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10)
“궁에는 가지 않으셨나 보네요. 무척 빨리 오신 걸 보면.”
“영주들을 맞이하느라 바쁘신 것 같아서 그냥 왔단다.”
“오라버니는 사람이 너무 좋으세요.”
“초대한 손님이 갑자기 몰리면 주인은 바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백작들과는 따로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발렌슈타인 백작을 먼저 만나고 계시다는 거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서 백작을 보며 이베트가 다시 말했다.
“같은 백작인데 왕자의 외가보다 발렌슈타인 가문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신다니···.”
“그래서겠지.”
“네?”
“왕의 후계자, 다음 대 왕위를 이을 왕자인 윈스톤의 외가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냐?”
“그걸 왜 제게 물으시나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하며 찻잔을 내려다보는 이베트를 보며 아서 백작이 말했다.
“너이기에 묻는 것이다. 궁에 있다는 윈스톤이 마중 나오지 않은 이유도, 왕께서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도 너는 알고 있을 테니까.”
“제가 어찌 왕가의 일을 모두 알고 또 왕의 생각까지 알겠어요.”
“나를 만나고 지금까지 윈스톤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정말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생각이냐?”
아서 백작의 말에 이베트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말하면 오라버니가 선입견을 가지게 될까 봐 그런 거예요.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고요.”
“내가 영지와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 영지에 틀어박혀 있기는 했지만 눈과 귀를 닫고 있지는 않다. 몇 달 전에 만나보기도 했고.”
“윈스톤을요?”
“국경순찰을 가면서 들렸더구나. 열흘 정도 머물다 갔지.”
“그랬었군요. 곁에 두고 보니 어떻던가요?”
“솔직히 말해주길 바라겠지?”
“네.”
차를 한 모금 마신 아서 백작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끔 수도에 와서 잠깐씩 보고 갔을 때는 몰랐는데 며칠 곁에서 지켜보니 실망스럽더구나. 칼랜베르크로 가기 전에 들린 아론보다도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평가가 잘못된 것이었으면 좋겠구나.”
“하아~. 불행하게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네요. 그래서 후회가 커요. 제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왜 네가 자책하는지 모르겠구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가문의 후계를 어떻게 키울지는 오롯이 그 가문의 몫이지 외가에서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저 그런 가문도 아닌 왕가다. 루미나의 아들이라 해서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어린 왕자들을 돌봐준 것으로 네 할 일은 다 한 것이니 자책할 것 없다.”
“알아요.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윈스톤이 어찌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말해다오.”
“근신 중이라 들었어요.”
“이유는?”
“국경순찰 중에 생각 없이 행동한 것에 대한 문책이겠지만···. 아마 그 때문에 왕께서 오라버니를 부담스러워 하시는 걸 거예요. 왕궁에 가시면 윈스톤을 찾으실 거고 만나게 되면 오라버니께 어리광을 부릴 테니까요.”
“여자아이라면 또 모를까 스물여덟이나 먹은 사내 녀석의 어리광이라니 생각만 해도 징그럽구나. 같은 나이인 헤르만의 큰아들이 벌써 열 살이다.”
“어머, 벌써 그렇게 됐나요? 데려오지 그러셨어요?”
“출발하기 전에 몇 가지 일을 맡겨놓고 왔으니 다들 정리가 되는 대로 곧 올 거다. 아이들이 오면 놀라지 말거라.”
“왜요?”
“이제는 널 할머니라고 부를 아이들이 스물이 넘으니까.”
“그, 그렇게 많았나요? 소식은 계속 받았지만···.”
그러면서 작게 이름을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꼽아보는 이베트를 보던 아서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다 기억하나 보구나.”
“그럼요.”
“아마 다 오지는 못할 거다.”
“그렇겠죠. 보고 싶네요.”
“라미레스의 일 이후로 영지에 오질 않았으니···. 음.”
말을 삼키는 아서 백작을 보고 이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괜찮아요. 오라버니.”
“네가 다시 웃을 수 있어서 나는 정말로 기쁘다.”
“제 걱정은 마세요. 생각해보니 고향에 가지 않은 지 정말 오래됐네요. 혼자 애쓰시는 걸 알면서도 가보지 못해 죄송해요.”
“괜찮다. 어차피 고향에 와도 아픈 기억이 널 울렸을 테니까.”
“역시 오라버니는 강한 분이에요. 저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니, 너는 나보다 훨씬 강하다. 남자였다면 난 네게 영지를 맡겼을 거다. 내가 일어설 수 있었던 건 너와 루미나 덕분이지. 너희가 없었다면 베이어드 백작 가는 몰락의 길을 걸었을 테니까. 그리고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지금쯤 땅속에 묻혀있었겠지.”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한 일이라곤 물수건을 갈고 손잡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어요.”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거란다. 나중에 신을 만날 수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왜 내 가문과 내 백성들이 그렇게 가혹한 일을 겪어야 했는지를 꼭 따져보고 싶구나.”
그때를 회상하는 듯 떨리는 손을 꼭 쥐는 이베트를 보며 아서 백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0여 년 전.
그때까지만 해도 베이어드 백작 가는 왕국의 다른 백작 가문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혔었다.
왕비를 배출하고 그 위세가 더 높아졌지만, 그것도 잠시.
베이어드 지역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에스토 왕국의 남중부 십여 개 영지를 휩쓸었다.
당시의 상황은 지옥과도 같았다.
신관이나 의사들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고 그들도 병에 걸려 시름 하다 죽어갔다.
신의 저주라는 말이 나올 정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환자를 격리하는 것뿐이었다.
환자가 발생하면 마을 전체를 격리하고 아예 불태워 버리는 끔찍한 일도 수없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전염병은 귀족이라고 해서 피해가질 않았다.
베이어드 가문도 마찬가지였고 병이 시작된 곳이라 피해는 다른 곳보다도 훨씬 컸다.
영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가문의 일원들이 병에 걸리기 시작하자 당시의 백작이었던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자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거였다.
하지만 영지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왕비였던 언니의 곁에 있던 이베트는 바로 고향으로 달려왔다.
돌아가라는 만류에도 말을 듣지 않고 아픈 가족들과 사람들을 돌봤다.
가문의 남자들이 모두 쓰러지고 영지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을 때 그걸 수습한 건 스물도 되지 않은 이베트였다.
동생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자신도 살아났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아버지와 형과 동생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병석에 있을 때는 몰랐던 이야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죽어갈 때도 눈물을 삼키며 자신에게 내색하나 하지 않고 미소를 보이던 동생은 그때야 눈물을 보였다.
아버지와 죽은 형을 대신해 백작의 작위를 이은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다들 베이어드 백작 가는 끝이라고 했었고 작위를 이은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슬픔에 빠져있을 여유도 없었다.
충성을 맹세했던 가신들과 기사들도 병으로 죽거나 떠나가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백작령의 인구도 마찬가지.
절망 속에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여동생들 때문이었다.
왕비였던 루미나는 왕을 움직여 소식을 왕국 전체에 전해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줬고, 이베트는 곁에서 영지 일을 도우며 힘을 보탰다.
수많은 귀족들의 구애도 거절하며 일을 돕는 이베트를 설득해서 시집을 보낸 것은 자신이었다.
마르샤 자작과 결혼 후에도 이베트는 많은 신경을 써주고 도움을 줬다.
두 여동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베이어드 백작 가는 정말 몰락의 길을 걸었을지도 몰랐고, 이렇게 빨리 힘을 회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동생들은 아픔을 잊고 행복하길 바랐지만, 루미나는 둘째 왕자인 아론을 낳고 세상을 떠났고 이베트는 남편과 아들을 떠나보냈다.
아서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의 난간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고향에 와보면 깜짝 놀랄 거다. 정말 많이 변했단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건 차이가 크지.”
“저도 보고 싶어요. 곧 내려가 볼게요.”
“이번에 나와 함께 가보는 것은 어떠냐?”
“그것도 좋겠네요.”
“이곳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변했어요.”
아서 백작이 옆에 다가와 말하는 이베트를 보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제가 변했어요. 이곳의 주인인 제가.”
그 말에 아서 백작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행복해요. 그 어느 때보다.”
“윈스톤의 일은 신경 쓰지 말거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어쩌시려고요?”
“왕이 교육에 실패했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옆에 붙어서 가르쳐야 한다면 그럴 생각이다.”
“영지는 어쩌시고요?”
“이제는 예전의 힘을 거의 회복했다. 아스터에게 맡겨놔도 괜찮을 정도가 됐지. 아니 아스터가 그만큼 잘해주고 있다. 예전의 형님을 보는 것 같단다.”
“아스터에게 물려주시려고요?”
“그게 순리에 맞는 일이니까. 형님의 아이들이나 동생의 아이들이나 모두 내 아이라고 생각하며 키웠다. 열다섯 명의 아들딸 중에 나의 장남은 아스터다.”
“오라버니다우시네요.”
죽은 형제의 아이들까지 모두 입양해서 자기 자식처럼 키우고 큰 오빠의 아들인 아스터에게 영지를 물려줄 거라는 이야기.
“몇 명은 제가 입양해서 키울 걸 그랬어요.”
“어림없는 소리.”
“왜요?”
“모두 나의 아이들이다. 영지를 돌보고 남은 가족을 돌보는 것은 내 몫이니까. 이미 가문을 위해 네가 해야 할 몫을 충분히 다했다. 그러니 이제는 너만 생각했으면 한다.”
“고마워요.”
“이제야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 카라얀. 아니 이제는 마르샤 자작이라고 불러야 하겠지. 작위를 넘기고 계속 이곳에 머물 생각이냐?”
“여긴 추억이 너무 많은 곳이라 쉽게 버릴 수가 없네요. 자작과 이야기는 끝났지만, 역시 새로 시작하려면 여길 떠나야 할까 봐요. 북부지구에 저택 부지를 판매한다니 그걸 사서 새로 지을까 생각 중이에요.”
“내가 지어주마.”
그 말에 이베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돈은 많아요. 내게 해주실 게 있으면 아이들에게 주세요.”
“그럼 새로 생긴 조카 녀석에게 주어야겠구나.”
“내 재산도 물려받지 않겠다는 아이가 오라버니가 주는 걸 받을까요? 내 아들로 이름을 올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오라버니는 모르실 거예요. 베이어드의 성을 미들네임으로 받은 것도 오라버니가 갑자기 공표해서일 테니까요.”
“널 위해서가 아니라 이베트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구나.”
“그런 아이죠. 오라버니의 마음에도 분명히 드실 거예요.”
“널 다시 웃을 수 있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에 쏙 든다. 아까의 대결을 보고 내 기사들도 그에게 반한 모양이더구나. 발렌슈타인 가문의 딸도 네 아들도 소문이 둘의 실력을 다 말해주지 못한다고 느꼈다. 네 아들은 베어드 가의 아들을 꺾을 만하더구나.”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왕의 직영지를 거치며 들은 것은 있다만···. 설마 소문이 사실이라는 말이냐?”
“네.”
“허허.”
“아직은 아무 말씀 마세요. 나중에 왕께 이를 묵인해준 대가는 톡톡히 받아낼 생각이니까요.”
“나의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라. 저주를 딛고 일어선 베이어드 가문의 힘은 네 생각 이상이다.”
길리안은 왕궁의 숙소로 돌아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주, 인, 님!”
자신을 반기는 이를 본 길리안의 눈이 커졌다.
손에 들고 있던 투구가 떨어져 툭 소리를 내고 바닥을 굴렀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반선f님 늦었지만, 추천 감사합니다.
추천을 두 번이나 받았으면 3연 참은 해야 하는데 ㅠㅜ
쓰고 있으니 내일은 두 편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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