?”
그 말에 드겔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왕자가 한 말 중에 내가 계속 한 말이 있지 않는가? 기강을 바로 세우라고.”
“법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을 살피라는 말은 내가 하던 말이지. 에런 자네는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도 모자라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군.”
에런은 지금은 미들네임으로 쓰는 국왕의 왕자시절 이름이었다.
“많은 피를 봐야 할 일이네. 쉬운 일도 아니고.”
그 말에 드겔이 혀를 찼다.
“쯧쯧. 적은 피로 본보기만 보여 끝내도 될 일을 하지 않으니 이제는 피가 강을 이룰 정도가 된 것이네. 이친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네. 우린 신하고 왕은 자네야. 어찌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왕의 자리를 지키려 하는가?”
“음···.”
“숙청을 하든, 전쟁을 하든 하려거든 빨리하게나. 나도 이제 늙었어. 요즘엔 검을 휘두르면 삭신이 쑤신다네. 아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네만 이제 젊은 아이들 좀 데리고 다니게. 자넨 왕이라고 앉아있지만 난 기사라 서있어야 하거든.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늙은 기사 배려 좀 해주시게.”
“허허.”
“내가 자네 앞에서 부러트린 검이 열 자루가 넘는 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놀라자빠지겠군.”
드겔의 말에 마르콘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가 부러트린 검이 다 왕실재정에서 나간다는걸 명심하게. 그 비싼 검을 뻑 하면 똑똑 부러트리니 원.”
“안 그러면 어디 말을 들어줘야 말이지.”
드겔의 말에 마르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기사는 편한 걸세. 나도 기사 작위는 있지만 시종장이라 검 부러트리는 걸로 사임은 안 되고, 밤새 사임 서한을 써서 줘야 그나마 말을 들어주니 원.”
마르콘의 푸념에 에런 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디 사임서한인가? 협박편지지.”
“안 그러면 어디 말을 들어 줘야 말이지.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면 차라리 조언을 구하질 말던가.”
“크흠.”
헛기침을 한 에런 왕이 체스를 두고 있는 테이블의 빈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런 그를 보고 드겔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프란트 왕자는 잘 큰 것 같군.”
그 말에 에런 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품에서 키운 자식들 보다 타국에서 홀로큰 자식이 더 잘 큰 것 같으니. 허허 이것 참.”
“너무 싸고돌았어. 뭐 자네가 죽은 다음 일은 걱정하지 말게. 그때 되면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지금 당면한 문제만 해도 나라가 위태로워. 다음 대에 물려줄 나라가 없을 수도 있네.”
드겔의 말에 에런 왕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이 그리 뛰어난 왕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노력해서 주변국들과 전쟁을 피하고 외교를 강화했다. 영지 전으로 해결하려는 것을 중재해 평화의 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인구가 늘고 농업과 상업이 발전했지만 모두가 잘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평화의 시대에 홀로 도취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지금은 처음 왕이 됐을 때만큼의 열정도 없었다.
이정도면 됐다 생각하고 그저 유지하려고만 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기강을 바로잡고 법을 세운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었다.
특정가문을 배척할 수도 없고 특정가문에만 힘을 실어 줄 수도 없었다. 고위관직에 누군가를 임명하는 것도 또 잘못을 벌하는 것도 뭔가 하려면 귀족들과 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제는 그런 힘 싸움도 넌더리가 났다.
기사들이나 관리들을 벌하면 사람만 쳐내는 것이 아니라 가문도 쳐내는 것.
그건 자신의 힘이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알면서 모른 척 해준 것도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상황이 이리 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일이면 이번 일로 입에 거품을 물 귀족과 기사들도 많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인상을 찡그린 에런 왕을 보며 드겔이 입을 열었다.
“지금 같은 평화의 시대를 만드는데 자네의 뜻이 가장 컸지만 우리도 같이 협력을 했네. 지금까지 최소한의 피를 보고 여기까지 왔어. 그래도 피를 봐야 하는 일은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라는 걸 알지 않나. 어차피 우리는 늙었어. 다음 대에 좀 더 건강한 나라를 물려주려면 피를 봐도 우리가 보고 정리를 해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음.”
“결단을 내리시게. 난 자네의 검일세. 직접 피를 묻힐 필요는 없네. 피를 묻혀도 내손에 묻힐 테니.”
드겔의 말에 에런 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체스 말을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나이트를 손에 쥔 드겔이 에런 왕을 보며 말했다.
“당장 결단을 내리지 못하겠으면 며칠 고민해보시게. 바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어떤 결정을 하던 난 왕의 뜻을 따를 걸세. 하지만 말일세.”
드겔이 손에 들고 있던 나이트를 에런 왕의 앞에 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그 기사는 그냥 보내주게나. 권위를 세우는데 희생시키기엔 아까우이.”
“난 아직 그를 어찌하겠다 말하지도 않았네.”
“지금도 저울질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세력을 유지하는 게 나은지 그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지를 가지고 말일세.”
“음.”
“기사단을 늘리는 것은 유지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네. 당장 내일 왕실 기사를 모집한다고 하면 전국에서 수백 수천 명이 달려오겠지. 매년 아카데미 기사학부 졸업생만 수백이네. 기사를 모으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드겔이 에런 왕 앞에 놓았던 나이트를 집어 체스판 위에 놓았다.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해주는 기사는 몇 없네. 검을 부러트려 주군을 일깨우려는 기사는 더더욱 없지.”
“그렇지.”
마르콘이 맞장구를 쳤다.
그리곤 에런 왕을 보며 말했다.
“난 궁에서 보내는 시간이 태반이고 드겔도 자네 옆에 붙어있는 시간이 가장 많지. 우리는 저 밑에 있는 백성들의 삶을 모르네. 아니 자네들은 몰라도 난 솔직히 모르네. 그리도 나또한 귀족이네.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 그런가보다 할 뿐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에런 자네가 길리안에게 한 말을 기억하는가? 아마 근위기사들과 겨뤘던 날이었지.”
“그때 대화를 한 것은 기억하네.”
“그랬지. 그때 자네가 길리안에게 그랬네. 평민의 신분이니 보통사람들의 삶을 잘 알 것이고, 수도에서 소작도 주고 있다니 그들의 생활과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지. 그걸 사실대로 말해주면 되는 것이다. 라고 말일세.”
마르콘의 말에 그때 한 말이 기억났다.
“나이가 들어도 기억력은 여전하군. 물론 기억하고 있네.”
“자넨 그때 임무라고 하였네. 자네에겐 수많은 기사들 중 하나일지 몰라도 그에게 왕인 자네는 하나뿐인 주군이네. 예전처럼 여러 주군을 섬기는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그는 그 임무를 기억하고 충실히 수행해서 보고한 것이 아닌가? 저기 저만한 보고가 어디 있는가?”
마르콘이 눈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길리안의 부러진 검이 놓여있었다.
“한입으로 두말하는 왕이 되진 마시게나.”
“허허.”
“그리고 그를 안 쓰려거든 나에게 주게. 딸아이가 무척 탐을 내는 거 같으니.”
“사위라도 삼을 생각인가?”
“그건 생각 좀 해봐야겠군. 어쨌든 드겔의 말처럼 품지 않을 거면 그냥 보내주게나.”
“음.”
“아 그리고 딸아이 말이 나와서 말이네만. 내 딸이 왕자와의 결혼은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네. 그래서 나도 강요는 하지 않을 생각이네. 칼랜베르크의 공주도 와있고 그쪽에서도 동맹을 강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어 보이니···.”
마르콘의 말에 에런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어차피 강요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에런 왕이 깍지를 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왕을 본 드겔이 마르콘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시종장.”
“왜 그러시는가.”
“사람들 시켜 무기고 정리나 좀 해주시게.”
“알겠네.”
둘의 대화를 듣던 에런 왕이 물었다.
“무기고는 갑자기 왜?”
그를 보고 드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검이 두 자루 들어왔지만 내일은 수십 자루가 들어올지 수백자루가 들어올지 어떻게 아는가? 그걸 다 바닥에 굴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허허. 이것 참.”
에런 왕은 눈을 감았다.
수도사건 이후 생각이 많아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또 하나의 고민이 더해져 잠을 제대로 자긴 틀린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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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시종장한테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왕도 미들네임에서 하나 가져왔고요.
길리안 언제 나오냐?
다음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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