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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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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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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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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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막) 이름 (1)

DUMMY

‘철심장’의 돌진을 저지하기 위해 제국의 병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군마의 질주에 휘말린 날파리만큼이나 부질없고 처참한 죽음만을 남기고 있었다. 굳이 철퇴를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다리의 근육들과 영력이 실린 철심장의 도약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경로에 있던 제국병들의 사지를 찢어놓았으며 내장을 터트리고 있었으니까. 그의 주먹에 맞거나 발에 밟혀 머리가 터져버린 이들이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들은 성대가 갈라질 정도의 아찔한 비명을 내지르지 않아도 됐으니.

어윈은 말 그대로 지옥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실레마제국 제2군단장 베이어러빌 폰 인피에르노는 심기가 불편했다. 자신을 향해 직진으로 달려들고 있는 저 거대한 존재감의 기사가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군단장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참상을 공유하고 있던 댄 스파인이 다급하게 장검을 뽑아 들고 베이어의 곁으로 다가선다. 카나반에서 제국에 이르기까지 나름 기사로서의 명성만큼은 지켜왔다 자부하는 댄이었지만, 그런 그조차도 저 무지막지한 돌격 앞에서는 회피라는 단어를 먼저 꺼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이어는 굳은 얼굴로,

어느새 뽑아든 검을 흔들어 댄의 개입을 저지한다.


“댄, 그거 아십니까?”


“군단장님! 어서 피하-”


“제가 아버님의 이름과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음지에서만 웅크려있었던 진짜 이유 말입니다.”


철심장이 내딛는 걸음의 진동이 점점 현실이 되어 지면을 울리기 시작한다.


“다름 아닌 바로 그 이름과 혈통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뭘 하든 사람들은 베이어라는 이름 대신 아버님의 이름과, 그가 남긴 핏줄을 봤을 테니까요. 제 형제와 누이는 태어날 때부터 그걸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병사들의 핏줄기와 비명소리가 동시에 솟구친다. 눈이 마주치고 있었다.

철심장의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얕보이고 싶었습니다.”



달빛을 등진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온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껴뒀다는 듯, 어윈은 자신의 철퇴 ‘아몬둔’을 크게 치켜들고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하나의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단장씩이나 되는 인간이 어째서 별다른 호위 병력도 없이 몸이 굳어버린 부관 하나만을 데리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철퇴에 의해 분쇄되는 군단장의 몸뚱어리. 그것이야말로 어윈을 포함한 주변의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


당장이라도 언덕을 무너트릴 것만 같은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전장을 집어삼킨다. 철퇴가 내리꽂힌 바닥은 사방으로 온갖 돌조각과 흙더미를 흩뿌렸고, 그 후폭풍에 휘말려 귀가 잘려나가고 파편에 곳곳을 관통당한 병사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핏자국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군단장만 쓰러트리면 나머지는 알아서 와해될 것이다-. 당신들이 여태까지 2군단을 상대해왔던 방식이었죠. 실제로 잘 통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아버지의 후광으로 군단장직을 주워 먹은 햇병아리를 빠르게 제압해서 이전처럼 우위를 점할 생각이었나 본데.......”


일렁이는 어둠과 먼지 사이에서 나지막이 흐르는 목소리. 어윈은 공허한 감각만이 남아있는 손을 끌어당겨 제2격을 위해 철퇴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아몬둔’은 움직이지 않는다.

어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부동’은, 인위적인 것임을.


“잘못 판단하셨습니다, ‘철심장’ 어윈 아이언하트.”


상처하나 보이지 않는 몸과 제복. 여전히 희멀건 피부와 그와 상반되는 끔찍이도 깊게 어두운 눈동자. 어윈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성인남성과 비교해도 왜소한 체격의 베이어였지만,

어윈은 자신의 철퇴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청년이 밟고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판단은 네 몫이 아니겠지, 꼬마야.”


들어올리지 못한다면, 옆으로 빼내면 그만.

어윈은 특유의 괴력으로 측면을 뒤덮고 있던 모든 흙을 뒤엎으며 아몬둔을 순식간에 빼어낸다. 물론, 베이어는 그에 맞춰 발을 거두었기 때문에 중심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남은 것은, 다시금 마주치는 시선과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 베이어는 미소를 지었고, 잠복하고 있던 본부기사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집착하는 무모함은 그저 멍청함일 뿐입니다. 본인의 능력을 과신했음을 후회하며 저에게 대항한 첫 번째 이름으로 역사에 남아주세요.”


“.......”


어윈은 대답 없이, 철퇴를 크게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 위로 안착시킨다. 동시에 사방을 훑는 하나의 눈동자. 베이어는 눈앞의 남자가 지금 어떻게 날뛸지 계산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윈은 그런 남자이자 그런 기사이고,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변방에서 썩고 있었으니까.


“응?”


하지만

이어진 어윈의 행동은 베이어의 예상을 철저하게 부숴버린다.

그대로 뒤돌아서더니, 자신이 왔던 방향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뭣-”


“잡, 잡아라! 마법사들은 뭐하나?! 포격개시!”


당황한 댄의 외침에 기사들은 그제야 어윈의 뒤를 따라나섰고, 마찬가지로 대기하고 있던 전투마법사들이 동시에 마력을 내뿜었지만, 창과 총탄으로도 저지할 수 없었던 어윈에게 전투마법사들의 마력은 피부를 그을리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군단장님! 놈을 추격해야 합니다!”


댄의 말은 지금 상황에서 확실하게 어윈을 저지할 수 있는 인물이 베이어뿐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베이어는 그대로 선 채, 턱을 받치고서 가만히 어윈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데....... 어윈이라면 분명 죽더라도 싸울.......”


“군단장님!”


여전히 반응이 없다.

베이어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어윈은 다시 한 번 제국군의 군영을 휩쓸며 포위를 빠져나간 후였다.


“.......그런가.......그랬군.”


“군단장님?”


“댄, 저 남자는 저를 죽이기 위해 홀로 국경을 넘어온 것이 아닙니다.”


“.......예?”


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검을 되돌려놓는 베이어를 바라본다. 그에 군단장은 즐거운 듯이, 자신의 부관을 향해 몸을 돌려놓는다.


“철심장은 제 ‘기사로서의 역량’을 가늠해보기 위한 미끼였습니다.”


“미끼?”


“전장을 장악할 수 있는 무력은 분명히 군단장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저 철심장과 같이 기사로서 특출난 존재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를 훌륭하게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강한 적의 기사라도 우리 군단장이 처리할 수 있을 거다-’라는 믿음이지요. 그러나 이는 제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양날의 검이기도 합니다. 군단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그 군단장이 무너졌을 땐 군단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 쉬우니까요. 이러한 맹점을 알고 있기에 카나반은 ‘광기의 꽃잎’과 ‘붉은 장미’를 무너뜨리는 걸 중심으로 전략을 짰고, 이는 2군단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댄은 군단장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적이 다시 한 번 같은 전략을 쓸 거라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어윈의 도발이었겠지요. 정면으로 저와 싸우진 않았지만, 철심장은 아까의 일격 한 번으로 대충 제 역량을 파악한 겁니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철심장’이었기에, 저를 포함한 모두가 속은 셈이죠.”


입가로 새어 나오는 미소.

마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입술을 훑고 지나가는 새빨간 혀.

댄의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과는 별개로, 베이어는 모든 게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줄리아라는 인간, 생각보다 저를 더 즐겁게 해줄 것 같네요.”










“푸하아~!”


워낙 거대한 입과, 거대한 폐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였기에 앞에 있는 줄리아의 안경이 들썩인다. 그러나 눈앞의 상관에 대한 예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윈은 반쯤 남아있는 냉수통을 그대로 자신의 정수리에 부어버린다. 머리에선 투명한 물이었지만, 바닥에 떨어질 땐 붉은 기운을 잔뜩 품은 채였다. 그러나 줄리아는 그 붉은 기운이 어윈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냐는 질문을 생략할 수 있었다.


“추격은 없었습니까?”


“그래. 아니아니..., 네. 없었습니다. 기사 몇 명이 국경까지 쫓아오긴 했지만, 서너 놈 머리를 박살 내니 포기하던데요.”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그녀가 해야 할 유일한 질문.

“어땠습니까?”


무엇이, 또는 누가 어떠했는지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생수통을 내던지듯 내려놓은 어윈이 곧이어 자신의 철퇴를 꺼내 줄리아의 앞에 내려놓은 것이다.

줄리아는,

마치 높은 열과 충격에 의해 찌그러진 듯 구겨진 ‘아몬둔’의 한쪽 몸체를 볼 수 있었다.


“남들은 내가 자존심만 높은 고집불통으로 알고 있지만, 그건 오로지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인정할 필요가 적었기 때문이야. 아니, 입니다. 병법 쪽으로는 무식할지는 몰라도, 기사를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요. 뭐어, 눈이라기보다는 주먹이라고 해야겠지만.”


“.......”


줄리아는 숨을 삼킨다.

어윈의 입가에서 여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왕비님-, 나이트 마제스티가 필요할 겁니다.”




=======================




여기저기서 길고 길었던 밤이 저물고, 해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 햇빛을 고스란히 투과시키는 회의장의 분위기는 밤의 어둠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벽을 응시하고 있는 디미르와 홀덴,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리고 로빈.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대표들을 둘러보고 있는 크리스까지. 결국,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만 같은 침묵을 거두는 일은 크리스의 몫이었다.


“욘의 반응은요?”


“오전 중으로 상황을 파악할 조사단과 기사단을 파견한다고 답변을 해왔습니다.”


로빈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을 내어놓는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의 태도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선 날벼락 같은 소식이겠군요. 무역협회의 일로 출국한 줄 알았던 자국의 대통령이 갑자기 공화국의 수도에서 암살을 당하다니.......”


“그것도 가장 믿었던 부하의 손에 말이지.”


디미르의 첨언에 크리스는 말의 방향을 바꾼다.


“범인은?”


“지하감옥에 수감 중입니다. 어떠한 말도, 변명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어요.”


“고문이라도 해서 입을 벌리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감정이라고는 실려 있지 않은 크리스의 말에 회의실 안의 몇몇이 노골적으로 미간을 구긴다.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표정을 일그러뜨린 사람들 중의 하나인 드렌턴이 대신 내어놓는다.


“대통령께서 암살당하신 순간부터 이번 사건은 아르다르는 물론이고 여러분의 손을 떠난 셈입니다. 욘에서 이미 공식적인 서한을 통해 이번 사건에 카나반당국을 포함한 어떠한 세력의 개입도 허가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밝혀왔습니다.”


“우리에게 책임은 묻지 않겠지만, 동시에 끼어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시겠다?”

짧은 한숨과 함께 턱을 쓰다듬는 브린타이나의 국왕.

“이상한데?”


“욘 당국의 반응보다도, 지금 동맹에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로 동맹과 욘과의 접점이라곤 오로지 그륜 대통령과 그의 경호실장뿐이었는데, 그 둘을 한꺼번에, 그것도 최악의 방식으로 잃었다는 겁니다. 어제 그륜 대통령께서 직접 언급하신 자금에 관한 문제는 물론이고, 동맹의 기틀 그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로빈의 말에, 니에브 공국의 대공 홀덴이 몸을 앞으로 숙인다.


“나머지 하나는?”


“침묵의 기사단입니다. 저와 왕비를 향했던 암살미수 이후로는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그들이 어제와 오늘 밤,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그들의 존재감을 내보였죠. 저는 이게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


또다시 침묵에 휩싸이는 회의실. 비통함과 근심, 심지어는 짜증까지 교차했지만, 가장 큰 폭탄의 뇌관은 크리스의 입에서 비롯된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가는 크리스.

“어제 그륜 대통령을 향한 암살 미수와 납치까지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그륜은 그것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선포했었죠.”


“네, 그 자리엔 범인인 재규 경도 함께 있었죠.”


그러나 로빈의 대답은, 크리스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경호실장은 ‘그들’이 감시역으로 대통령에게 붙여둔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대통령이 자신의 뜻을 피력하자마자 침실로 찾아가 그를 죽여 버린다? 경호실장에게 그런 결정을 할 권한이 있었을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공화국의 총리, 마누앙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모양. 그러나 카나반 총리의 날 선 시선과 목소리에도 크리스는 멈추지 않는다.


“경호실장은 ‘중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고, 그에 따른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죠. 하지만 어떠한 전문의 발송도 없이, 그렇게나 빠르게 암살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가 보고를 해야 할 대상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바로 이 자리에 말이죠.”


“.......”


이것은 무례일까, 아니면 합당한 의심일까.

여기서 무작정 화를 내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구에 서있던 드렌턴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어야 했다.


“브린타이나의 국왕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아우로라’일 거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저번 암살범의 심문과정에서 ‘아우로라’는 여성이라는 증언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성은 제 옆에 서있는 근위기사 유진 중위와 론크리스 폐하, 둘뿐입니다만.”


“저는 아닌데요?”


“유진 중위도 아닙니다.”


“확신합니까?”


“확신합니다.”


맞부딪치는 드렌턴과 크리스의 시선. 난감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유진을 대신하여, 로빈이 중재에 나선다.


“말씀하신 의미는 알겠습니다만, 유진 중위는 어젯밤 내내 드렌턴 경과 함께 저와 왕비의 침실에서 경계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론크리스 폐하를 의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네요.”


“그렇다면 본궁 전체를 뒤져야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번 사건에 대한 전권은 욘 정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크리스 폐하도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걸로 욘은 동맹에서 탈퇴, 우리의 적이 되어 뒤통수를 노리게 되겠군요. 이게 정말로 그대가 원하는 바입니까, 로빈슨 폐하?”


“.......”


크리스의 주장은 간단했다. 그저 손 놓고 보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모두가 그녀가 말하는 바를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폐하.”

노크와 함께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셰르.

“마즈다힐로부터의 전문입니다.”


“아, 고마워.”


봉투를 받자마자 가벼운 영력을 흘려 넣어 봉인을 해제한 뒤, 빠르게 내용을 훑기 시작하는 로빈. 그러나 그 내용을 모두 읽은 그의 표정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굳어간다.


“왜 그러십니까?”


크리스의 질문에, 로빈은 깊은 한숨으로 대답을 시작한다.


“오늘 새벽, 마즈다힐의 지휘관이 국경 근처로 진군해온 제국 2군단을 향해 독단적으로 군사작전을 시행했습니다. 정면충돌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는군요.”


“2군단?”


“우검성의 찌꺼기놈이 움직이는 모양이군.”


크리스와 홀덴의 연속된 반응. 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과의 말을 꺼낸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총리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후우.......”


밤을 꼬박 새운 것에서 오는 피곤의 한숨이 아니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자신의 의자에 몸을 던지는 왕의 탄식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것보다도 무거운 책무의 한숨이었다.

“론크리스왕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대로 욘 정부에 모든 사건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런 로빈에게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총리의 목소리. 왕의 탄식이 이어진다.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만약 여기서 제가 협조를 거부하면, 그들은 이 사실을 빌미로 욘 정부를 움직여 그륜 대통령이 만들어놓았던 동맹의 기반을 싸그리 부수려 하겠죠. 물론, 가만히 손을 놓고 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이곳에 파견될 욘 조사단의 신분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조사단의 일원인지, 아니면 ‘침묵’의 일원일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후자라면, 동맹에게 남은 건 오직 몇 시간밖에 없겠군요.”


“ ‘아우로라’.......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잖아요. 본궁에 상주하는 여성이라는 단서밖에 없는데, 애초에 범인의 신분이 무엇인지, 애초에 여자인 것은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잖아요.”


“.......폐하, “마즈다힐의 문제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알아요.”


“거부하실 생각이시겠죠.”


“.......하지만.......”


줄리아가 로빈에게 보낸 전문. 모두의 앞에선 단순한 ‘지원요청’이라 밝혔지만, 사실 줄리아가 원한 ‘지원’은 오직 하나, 아니, 오직 ‘한 명’이었다.


“출산을 앞두시고 계신데다가 ‘침묵’이 본격적으로 움직였으니 불안하신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나이트 마제스티’. 폐하의 이름으로 검을 드는 공화국의 기사. 특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본인도 그리 말씀하셨지요.”


“네에, 정확히는, 자길 안 보내면 둘째는 없을 줄 알라고 협박했었죠.......”


“그녀는 강합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


자신이 굳게 마음을 먹는다면 거대한 두 가지의 문제 중 하나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만큼은,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


“.......폐하.”


“예?”


“내부조사에 대한 것입니다만.”



그리고 이 주름이 많고 메마른 총리는,

왕의 근심을 향해

한 줌의 빛을 뿌려준다.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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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29막) 빛과 진실이 흐르는 땅에 그 아이의 이름이 울려 퍼지기를 (2) +6 17.09.01 253 10 16쪽
315 (29막) 빛과 진실이 흐르는 땅에 그 아이의 이름이 울려 퍼지기를 (1) +3 17.08.28 232 10 31쪽
314 (막간) 방랑의 종착지 +4 17.08.23 258 13 18쪽
313 (28막) 이름 (12) +6 17.08.18 219 11 13쪽
312 (28막) 이름 (11) +4 17.08.13 259 9 14쪽
311 (28막) 이름 (10) +8 17.08.08 226 9 14쪽
310 (28막) 이름 (9) +8 17.08.02 257 10 21쪽
309 (28막) 이름 (8) +8 17.07.28 284 9 18쪽
308 (28막) 이름 (7) +4 17.07.23 226 6 15쪽
307 (28막) 이름 (6) +3 17.07.18 262 9 14쪽
306 (28막) 이름 (5) +6 17.07.13 246 9 13쪽
305 (28막) 이름 (4) +8 17.07.08 252 9 15쪽
304 (28막) 이름 (3) +4 17.07.03 241 11 13쪽
303 (28막) 이름 (2) +6 17.06.28 228 9 14쪽
» (28막) 이름 (1) +2 17.06.23 273 10 19쪽
301 (막간) 그가 웃기 전에, 그리고 웃은 후에 +3 17.06.18 261 9 10쪽
300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11) +9 17.06.13 288 11 18쪽
299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10) +1 17.06.08 251 11 14쪽
298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9) +2 17.06.03 247 10 13쪽
297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8) +2 17.05.29 339 7 14쪽
296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7) +2 17.05.24 285 9 12쪽
295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6) +3 17.05.20 252 6 15쪽
294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5) +5 17.05.14 290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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