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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19.09.25 21:43
연재수 :
37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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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0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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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1막) 방관의 의도 (10)

DUMMY

“-!”


만약 고도가 기사의 피를 가졌다면 훨씬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근접전투훈련을 받고, 영혼석을 통해 ‘덜린’의 가면을 빌려 기사를 흉내 낸다 하더라도 그녀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마법사. 고도가 낌새를 눈치채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붉은 선혈이 겨울숲의 한기를 적시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도는 짧은 탄식을 뱉는다.

고통이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솟구치는 붉은 안개는 분명 그녀에게 충격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상처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흥.”

익숙한 코웃음. 그 아래 떠오른 데커드의 미소는 여유로웠다. 고도의 뒤통수를 대신하여 찢겨나간 목에선 여전히 왈칵 핏덩이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붙들린 ‘인형’의 무표정은 그에게 있어 확실한 승기였다.

“너희들이 유기적인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어. 지원을 요청하거나 기다리긴 힘들었을 테지.”


“.......”


단검날이 손등을 파고드는 건 개의치 않으며, 데커드는 자신의 목을 완전히 잘라버리려는 인형의 단검을 서서히 바깥으로 밀어낸다.


“날 제압할 수 없다면 이송담당관을 죽인다-. 좋은 판단이야. 호송인원들이 전부 죽어버리면 내가 뭐라고 하든 카나반이 알아서 날 처리해줄 테니까.”


“.......”


“뭐, 내가 일부러 간격을 벌렸더니 덥석 물었다는 거지.”


뒤늦게 합류한 이리스가 ‘자객’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고, 인형은 결국 데커드의 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리스! 퇴로를 차단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고도의 외침.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고도의 의도를 파악한 이리스는 추가공격을 하는 대신 간격을 벌린 채 빙글 돌아 자객을 압박했고, 데커드 또한 한 걸음 다가서는 것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한다.


“다친 짐승은 위험하다고들 하는데, 인형은 어떠려나.”


고도가 데커드를 바라본다. 그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 반응했다기보다는, 여전히 그의 옷깃을 적시며 솟아나고 있는 핏줄기를 향한 시선이었다.


“이리스!”


그녀가 속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이기도 했다.

고도가 주문을 외우자, 하얀 눈을 대신하여 검붉은색의 반액체 줄기들이 인형의 주변을 휘감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명체에겐 치명적인 혈마력의 응집체라 할지라도 영혼이 없는 ‘인형’에겐 나무뿌리만도 못한 존재. 자객은 어렵지 않게 두 발과 하나 남은 팔을 휘둘러 고도의 마법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도는 처음부터 자신의 혈마법으로 인형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


혈마력의 줄기들에게서 벗어나 도약하려는 순간, 폭파계열의 화염마법이 인형의 디딤발을 중심으로 거센 폭음을 내뿜는다. 한쪽 의식으로는 혈마력을 제어하고 반대편의 의식으로는 전혀 다른 성질의 마력을 구현해낸 이중영창. 그 난이도에 상응하는 결과로, 인형은 왼쪽 다리의 피부가 모조리 증발하는 상처를 입었고, 이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죽이지 마!”


비명처럼 날카로운 데커드의 외침. 이에 반응한 것일까, 이리스는 주먹의 궤도를 뒤틀어 자객의 두개골 대신 어깨뼈를 박살 낸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인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추가로 두 다리의 허벅지와 무릎까지 으스러트리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


“죽이지 말라니, 왜?”


불만이 가득한 고도의 표정과 목소리. 데커드는 대답에 앞서 짧게 웃는다.


“일단 머리만 살려놓으면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인형이야. 고문 같은 걸 한다고 해서 얘들이 순순히 불 거 같아?”


“고문이 아니라, 정보를 캐낼 수 있는······.”


말을 잇지 못하는 데커드. 그는 그제야 자신의 목으로 손을 가져갔고, 조금씩 목을 죄어오던 현기증과 한기가 단순히 겨울숲의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봐!”


아득해지는 하늘.

검게 드리우는 시야 속에서,

데커드는 당황한 고도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채 정신을 놓는다.




================




“흐음.”


감자튀김을 향하던 손을 멈추고, 대통령은 잠시 새끼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응시한다.


“아프십니까?”


그리고 귀신같이 주인의 시선을 알아채고 먼저 질문을 던지는 경호실장 재규. 이에 그륜은 질렸다는 듯이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좀 이상해서.”


“이제 좀 익숙해지셨다면서요?”


“손가락 말고.”


어느새 눅눅해진 감자튀김. 그륜은 서너 개를 한꺼번에 집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는다.

그들이 있는 곳은 욘의 수도, 개해산경을 대표하는 궁전인 ‘바위성’ 운미르. 그중에서도 궁전의 하층에 위치한 대통령 사저였다. 카나반에서 복귀한 뒤로 줄곧 이곳에서 모든 생활과 업무를 병행하고 있는 그륜이었기에 경호실장인 재규는 비교적 편한 ‘임무’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자신이 모시는 대통령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재규는 이 평화가 오래가지 않으리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또 뭐가 불안하십니까?”


“불안이라기보다는······. 재규야, 우리가 돌아온 지 얼마나 됐더라?”


“꽤 됐죠.”


“돌아온 뒤로 ‘놈들’이 날 독살하거나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횟수는?”


“없습니다.”


그륜이 말한 ‘놈들’이라는 게 ‘침묵’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란 걸 재규가 모를 리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살아왔던 그였으니까.


“이상하지 않아?”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요?”


“욘에서 놈들을 거의 다 쫓아내다시피 했고, 대대로 이어져 오던 자금지원도 끊은 데다가, 무엇보다 카나반 지부장이었던 여자까지 낚아서 끌어내렸어. 역사적으로 놈들이 이렇게까지 노출되면서 피해를 보았던 적은 없었다고.”


“뭐, 그렇죠.”


“그런데도 조용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

확실히, 그들이 알고 있는 ‘침묵의 기사단’은 일국의 대통령 따위는 손바닥 뒤집듯 바꿔버릴 수 있는 영향력과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욘에서 자리를 잃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실체를 완벽히 밝혀내어 색출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일. 그 때문에 카나반에선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쳤을 정도로 대담한 그륜조차 복귀 후엔 줄곧 사저에 칩거해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뭐, 우리가 여기 박혀있어서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놈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내가 여기가 아니라 ‘에일로피아의 목’에 있었더라도 찾아내서 족쳤을걸. 너는 어때? 뭐 연락 오는 거 없어?”


“저도 그들에게 있어선 바둑알일 뿐이었으니까요. 제가 먼저 나서서 접촉해본 적은 없습니다.”


“흐음······.”

손가락이 기름으로 반질거리는 건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번 한 움큼 감자튀김을 집어 입안으로 욱여넣는 그륜. 한동안 그 짭조름함과 고소함의 풍미를 만끽하던 그의 눈빛이 문득 위를 향한다.

“문득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네.”


“어쩌면, 우린 너무도 당연하게 줄곧 ‘침묵’과 ‘제국’을 연관 지어서 생각해왔던 게 아닐까 싶네.”


“.......그게 무슨-”


“그러니까.”

감자튀김을 찍으라고 놔둔 포크를 집어, 기름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을 긁어내는 대통령.

“사실 ‘침묵’이 제국에게도 그다지 우호적인 편이 아니었다면?”


“.......”


추가적인 정보를 기다리는 재규의 ‘침묵’. 그륜은 이에 힘입어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카나반의 후계자 문제를 야기해서 정권과 왕권의 안정성을 뒤흔들려고 했고, 브린타이나는 물론 블라고슬로바 내부에서도 말썽을 일으켜서 동맹구축을 더디게 만들었지. 나도 그렇고 로빈슨도 그렇고 이런 ‘침묵’의 방향성이 ‘동맹’ 자체를 저지하려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었어.”


“제국에게 유리한 일들만 노려왔으니까요.”


“바로 그거야. 근데 말이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포크. 대통령이 눈이 흥미라는 연료를 불태우며 빛나고 있었다.

“만약, 제국이 침묵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제국 또한 침묵이 ‘조정’해야 할 대상이었다면?”


“.......조정?”


“우리 욘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침묵’이 반도에 뿌리를 내린 역사는 수천 년에 달해.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침묵만 하고 있던 그들이 본격적으로 반도의 역사를 ‘조정’하려고 난리를 치기 시작한 게 바로 200년 전의 대전쟁. 즉, 제국의 반도통일과 평정이 놈들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


자신의 이론이 결론에 다다르자 그륜은 뿌듯한 표정으로 콧대를 세웠지만, 재규의 얼굴엔 여전히 의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침묵’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용의 부활을 통한 인류의 말살 아닙니까? 제국이 멸망의 역사를 앞당겨준다면 그들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 아닌가요?”


“하하, 글쎄. 제국이 대전쟁을 통해 학살을 벌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통일’의 의도와 결과가 ‘반도의 몰락’이라고 단정 지은 건 피해자들의 주장일 뿐이니까. 정작 대전쟁을 일으킨 ‘학살의 검성’은 마지막까지 전쟁과 학살의 이유를 공개하지 않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잖아.”


“.......그 말씀은-”


“그래.”

기름진 웃음.

“나는, 어쩌면 대전쟁 자체가 ‘침묵’에게 엿을 날리기 위한 제국황제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

여전히 가벼운 표정, 가벼운 어투.

그러나 그 반질거리는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의 무게는 도저히 가볍게만 볼 수는 없는 것들. 재규는 대답함에 앞서 긴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혹시라도 동맹국의 수장들 앞에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쇼.”


“괜찮아.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구.”


“.......”


“뭐야, 왜 그렇게 쳐다보냐?”


“아뇨, 그냥······.”


진심 어린 경호실장의 시선을 장난으로 받아버리며 낄낄 웃는 그륜.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몸을 비틀어 반쯤 눕고는, 다시 생각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침묵’이 제국을 견제하려 한다면 ‘동맹’을 방해하기는커녕 장려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단순하게 생각 없이 여기저기 시비 털러 다니는 게 그놈들 역할이 아니라면, 지금의 행보들은 여러모로 앞뒤가 맞지 않잖아.”


“지부가 나누어져 있는 만큼, 생각 외로 ‘침묵’이란 조직이 유기적이지 못한 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재규의 의견이었으나, 그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침묵은 수천 년이나 그들의 정체를 숨긴 채 반도에서 굴러먹었던 놈들이야. 말 그대로 막장스러운 지하폭력집단이 아니라고. 놈들이 노리는 건 오직 하나. 그 목표도, 그 최종적인 수단도 우린 알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당장 뭘 하고 있는지, 뭘 노리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새끼손가락이 없는 손이 바구니를 향하지만,

이미 대통령의 입으로 추락할 감자 조각들은 동이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륜의 입가로 스민 미소는 더욱 기름져져 있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바야흐로 방관의 시간이지.”


작가의말

부족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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