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4)
“무슨 일인가?”
“카마엘 백작 가의 기사들이 뭔가를 쫓고 있는 모양입니다. 수를 보면 일부인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를 마중 가는 길에 휘하 기사의 보고를 받은 로렌스가 말을 달렸다.
영주 휘하의 기사들이 쫓고 있다면 그자들일 가능성이 컸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던 로렌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사들이 쫓는 것이 사람이기는 했는데 생각했던 적이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들과 말을 타고 쫓는 기사들.
거리가 멀지만, 얼핏 봐도 무장도 안 된 사람들이 결국 기사들에게 따라잡혀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피를 뿌리며 한 명씩 쓰러져갔다.
“저런 미친!”
옆에서 같이 말을 달리는 부단장 그란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나팔을 불어 이쪽의 출현을 알렸는데도 멈추질 않았다.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사람들이 거의 다 쓰러진 상황.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기사들이 타고 있던 말이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화살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로렌스가 미소를 지었다.
길리안과 그 휘하 기사단이 보였기 때문.
저 먼 거리에서 활을 날린 것은 당연히 길리안이었을 것이다.
먼저 도착한 로렌스와 기사들이 무기를 빼 들고 카마엘 백작 가의 기사들을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인가?”
로렌스의 말에 화려한 갑옷을 입은 이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이게 무슨 짓인가? 왕의 기사들이 공격을 해오다니. 소문이 사실이었는가?”
“당신은?”
“아~ 날 모르는가?”
그러면서 뒤에 있는 백작 가의 깃발을 엄지로 가리키곤 말했다.
“다음 대의 카마엘 백작이 될 레오폴드 폰 카마엘이다. 나는 그쪽을 알고 있지. 넘버즈 로렌스 경이지? 그리고 저쪽에서 오는 자는···. 처음 보는 문양이라 모르겠군. 저 깃발에 새겨진 것은 설마 밀인가? 하하하.”
“아아, 이제 기억났어. 골든 로드의 문제아. 믿는 건 가문뿐인 쓰레기 레오폴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니 투구는 계속 쓰고 있도록.”
“말이 지나치구나.”
“지나친 건 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테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보며 말하는 로렌스를 보고 레오폴드가 피식 웃었다.
“도망친 노예를 처리했을 뿐. 설마 내가 왕의 백성이라도 해하는 줄 알았는가?”
투구를 벗어들고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레오폴드를 보던 로렌스가 손짓하자 휘하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시체를 확인했다.
그때 길리안과 휘하 기사들이 도착했다.
찌푸린 얼굴로 앞으로 나서는 길리안을 보고 로렌스가 말했다.
“길리안 경. 이곳은 나에게 맡겨주지 않겠나?”
길리안이 대답하기 전에 레오폴드가 먼저 말했다.
“아~ 그쪽이 새로 넘버즈가 된 평민 기사인가? 왕가에 인재가 없나 보군. 저런 어린아이를 기사로 쓸 정도라면.”
“레오폴드 닥쳐라.”
“말이 심하구나. 로렌스. 내가 백작 가를 이을 몸이란 것을 자꾸 까먹는 모양이구나.”
“백작이 되면 그때 대우를 해주지.”
길리안을 사이에 두고 레오폴드와 로렌스가 날 선 대화를 주고받을 때 부단장이 노예 같다고 보고를 했다.
길리안과 로렌스가 기사들이 정리한 시체를 봤다.
인두로 지져진 노예의 문양.
“노예사냥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길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레오폴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사냥을 목적으로 노예를 풀어 준 후 사냥을 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분명히 말하지만 난 탈주한 노예를 처리했을 뿐이다. 도망친 노예에게 주어질 형벌은 죽음뿐이니까.”
“탈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그 말에 길리안이 레오폴드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을 훑어보고 말했다.
“카마엘 백작 가의 기사들은 장님뿐인가 봅니다.”
레오폴드 주변의 기사들은 노예를 처리하느라 무기를 뽑아 들고 있던 상태.
그들이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사나운 눈빛으로 길리안을 쳐다봤다.
그때 로렌스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아~.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쓰레기 밑에는 쓰레기 같은 기사들만 모일 테니까.”
“로렌스!”
“내 말이 틀렸나? 노예의 수보다 기사의 수가 많은데 탈주라니. 눈뜬장님만 네 가문의 기사가 될 수 있나 보구나.”
“더는 못 참아 준다.”
“참지 마라. 아까부터 무척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어. 검을 뽑을 용기는 있나?”
사나운 눈빛을 하고 있는 레오폴드를 본 로렌스가 그 주변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 중에 내게 검을 들이댈 자가 있는가?”
그들은 말없이 레오폴드를 쳐다봤다.
“너희에겐 경의 칭호가 아깝다. 물론 레오폴드 너도 마찬가지다.”
“로렌스!”
“너를 보니 얼마 전에 죽은 쓰레기 하나가 생각나는군. 그 녀석도 항상 검을 뽑지 못하고 내 이름만 불러댔지. 둘이 잘 어울렸을 텐데 아쉽구나.”
“크리스 따위와 나를 비교하는 것이냐?”
“그래도 녀석은 제법 실력은 있었어. 그러고 보니 예전에 넌 미네르바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 죽도록 맞았었지? 하하하, 그때가 그립군. 어릴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변하지 않으면 추한 법이지.”
로렌스에게 뭔가 말하려던 레오폴드에게 옆에 있던 기사가 뭔가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레오폴드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곧 네가 한 말을 후회하게 해주마.”
“뒤에 오는 네 아버지를 믿고 하는 말인가 보군. 길리안 경. 경은 베이어드 백작께 볼일이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곳은 나에게 맡겨 주겠는가?”
“음.”
길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은 로렌스가 작게 말했다.
“날 형이라 생각한다면 내 말을 들어다오. 길리안.”
로렌스의 말에 길리안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원 신호를 올려주십시오.”
그 말에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괜한 걱정이군.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겁쟁이에게 검을 뽑을 용기는 없으니까. 왕의 영지에서 왕의 기사에게 그럴 용기는 더욱 없지.”
길리안이 레오폴드와 기사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군요. 그럼 전 이만.”
살짝 고개를 숙인 길리안이 출발 신호를 했다.
“거기 평민 넘버즈. 내 기사들의 말을 쏜 걸 아직 보상하지 않았군.”
“이곳에 왕실 기사 말고 다른 기사가 있었습니까? 약자를 공격하는 도적 떼는 본 것 같지만, 기사는 본 적이 없습니다만.”
“왕의 기사라 해도 평민 출신에 기사일 뿐인 네놈이 감히!”
“죄송하지만 기사는 충성을 맹세한 주군 외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됩니다. 말에 대한 보상이라면 해드리죠. 하지만 모욕은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길리안 경!”
로렌스가 다시 부르자 길리안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몰았다.
다시 말하려는 레오폴드에게 로렌스가 말했다.
“레오폴드. 네 상대는 나다.”
“너 따위와 더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싫어도 해야 할 거다. 이 노예가 네 노예라는 증명서를 보여 다오. 노예의 낙인이 네 가문의 문양과 다른 이유도 설명해야 할 거다.”
“귀찮군. 언제부터 왕실기사가 노예에 그렇게 신경을 썼지?”
“지금부터라고 하지. 네놈이 마음에 안 들거든.”
레오폴드가 뭐라 말했지만 로렌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부단장의 보고를 받았다.
“살아있습니까?”
“예. 숨은 붙어 있습니다.”
그란스가 안고 있는 10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소녀.
로렌스가 말안장에 달려 있던 물통 같은 것을 기사에게 건넸다.
“포션입니다.”
“상처가 깊어서 어떻게 될지는···.”
“그 노예는 탈주한 나의 노예다.”
레오폴드의 말에 로렌스가 그를 노려봤다.
“이 노예가 네 것이라는 증명서를 보이라 했을 텐데?”
“지나가던 노예상인에게 산 거다. 노예 문서를 받기는 했는데 말을 달리다 떨어진 모양이군. 어쨌든, 그래서 가문의 직인도 찍혀있지 않은 거다.”
“그럼 결국 네 것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이군.”
“어차피 쓸모없게 되었으니 나도 굳이 증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설마 노예 몇 때문에 검을 뽑을 생각인가? 노예사냥에 대한 처벌이 뭐였더라···.”
옆에 있던 기사가 벌금형이라는 말을 해주자 레오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다는군.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해할 만한 상황이니 내가 물러서 주마. 내 기사들의 말이 몇 마리 당했으니 벌금은 충분히 낸 거로 하지.”
말없이 노려보는 로렌스를 보고 다시 말했다.
“어차피 너도나도 서로를 어찌할 수 없어. 그건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넘버즈 로렌스 경. 아, 그 죽어가는 물건도 네게 주마.”
기사가 치료 중인 소녀를 내려다본 로렌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길리안처럼 상대를 자극해서 먼저 검을 뽑게 하거나 결투를 유도해서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지 못해서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주 회의를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됐고 길리안도 끝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사 몇을 처리하거나 위협하는 수준에서 끝났을 것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그 정도다.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지만, 혼자만 아는 것이고 그 정도로 녀석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게 너무나 싫었고 그래서 길리안을 먼저 보낸 것이다.
이런 더러운 기분은 여럿이 나눌만한 것이 못됐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부류를 상대하는 것은 길리안보다는 자신이 더 나으니까.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떤가? 조금 지나면 네가 무척 불리해질 텐데?”
그 말에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
“음?”
레오폴드 옆에 있던 기사가 그에게 낮게 속삭이니 그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 보이는 지그먼트 백작 가의 깃발.
“서로 가문을 등에 업고 싸워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레오폴드가 인상을 쓰는 걸 보며 로렌스가 다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지금은 아니니까.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이 일로 다른 말이 더 나오지 않길 바란다.”
잠시 로렌스를 쳐다보던 레오폴드가 웃으며 말의 고삐를 당겼다.
“로렌스. 곧 결투가 있다지?”
“들었나보군.”
“네가 쓰러지는 모습 지켜봐주마.”
그 말에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난 네가 하루빨리 백작이 되길 바란다.”
“의외군.”
“너의 대에서 너의 가문이 망하는 걸 지켜봐주지.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지만.”
인상을 쓰는 레오폴드에게 씨익 웃어 보인 로렌스가 시체의 수습을 명하고 말을 몰았다.
“카마엘 가문과 무슨 일이 있었더냐?”
아버지의 물음에 로렌스가 옆으로 말을 붙이며 말했다.
“약간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아들의 휘하 기사들이 말 등에 얹고 있는 시체를 본 미세르 백작이 말했다.
“노예사냥인가?”
“예.”
“쯧쯧, 한심한. 카마엘 가문의 영화도 다 됐나 보군.”
“아마도 곧···.”
말끝을 흐리는 아들을 보며 백작이 말했다.
“카마엘 가문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레오폴드의 대에서 카마엘 가문의 영화는 끝날 겁니다. 그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도 모르지만요.”
미세르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특별한 능력은 잘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은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는 힘.
위험한 힘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뭐든 할 수 있는 힘.
하지만 아들은 그 힘을 휘두른 적이 없었고, 자신의 자리를 노리기보다는 항상 협력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로렌스는 자신을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결투는? 이길 수 있는 거겠지?”
아버지의 말에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했다.
“좀 전 일로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구나. 카마엘 가문 따위는 신경 쓸 것 없다. 네가 지그먼트 백작 가의 사람임을 잊지 마라.”
로렌스는 대답 없이 뒤쪽을 돌아봤다.
그러자 백작이 손을 들었고 기사들이 속도를 줄여 거리를 벌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한 번은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말해보아라.”
“절 키우신 걸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인재 와서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대답. 듣고 싶습니다.”
자신이 친자식이 아닌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는 있었지만, 이상하게 말로 듣고 싶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물으마.”
“예.”
“네 이름이 무엇이냐?”
“로렌스 폰 지그먼트입니다.”
“그래. 넌 지그먼트 백작 가의 직계고 나의 둘째 아들이다. 대답이 되었느냐?”
“예. 어머니도 함께 오신 겁니까?”
그 물음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보다 계속 왕의 곁에 있을 생각이냐?”
“그럴 생각입니다. 백작 위는 형의 것입니다. 그것에 욕심은 없습니다. 키워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음.”
“필요할 때는 형을 돕겠습니다. 형제니까요.”
“그래. 그 정도면 되겠지.”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해보아라.”
“예. 왕의 편에 서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걸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라···. 가는 동안 할 말이 많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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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이야 애들 한 명에 한편이.... 헤헤;;;
며칠 만에 뵙는 거라 며칠 분을 들고 왔습죠.
다음 편으로~
아 추천과 댓글을 잊지 마세요~ 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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