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7)
“귀족들은 참 불편하지?”
미네르바의 말에 길리안은 그저 웃을 뿐.
발렌슈타인 백작 가와 베이어드 백작 가의 조우.
그리고 양쪽에 합류해있던 다른 영주들까지 있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거기에 데리고 온 자녀들까지 소개하니 초원에서 사교 파티라도 벌이려는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물론 자신이나 미네르바도 저쪽에 끼어 있다가 조금 전에 빠져나온 거였다.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뭐가?”
“몸이 여러 개도 아니고, 아무래도 한꺼번에 맞이하는 게 왕께서도 편하실 테니까요.”
“하긴.”
오늘만 수도에 도착을 알려온 대귀족 가문만 5개.
다른 영주들은 몰라도 그들만 맞이한다고 해도 갑자기 몰려들면 왕이 각 성문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때 미네르바처럼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둘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하악. 고모님 살려주세요.”
“무슨 일인데?”
“이름과 얼굴을 익혀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전 그런 쪽으론 별로라고요.”
바바라의 말에 피식 웃은 미네르바가 말했다.
“그보다 아까부터 궁금해하던 길리안 경과 얘기가 나누고 싶어서 온 건 아니고?”
웃으며 혀를 날름 내미는 바바라를 보던 미네르바가 길리안에게 말했다.
“길리안 아까 인사했지? 내 조카 바바라.”
길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바바라도 그에 답했다.
“정말 편하게 부르시네요?”
“응. 지금 넘버즈들 서로 꽤 친하거든. 그런데 저쪽은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아?”
“식사까지 하시고 출발하실 것 같아요. 베이어드 백작 가에서 대접한다는데 사실은 이베트 부인께서 준비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그거지만요.”
“역시 대단하시네.”
길리안을 소개하던 이베트는 당당히 자기 아들이라 소개 했고, 아서 백작은 베이어드의 성을 미들네임으로 줬다는 이야기를 하고 조카라며 힘을 실어 줬다.
평민은 미들네임을 쓰지 못한다. 아니 쓴다고 해도 관청엔 등록 자체가 되질 않는다.
물론 길리안은 평민이 아닌 기사.
그래도 귀족 출신이 아닌 이상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베이어드 백작이 길리안에게 성을 미들네임으로 주었고 조카라고 인정을 했다.
베이어드 백작 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선언이었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태생과 신분은 귀족이 아니지만, 이제는 귀족이나 마찬가지.
물론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일에 대해 불편한 내색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이베트는 영주들의 자녀중 여자들을 찬찬히 살폈다.
마치 아들의 신붓감을 고르는 어머니의 모습이랄까?
“길리안 경에 대한 궁금함도 있지만, 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고모님이 아니라 길리안 경에게요. 서로 친하게 지내신다니 혹시 고모님의 결혼 상대에 대해 아시나요?”
바바라의 물음에 길리안이 미네르바를 봤다.
“결혼하십니까?”
“아니야. 그건 그러니까 오빠가 마음대로 말한 거라고. 아 정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하는 미네르바를 보며 바바라가 장난기 어린 눈빛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건 사실이에요. 역시 질문이 잘못됐네요. 고모님이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는데 혹시 아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정말요? 누군지 말씀해주세요. 전 입이 무겁답니다.”
“길리안!”
미네르바의 뾰족한 음성에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입이 무겁습니다. 아무래도 본인께 직접 듣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표정을 한 바바라가 입을 열다가 미네르바가 쏘아보자 입을 다물었다.
“바바라 넘버즈가 되고 싶다고? 어디 얼마나 성장했는지 실력 좀 볼까?”
“어머! 저쪽에서 누군가 오네요. 이베트 부인이 준비하셨다는 그건가 봐요. 야외 파티라도 여시려나? 전 아버님께 알리고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듯 달려가는 조카를 보던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아, 내가 못 살아. 어릴 때는 정말 귀여웠는데, 조금 크더니 이제는 나를 놀려먹네.”
“귀여운 조카분을 두셨습니다.”
“귀여워? 너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도 있으시더군요.”
“윽. 자꾸 상기시키지 말라고. 갑자기 늙어버린 느낌이니까.”
솔직히 그랬다.
별생각 없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미 다 커버린 조카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길리안과의 나이 차이가 다시 떠올랐으니까.
“그래도 제가 조카는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제가 조카처럼 보이거나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아, 아니.”
“그럼 된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생각할 게 많다고. 나도 다른 여자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망설이지는 않았을 거야. 그리고 결혼을 한다면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고 싶어. 특히 가족들에게는.”
“지금의 저는 아직 부족한 겁니까?”
“아니. 그 이전의 문제야. 내 아버지를 만나본 느낌은 어때?”
길리안은 멀리 떨어져 있는 더글라스 백작을 봤다.
인사를 주고받았을 뿐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주름진 얼굴에 흰 수염과 백발.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풍기는 위엄과 힘 있는 눈빛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조금이지만 아버지와 비슷한 느낌을 받기는 했다.
“아버지는 권위적이셔. 명예, 혈통, 신분도 무척 중요하게 여기시지. 우리 남매 중에 마음에 있던 사람과 맺어진 경우는 한 명도 없었어. 남자와 여자의 일도 명확히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시고 내 길도 인정해 주지 않으셨지. 처음 검을 잡은 이유에 아버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어. 아무리 노력해도 날 제대로 봐주시질 않아. 그러면서도 아직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기도 하지.”
씁쓸하게 말하는 미네르바를 보던 길리안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들은 표현이 서툽니다. 말은 안 하셔도 인정하고 계실 겁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분이 아니야.”
“제 아버지도 기사의 길을 반대하셨고 저도 그런 아버지께 꼭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인정받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도 그랬지요.”
“부럽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뭘?”
“제 아버지는 영지에서 영주님의 가신 취급을 받습니다. 평민의 신분이지만 기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사들이 아버지께 먼저 고개를 숙이지요. 영주님 일가와 기사장 엘런 경께만 예를 취하는 분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시겠지만 영지에서는 영향력이 큰 분입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왜?”
“아버지께서 제가 정말 기사가 되는 걸 원치 않으셨다면 전 검을 잡아보지도 못했을 거라는 말을 드리고 싶어섭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정말로 말리고 싶어 했다면 우리 삼 형제는 검 대신 농기구를 들고 있을 거란 말이지요.”
“하긴, 그렇겠네.”
“마찬가지 아닐까요?”
“뭐가?”
“영주도 아닌 제 아버지께 그 정도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작령에서 백작님의 명을 거스르면서까지 누가 검을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영지를 벗어나기도 어려웠을 거고 아카데미도 다닐 수 없었을 겁니다. 왕께서 크리스 경은 봐준 것이 베어드 백작 가를 봐서라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발렌슈타인 백작 가와 날을 세우면서까지 기사로 들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넘버즈도 되지 못하셨겠죠.”
“음.”
“아직도 아버지께 서운한 게 많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지원해주셨다면 오히려 이렇게 강해지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응석받이 막내가 됐을 수도 있었겠지요.”
길리안의 말에 미네르바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어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했습니다. 칭찬은 한 번도 받지 못했지만, 앞을 가로막으신 적은 없었습니다. 묵묵히 제가 가는 길을 지켜봐 주셨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지금은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백작님께서도 같을 거로 생각합니다. 말씀은 안 하셔도 늘 지켜보고 계셨을 거고, 정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막으셨을 겁니다.”
미네르바가 아버지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까?”
“그럴 겁니다. 제 아버지도 마음은 따뜻한 분이시지만 표현이 서투십니다. 저도 형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고요. 아버지들은 원래 그러신가 봅니다.”
말없이 아버지를 쳐다보던 미네르바가 손을 올려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길리안의 손을 잡았다.
“나보다 어른이네.”
“그저 우리 집 얘기를 해드린 것뿐입니다.”
미네르바가 고개를 돌려 길리안을 봤다.
촉촉한 눈망울로 잠시 그를 보다가 말했다.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남자라니까.”
“음.”
“음? 음이라니. 뭐야 그 반응은?”
“그렇게 갑자기 고백하시면 저도 당황스러우니까요.”
그 말에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게. 조금 생각이 많을 뿐이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건 그렇군요.”
“아직은 내가 앞서있는 건가?”
“예?”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는 길리안을 보며 미네르바가 고개를 저었다.
“라데카는 요즘 뭐해?”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서로 바쁘니까. 왜 이런 걸 묻는 내가 이상해 보여?”
“이상하다기보단···.”
“솔직히 말하면 나도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야. 엔젤과 라데카는 내겐 소중한 동생들이자 친구니까. 라데카의 마음을 몰랐다면 나도 굳이 그러진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라데카와 있었던 이야기를 조금 해줬다.
“라데카가 우릴 믿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모른 척하고 응원해줄 수도 없고, 나만 알고 뒤에서 따로 널 만날 수도 없잖아. 그건 라데카를 기만하는 거니까. 그래서 나도 솔직하게 말했어.”
“음.”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 너는 포기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다고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질 리도 없으니까. 지금까지 난 다른 누구도 내 마음은 구속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왔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나 뭔가를 꿈꾸는 마음을 갖는 건 자유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니 라데카가 널 좋아하는 것도 자유지. 그걸 내가 무슨 권리로 막아. 그래서 이렇게 된 거랍니다. 길리안 경.”
미네르바의 말에 길리안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에···.”
“응.”
“만약 제가 둘 다 좋아서 어떤 결정도 못 내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욕심이 많은 남자였네? 어쩌지? 반씩 나눠 가져야 하나?”
“네?”
놀란 표정의 길리안을 보고 미네르바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 내가 조금 무서운 말을 했나?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까? 지금은 그것 말고도 당면한 문제가 너무 많거든.”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아니야.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인걸.”
“다른 고민을 할 시간은 아직 많습니다. 지금은 결투에만 집중하시고, 다른 고민은 결투 후로 미루시지요. 마음이 흔들리면 검이 흔들립니다. 그런 상태로 승부를 장담할 만큼 아이작 경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까요.”
“응. 고마워. 이래서···.”
마네르바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면 때문에 점점 좋아지는 거였다.
자신의 길을 인정해주고 또 응원해주는 남자였으니까.
“어머, 두 분 너무 보기 좋아요. 마치 연인 사이 같네요.”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미네르바에게 얀데레 속성은 없습니다.
한편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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