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5)
길리안은 베이어드 백작 가와 조우했다.
이동 중일 줄 알았는데 멈춰서 있었고, 잠시 떨어져 있던 기사들이 합류하길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넘버즈 No.9 길리안 클라우드가 아서 폰 베이어드 백작님을 뵙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경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이렇게 마중해주어 고맙네.”
아서 백작의 말에 옆에 있던 이베트가 나섰다.
“너무 딱딱해요. 소개를 다시 해야겠어요. 길리안 이쪽은 내 오라버니이신 아서 백작님. 오라버니 이쪽은 제 아들인 길리안이에요.”
동생의 말에 아서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이베트의 아들이라면 내게는 조카다. 편히 대할 테니 어려워 말고 대하도록.”
“예. 그러겠습니다.”
“길리안 표정이 좋지 못하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별일 아닙니다.”
라고 말했지만 이베트가 끈질기게 물어보자 하는 수 없다는 듯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그러는 동안 아서 백작은 그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남편이 죽고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얼마 안 돼 아들까지 잃었을 때의 이베트는 죽은 사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계속 신경을 썼지만, 항상 슬픔에 잠겨 있는 눈빛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베트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6남매 중 이제 남은 것은 자신과 여동생인 이베트 뿐.
지금 둘을 보고 있으니 영락없는 모자 사이였다.
“카마엘 백작 가의 평판이 나빠지는 이유가 후계자 때문이지. 그 가문도 다 된 모양이구나.”
이베트의 말에 아서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네 아들은 적이 많은 모양이구나.”
“이게 다 왕께서 상황을 이용하셨기 때문이에요. 그게 아니어도 길리안은 그런 일을 보고 지나치지 못한답니다. 진정한 기사라면 그래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하지만 정의를 실현한다는 건 예전부터 힘든 일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로운 마음이지만 그걸 행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
아서 백작이 길리안을 봤다.
“왕이 하사한 검을 부러트려 정의를 실현한 용기 또한 모두가 본받아야 할 일이다. 그 나이에 넘버즈에 올랐다면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
그리고 이베트를 보며 말했다.
“재력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고.”
이베트가 미소를 짓는 걸 보고 다시 길리안을 봤다.
“그래도 부족한 것이 아직 하나 있구나.”
그게 뭘 말하는지는 길리안 도 알고 있었다.
그때 다가온 백작 가의 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보고 하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기사들과 다른 영주들이 도착한 모양이다. 내가 널 그들에게 소개해주마.”
길리안이 이베트를 보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오르는 아서 백작을 따라 말에 올라 그를 따랐다.
도착한 영주들과 인사를 나누고 길리안을 소개한 백작이 길리안과 함께 조금 앞으로 나갔다.
“너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내가 주마.”
“예?”
씨익 웃은 백작이 말 위에서 크게 말했다.
“넘버즈 길리안 클라우드 경은.”
백작이 이베트를 가리켰다.
“내 동생 이베트 폰 베이어드의 아들이다.”
그리고 길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비록 성은 다르나 나의 조카이며 백작 가의 일원이다. 이미 왕께서 성을 하사하셨기에 베이어드의 성을 미들 네임으로 쓰는 것을 나, 아서 레손 폰 베이어드의 이름으로 허락한다. 또한, 그의 깃발 위에 백작 가의 피닉스가 함께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새로운 가문의 일원에게 영광이 함께하리라!”
백작의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베이어드 가문에 영광을!”
“나의 기사들은 가문의 일원에게 예를 취하라.”
기사들이 검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길리안도 한 손 검을 뽑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여 그들의 예에 답했다.
“내 기사들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더구나.”
“감사합니다.”
“너를 위해서라기보단 내 동생을 위해서다. 난 이베트에게 빚이 많은 몸이다.”
“음.”
백작이 길리안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 베어드 가문의 늙은 여우도, 카마엘 가문의 풋내기도 널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왕도 널 더 중용할 것이다. 아무도 내 가문의 일원을 무시하지 못한다.”
“넘버즈 No.7 드레드가 데이브 폰 피게로아 백작을 뵙습니다.”
드레드의 인사에 고개를 한번 끄덕 한 데이브 백작이 손짓을 하자 흑기사 한 명이 몇 마리의 말을 몰고 왔다.
말들에 얹혀 있는 몇 구의 시체.
그걸 확인한 드레드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이 망가져 있고 혀가 없는 이들.
“피해는?”
드레드가 묻자 흑기사가 대답했다.
“위력도 강하고 활 솜씨도 대단했지만 말이 몇 마리 당했을 뿐 기사의 피해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몇 명 잡지 못한 것이 치욕입니다. 재빠른 놈들이더군요.”
기사의 설명을 들은 드레드가 백작과 같이 온 다른 영주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출반 신호를 했다.
행렬의 선두에서 말을 모는 드레드의 옆으로 흑기사 하나가 말을 달려왔다.
“오빠!”
“이레인?”
“하, 하, 하. 이 몸이 흑기사가 된 줄도 몰랐다니.”
그러면서 투구를 벗고 씨익 웃는 여동생을 보고 드레드가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구나.”
“여전히 아름답다는 말이겠지?”
“그것도 포함해서.”
“역시 셋째 오빠가 최고야. 그런데 얼굴 좀 보여주지?”
그 말에 안면 가리개를 올리는 드레드의 투구를 잡고서 말했다.
“벗으라고.”
하는 수 없다는 듯 투구를 벗은 드레드가 피식 웃었다.
“됐냐?”
“응. 보기 좋네.”
“그런데 네가 갑옷을 입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라는 드레드의 물음에 이레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말이지. 엄청난 일이 있었지.”
“무슨?”
“심심해서.”
“뭐?”
“심심하다고. 우리 집안 남자들 재미없어.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할 때도 있어. 그런 집에 시집온 여자들이 불쌍하지. 매일 여자들끼리 같은 대화 하는 것도 질리고 딱히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도 있고 재능도 있고. 그래서 이 정도로 성장했다는 말씀.”
재잘거리는 동생을 보며 드레드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이 몸이 기사로 인정받을 만큼 성장하셨는데 오빠라는 사람이 집에 한번을 안 오네? 너무한 거 아냐?”
“미안하다.”
“그럼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러면서 뒤쪽을 가리키는 동생을 보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할 말 없다.”
“으! 정말 똑같아. 아빠도 오빠들도 하다못해 조카들도 빼다 박았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냐?”
“침묵과 무관심 속에서.”
“음.”
“내년부터 아카데미에 갈 거야. 거기서 말 많고 자상하고 재미있는 남자 만나서 결혼할래. 아! 맞다. 조카는? 여자애라고 들었는데 맞아?”
“여자아이다.”
“오빠는 안 닮았지?”
“응.”
“와~ 정말 다행이다. 오빠 안 닮았으면 예쁘겠다. 내가 다행히 어머니를 닮은 것처럼.”
“그래 다행이지.”
“아, 그런데 언니는? 언니는 예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하는 드레드를 보고 이레인이 피식 웃었다.
“하긴, 예쁘니까 그랬겠지. 아무튼, 이번에 가면 소개해 줄 거지?”
그 말에 뒤를 슬쩍 돌아본 드레드가 고개를 끄덕했다.
“몇 살이지? 두 살이던가? 말은 해?”
“조금씩.”
“와~ 정말 예쁘겠다. 오빠 빨리 가자, 응? 설마 이 예쁜 고모를 보고 울지는 않겠지?”
“좋아할 거다.”
“다행이다.”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레인을 보고 드레드가 피식 웃었다.
“조카는 많잖아.”
“많지. 죄다 남자여서 그렇지. 여자가 이렇게 귀한 집안도 없을 거야. 애만 낳으면 남자야. 걸음마 시작하면 검을 쥐여 주질 않나, 조금 크면 고모보고 칼싸움을 하자고 하질 않나.”
“너도 그랬다.”
“그건 오빠들이 그렇게 놀아줘서 그런 거지. 내가 조신하지 못한 건 다 오빠들 탓이라고. 아무튼, 조카들이랑 칼싸움하다가 기사가 될 실력까지 성장한 건 나밖에 없을 거야. 아 칼싸움으로 보낸 아까운 내 소녀 시절이여~.”
미소를 짓는 드레드를 보고 이레인이 다시 말했다.
“아 조카 이름은 뭐야?”
“쥴리아.”
“셋째 오빠 딸 이름이 쥴리아랍니다~.”
뒤쪽을 향해 입에 손까지 모아 큰 소리로 말하는 이레인을 보고 드레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뭐 하는 거냐?”
“알려주는 거야. 다들 궁금해할 테니까.”
“그럴 리가.”
“그럴걸? 다들 서로 말은 안 하면서 알아주길 바라고만 있으니. 하여간 입이 있는데 왜 말을 안 하냐고. 말을 해야 알 거 아니냐고.”
“음.”
“으! 답답한 사람들. 이러다 내가 시집가면 어떡할 거냐고.”
그런 동생을 보고 드레드가 쓰게 웃었다.
남자 형제만 다섯.
뒤늦게 태어난 막내가 유일한 여자인 이레인이었다.
차갑고 무뚝뚝한 아버지도 이레인에게 만큼은 예외였다.
모두가 애지중지 키워서 조금 버릇없고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형제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아, 설마 한 명만 낳고 말 거는 아니지?”
그 말에 드레드가 고개를 끄덕했다.
“말로 대답해주지?”
“더 낳을 거다. 둘째도 이미 생겼고.”
“정말?”
“그래.”
“얼마나 됐는데?”
드레드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셋째 오빠가 둘째를 가졌답니다. 아니지, 셋째 오빠의 아내가 둘째를 가졌답니다. 삼 개월 됐답니다.”
조금 전처럼 뒤쪽을 향해 외쳤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쓸 데 있을 걸? 아, 막내 오빠 아이 낳은 건 모르지? 한 달도 안 됐으니까.”
그 말에 드레드가 고개를 돌려 다섯째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고래를 끄덕하고 마는 것을 본 이레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말을 하라고 말을. 막내 오빠 결혼식에도 안 왔잖아.”
“그건···. 미안하다.”
“나한테 미안할 건 없으시네요. 전해줄 마음도 없으니까 직접 말하라고.”
그렇게 말한 이레인이 드레드가 몰던 말의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았다.
“뭐 하는 거냐?”
“뭐하긴. 말을 하라고 말을. 대화를 하란 말이야.”
그렇게 다섯째의 옆으로 끌려간 드레드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가보지 못해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그러고 대화가 끊긴 둘을 보고 이레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말했다.
“끝이야? 끝이냐고. 몇 년 만에 봤는데 할 말이 그렇게 없어?”
“나중에 술 한잔 하자.”
“예.”
그나마 한마디 더 한 거로 끝이 나버린 대화를 듣고 이레인이 고개를 젓다가, 다시 말을 몰아 앞으로 가려는 드레드의 말고삐를 덥석 잡았다.
“어딜 가?”
그러더니 또다시 말을 잡아끌고 이동했다.
그러자 둘째와 넷째가 슬쩍 거리를 벌렸고 이레인이 그 사이로 드레드의 말을 끌고 들어왔다.
“오빠 자리는 여기라고.”
“나는···.”
“지금은 말 안 해도 돼. 가족이잖아. 언제부터 나무라고 사과하고 그랬다고. 바로 여기가 오빠 자리라고.”
“음.”
“아버지도 아무 말 없으시잖아. 그럼 된 거야. 아직도 그걸 몰라?”
그리고 다시 드레드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이도 낳았고 둘째도 임신했다는데 어쩌시겠어. 수도에 도착하면 바로 인사를 드려. 손녀를 보면 무척 좋아하실 테니까.”
그러더니 앞으로 말을 달려 조금 앞에서 멈춰서 돌아섰다.
“이야~. 피게로아 백작 가의 남자들이 다 모였네. 보기 좋다.”
그러면서 손뼉을 쳤다.
그리고 옆에서 말을 모는 조카들을 보며 말했다.
“꼬맹이들 잘 보라고. 너희가 지금 보는 게 피게로아 가문의 완전체니까. 지금 보는 것이 가문이고 가족이고 형제다.”
그리고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피게로아의 형제를 위해!”
그녀의 말에 흑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피게로아의 형제를 위해!”
이레인이 검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유일한 꽃인 나를 위해~!”
그 말에 기사들이 크게 웃었다.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오빠들을 보며 이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으! 멋없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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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길리안도 이제 대충 꿀릴 거 없는...
드레드도 다시 가족의 품으로~
아, 베이어드와 베어드 가문 잘못 쓴 게 아닙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몇 편 뒤에 살짝 나올 겁니다.
이베트의 가문이 베이어드라는 건 저~~~어기 밑에 길리안이 왕비 처음 만나고 미네르바랑 비탈길 구르던 편에서 나옵니다.
중요한 건 아니고... 뭐 그렇다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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