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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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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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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2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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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DUMMY

직각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온기를 속삭이는 한낮의 시간.

시야 가득히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기둥을 가진 나무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 거친 활엽수들의 거대한 잎사귀들이 지붕을 이루는 숲의 한가운데에선 햇빛은 누릴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문명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이러한 태고의 풍경에서 약간은 이색적인 조화로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상으로 튀어나온 나무의 굵은 뿌리 사이로, 잡초와 떨어진 나뭇잎을 침대 삼아 시간을 즐기는 청년의 숨소리였다.

초록빛으로 정화된 한낮의 징표를 만끽하며, 모든 나무들의 호흡과 맞추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가슴은 완벽하게 평화로워 보인다.


청년은 긴장을 놓았을 뿐 잠을 청하진 않는다. 이곳은 신경 쓸 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쌌다.

청년은 평생 화를 낼 일이 그다지 없었고, 심심하지도 않았으며, 불행하지도 않았다.

들어오는 고물 중에 표지나 제목이 맘에 드는 책이 있으면 읽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다시 팔아치웠다. 잘 이해가 가지 않거나 재밌어서 두 번 이상 읽고 싶은 것은 따로 책장에 꽂아두었지만, 그중에 다시 펼치는 책은 거의 없었다. 청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청년은 심지어 혼잣말도 하지 않는다. 마을로 내려가는 날이 아니면, 아니, 마을로 내려가는 날이라도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대화의 방법을 잊지는 않는다. 그는 직접 체험해보지 못한, 체험해볼 필요도 없는 것의 대부분을 책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청년은 여자를 안아본 적도 없고, 또한 마을 처녀의 알몸이나 극적인 낭만을 상상하며 자위하지 않는다. 그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랑을 본 경험만이 있을 뿐,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그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동시에 그와는 다르게 호탕한 그의 친구는, 항상 먹을 것 또는 마을처녀의 몸매에 대해 신나게 떠벌리면서도 그것들에 관심이 없는 청년의 지루함을 안쓰럽다는 듯 놀리기 때문이다.


물론 청년은 그 친구가 싫지는 않다. 청년이 깔보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그의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평화로웠으니까.


아무것도 담지 않은 청년의 시선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의미하다.

그는 문득,

자신은 절대 절망스럽지 않을 것임을 느낀다.

동시에 절대 흥미롭지도 않을 것임을 느낀다.

자신이 꽤나 오랫동안 느껴왔지만,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 묘한 불안감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지금의 밋밋한 수염이나 벌겋게 올라온 손등의 힘줄이 생기기 한참 전부터 느껴오던 것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킨다. 푸른 공기는 어느 때보다도 그의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그는 마을에 내려가기로 해본다.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지만, 그는 작은 결심을 했다.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모든 걸 바꿔보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은 마을에 내려가는 날이 아니지만, 내려가 보도록 한다.


그는 그것이 작은 결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는, 그의 거대한 한 방울이었다.





=====





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읽고 있던 논문을 펄럭- 하고 무심하게 한 장 넘겼다.


「....... 요는 극소수의 소위 영웅이라는 작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국정에 불만을 표시하는 자가 (놀랍게도)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선거라는 정치적 선전수단을 보면, 그 민주주의라는 형식상 행위의 결과가 항상 더 강한 자를, 그리고 위대했던 자의 후계와 가문을 위한 대국민 ‘연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우매한 민중의 우매한 선택으로 포장된 민주주의의 위선만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왕과 검성의 ‘검’과 ‘피’로써 공포통치가 이루어지는 국가가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실로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내건 ‘왕정’의 희극이다.

국민들의 이러한 선택의 원인에는 수 세기에 걸쳐 끊이지 않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본다. 언제라도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을 수 있다는 막연한(그리고 의도적으로 조성된) 공포감 때문에 자신과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더욱더 강한 권력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와 군정(軍政)의 폐해를 오랫동안 겪으면서도 국민 스스로가 그에 얽매일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다. 일각에는 분쟁 중인 모든 국가가 독재를 통한 정권을 연명하기 위해 의도하여 정전을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에일로피아반도 6국 3000년 근대사 중,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0년 전, 아실레마 제국이 반도를 통일했던 기간인 ‘침묵의 15년’을 제외하고는 이 땅에 전란의 비명이 끊이질 않는 이유에 대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음모론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어가자, 정부의 왕권을 견제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마법사 협회의 그랜드마스터들조차 국가와 유착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마법사 협회가 6국시대 이후로는 정치적으로 이렇다 할 표면적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을 꼬집는 말이다.

퇴직한 어느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마법사 협회는 왕의 명령에 움직이는, 이른바 왕권에 복종하는 하나의 정부기관이 되어버린 지 오래며, 다른 국가들의 사정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국민들이 공포로 함구하는 사이에 왕은 서서히 국가를 국민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에 의한 것으로 퇴색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하루빨리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들의 권리가 무엇인지 깨달-」


‘어느 정부 관계자 좋아하네.’


이것은 먼지 쌓인 두루마리 뭉치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10년 전의 논문이다. 혹시나 해서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지만, 역시나 내가 모르는 이름. 아마 마스터 자격시험에 떨어진 어느 찌질한 놈이 정계에서라도 관심받기 위해 저지른 발악이었을 거다. 단언컨대, 제목으로 사람을 낚는 능력 말고는 눈여겨볼 가치가 없는 인간일 테지.

그다지 유익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지만, 그래도 지루한 근신 기간을 빠르게 보내기 위해서는 이런 찌질한 논문만 한 것이 없다. 가끔 운이 좋으면 내가 아는 교수님들의 이름도 보일 때가 있는데, 그들의 흑역사이자 맹점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되도록 유심히 보는 편이다. 실제로도 몇 번 써먹기도 했고.


이곳, 대학교 본관의 도서관은 언제나 그렇듯 은은한 조명 속에서 종이가 썩어가는 냄새만 주구장창 내뿜고 있다. 학기 중도 아닌 방학 중에, 최연소 수석 입학에 빛나는 내가, 그것도 여린 여자아이의 몸으로 왜 이런 곳에 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오히려 내가 더 묻고 싶다.

공부를 잘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건지 말이야.

하지만 이 모든 의문과 짜증도 3년이 가깝게 지속되면서 많이 희석된 것이 사실이다. 분노는 짜증으로 수그러들었고, 깊었던 탄식은 한숨으로 짧아졌다. 결국 남은 건 지루함 뿐.


정리는 하는 둥 마는 둥, 나는 사서의 눈치를 보면서 길게 늘어진 시간을 그나마 압축시킬 수 있는 다른 문서를 찾기로 했다. 어두운 조명에 간신히 제목을 살피며, 내 평균적인 키(절대 작은 게 아니야. 도서관의 책장이 쓸데없이, 더럽게 높을 뿐이라고)로는 손끝이 간신히 닿는 책장의 중간 부분 문서들을 꺼내려다,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잡아챈 책과 그 뒤로 그 칸의 모든 문서가 내 위로 따라 무너진 덕분에 머리와 옷이 온갖 곰팡이와 먼지로 더러워지고 만다. 다행히 머리는 미리 묶어 올린 터라, 긴 머리 하나하나에 붙은 먼지들을 털어낼 필요는 없겠다.

그리고 정수리로 내려앉는 곰팡내. 순간 나도 모르게 욕이 섞인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래도 이 더러움 덕분에 다른 이들의 눈에는 내가 성실히 제 의무를 다한 것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처음 근신을 시작한 이래로 겪어온 수많은 징계 중에서도, ‘도서관 정리’는 열심히 의무를 다하고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나오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고 더럽게 나오는 편이 더 효과적으로 내 의무에 대한 성실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하긴, 도서관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도서관이라는 특성상 관리감독하는 주임교수도 없고, 더러운 손으로 크렘베리파이를 쩝쩝거리며 먹어도 시비를 걸 범생이나 기숙사감도 없다.

아, 물론 가끔 논문을 읽다가 큰 소리로 비웃거나 대놓고 욕을 하면 1,2학년 꼬꼬마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질 때가 있긴 하지만. 뭐어, 그래도 이 대학 내에서 나의 기숙사 방을 제외하고 이보다 편한 곳은 없을 것이다. (본래 4인 전용의 기숙사방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 내가 얼마나 학과장과 동기들에게 쌍욕을 듣고 핍박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물론 부끄러움이 아닌 빡침으로.)

이 지루한 평화가 오늘도 이어지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질 때쯤, 도서관 입구에 어렴풋이 보이는 익숙한 그림자가 나를 한숨 짓게 만든다. 그 불쾌한 그림자가 나에게 다가옴과 동시에,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 방문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최대한 반갑고 놀란 표정을 지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입술 끝에 이는 경련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잠시 이리와 앉아 보거라.”


내 인사는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주름살보다도 깊은 돋보기안경 아래로 나를 다소 경멸스럽게 내려다보고는 획-하고 여러 개의 은촛대가 세워진 사서의 책상으로 느릿한 걸음을 옮긴다. 항상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 지루함을 느껴왔지만, 이번엔 뭔가 다르다. 잡무를 시키거나 꾸지람을 늘어놓을 때는 절대 저런 말로 운을 떼지 않았던 그녀니까. ‘정리하던’ 책과 두루마리들을 대충 옆으로 치워놓고, 나는 그녀의 불쾌한 시선과 나 사이에 책상을 두고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은은한 촛불 너머로 돋보이는 그녀의 보라색 숄을 보며, 과연 저거 세탁은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해본다.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저 숄과 안경을 화염마법으로 영원히 태워버리고 싶었던 사람이 이 학교에 나뿐만은 아닐 테지.)


내가 그녀와 눈을 맞추고 그녀가 입을 열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 나는 내가 최근에 뭔가 심각하게 잘못한 것이 있나 온 머리의 기억을 휘저으며 생각해보았다. 물론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그러나 불안감은 오히려 심장소리와 함께 커져만 간다. 행여나 불안해하는 것을 들킬까 최소한의 심호흡으로 안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이것을 그녀의 저 주름지고 날카로운 눈이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겠지.


“학회장님 서재와 도서관 정리는 이제 됐다. 따로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구나.”


신입생 시절, 몇몇 동기생들은 청강하는 학생의 수가 많든 적든 언제나 일정한 음량의 목소리만 내는 그녀를 보면서 저것도 무슨 마법의 종류인가 의아해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목소리가 사람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마법이 걸린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다른 일이요? 아 시ㅂ...제발 설마 주방으로 가시란 말씀은 아니시겠죠. 전 식칼질은 젬병이에요 아시잖아요? 학우들에게 제 피와 살점을 맛보게 하실 생각은 아니시리라 믿습니다.”


희극처럼 과장된 어투의 마지막에 최대한의 불쾌한 표정과 애처로운 눈빛을 섞었음은 물론이다. 근신의 마지막 2주일을 주방에서 보낼 수는 없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가벼운 콧방귀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남은 근신은 없던 걸로 하겠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저 마녀의 입에서 저렇게 인자한 말이 나온 적이 있던가?


“와! 정말요!? 역시 부학회장님밖에 없-”


“대신.”

그녀가 무거운 어조로 나의 말을 끊는다.

이것은 전보다 확실하게 불길한 징조.

어쩐지 그녀에게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은데, 아아- 부디 내 착각이기를.


“왕명으로 공문이 내려왔는데 우리 쪽에서도 한 명 보내야 한다는구나. 학회장님과 내가 직접 너를 추천했단다. 지금 3학년 중에서 한가한 건 너밖에 없잖니.”


한가하다니 말씀이 심하시다. 의도적이었겠지 저 마녀 같은.......

물론 말도 안 되는 ‘규율’을 어겨서 근신 중이긴 하지만, 나도 나름 목표와 뜻을 세운 명예로운 학생인데 말이야. 아니 시발 애초에 방학 중에 한가한 년이 나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는.......


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어차피 나에게 선택권은 없을 것이다.

그래, 무엇이든 이 지루한 근신보다는 박진감 넘치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난 불안과 기대가 반반 섞인 표정으로 되물었다.


“보내다니....... 어디로요?”


그녀는 대답대신 ‘확실하게’ 얇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녀의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이나 보랏빛의 입술 때문이 아니었다. 괴팍함 그 자체만으로 유명한 그녀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상대방의 상황을, 지금껏 수없이 보고 들어왔으니까.



내 이름은 제르나비 고도.

카나반 왕립마법대학 ‘아스트로바톰’의 이론마법학과 3학년생.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고비가 다가오는 느낌이다.


작가의말

나눠져있던 프롤로그를 합쳤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여러분께 항상 감사의 마음을 지니겠습니다.

더불어 어색한 문장이나 오타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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