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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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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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06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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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DUMMY

“뭣들 하는 거냐?! 나우베르와의 통신은 어찌 되었나?! 도대체 왜 저기서 묶여있는 거야?!”


에밀리오는 당장이라도 직접 전장으로 뛰쳐나갈 듯한 기세로 분노를 내뿜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적의 예비대를 돌파하지 못하고 저지당한 기병대. 거기에 곧바로 기병대 지휘관과의 통신이 두절되었으니, 그로서는 답답함에 이성이 무너질 노릇.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있는 지휘관들을 대신하여 통신병 하나가 침묵을 깨트리며 말 아래 무릎을 꿇는다.


“장군! 적의 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뭣?”

더욱 골이 깊어지는 에밀리오의 미간.

“방향은? 어딜 향해 움직이나?”


“그게....... 적 중앙군의 후방입니다.”


“.......중앙군의 후방?”


에밀리오를 포함한 모든 지휘관들의 표정이 같은 의문으로 물든다.

이런 개활지에서 기병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특별하다. 때문에 먼저 움직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내놓은 기병대가 본연의 임무는커녕 도리어 제압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제국군의 입장에선 꽤나 뼈아픈 손실. 그런데 상대방 기병대의 절반을 예비대만으로 무력화시켰음에도 자신들의 기병을 측면으로 우회시키지 않는다? 베르달군의 이러한 선택은, 제국군의 지휘관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전술 운용이었다.

모두가 ‘왜?’라는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중, 오직 한 명만이 빠르게 분석을 내어놓는다.


“이 움직임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근원을 쫓아 댄 스파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에 만족했는지, 댄은 곧바로 설명을 이어나간다.

“우선, 적이 자신들의 기병대가 가지고 있는 전투력이 이쪽 기병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경우입니다. 왕을 미끼로 대기병전에 특화된 예비대를 내놓아 이쪽의 모든 기병전력을 묶어두려 했지만, 절반이 아직 남아있기에 나머지 기병대의 움직임을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기만책을 쓴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불편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댄을 재촉하는 에밀리오. 그러나 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전장을 내려다보면서 뜸을 들인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에밀리오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그의 곁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불가능에 가깝지만, 아군의 품속으로 깊숙이 침투해온 카나반의 중앙군, 그 후속타를 노리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뭐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에밀리오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본래 기병대의 역할이라 함은 그 기동력에서 나오는 파괴력과 돌파력으로 적의 보병을 제압하고 와해시키는 데 있다. 그런데 만약 그 경로에 밀집한 아군이 있다면, 제대로 된 속도를 낼 수도 없거니와 돌파를 위한 대열을 유지하기에도 벅차다.

정말로 카나반의 지휘관이 제국군의 품으로 파고든 중앙군의 후방지원을 위해 기병대를 동원하려는 것이라면, 예비대와 기병대의 역할을 뒤바꾸려는 그 선택은 비웃음을 받아도 마땅할 터.

그러나 댄의 표정은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장군님, 지금 봐야 할 것은 적 기병대의 움직임이 아니라 중앙군입니다.”


“중앙군.......?”


“무모한 돌진으로 적의 선봉을 포함한 중앙군은 아군에게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헌데 만약 지금의 상태가 그들이 의도한 것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의도적으로 포위당하는 미친 지휘관이 어디 있나? 눈이 있다면 전황을 보게! 놈들의 돌파는 이미 기세가 꺾였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기병대 따위가 구원해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댄에게 향하는 에밀리오의 시선은 이미 적군이라도 바라보는 듯 혐오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댄은 추가적으로 의견을 내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런 상관의 눈동자를 알아채고 말을 삼켜야 했다. 에밀리오에게 댄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결국 최종적인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으며, 그 선택이 이 전투를 승리로 되돌릴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쥬넨 대령에게 전해라! 지금 기병대를 이끌고 적 좌익 측면을 유린할 것! 아군 예비대는 나우베르 중령을 구원하고 카나반 왕의 목을 따온다! 다말론 장군이 예비대를 이끌어 주시오!”


“옛!”


제국군의 본진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에밀리오의 선택에 의문을 품는 자는 없었다. 70년 동안 전장에서 숨쉬어왔던 그의 시선을 불신하는 부하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댄 만큼은, 깊어가는 혼란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말을 씹고 있었다.


“.......구원이라....... ‘흐름’의 후예가, 과연 구원을 바라고 사지에 몸을 던진 것일까.......”





=============




포위라는 상황은 절망스럽다. 아군의 시체를 밟으며 물러나고 물러나도,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들이대는 야수들의 압박은 느슨해지질 않는다. 도망치고 싶어도 퇴로는 존재하지 않고, 투항하여도 손쉬운 먹잇감이 될 뿐. 마법사들의 보호막이 언제까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포격들을 막아줄지, 자기 몸의 절반을 방패로 가려주고 있는 동료가 언제까지 곁에 서있을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안한 불확실성들이자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죽음의 밀물이다.


“무너지지 마라! 밀려나지 마라! 니새끼들이 진정한 베르달의 용사라면, 여기서 증명을 해봐!”


그러나 베르달의 용사들은 꺾이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군의 압박이 심해질수록 더욱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고 저항한다. 제국의 기사가 단결의 벽을 허물기 위해 파고들면, 그 공백을 베르달의 기사가 나서서 목숨을 다해 지켜낸다. 병사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제국기사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기사가 달려들어 마무리. 베르달의 병사들은 어떻게 서고 어떻게 막고 어떻게 싸워야 아군의 기사들이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는지 실전으로 숙달해온 자들이었다.

‘늑대의 딸’ 올리는, 그런 베르달 용사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그런 베르달 용사들로부터 가장 큰 신뢰를 받고 있는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대장!”


그 간단한 호칭만으로도 올리의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난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도약하여 자신을 부른 용사의 대열로 뛰어든다. 용사는 다가온 올리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는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제국기사의 검을 상대의 손과 함께 붙든 채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기량만으로는 반도 최강의 평가를 받는 제국의 정규기사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기사에게 겁 없이 달려드는 병사는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제국기사는 크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올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 병사의 머리와 제국기사의 머리 위로 자신의 월도를 내리친다. 이미 날이 상할 대로 상한 월도는 검이라기보다는 철퇴에 가까웠기에 용사와 제국기사의 머리는 뭉개짐과 동시에 사방으로 두개골의 파편을 튕겨낸다.

기이하게도, 그 광경을 바라본 제국군은 질색을, 베르달의 용사들은 환호를 터트린다.

제국기사와 동반으로 떨어져 나간 용사의 빈자리는 어느새 다른 용사의 몸뚱이로 가로막힌 채였다. 짤막한 임무를 마치고 대열에서 물러나는 올리. 곡도는 물론이고 의수의 관절 또한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가죽갑옷은 대부분 뜯겨나가 적군의 피로 반짝이는 한쪽 가슴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방금과 같은 일격을 몇 번이나 날린 건지 셀 수조차 없다. 올리는 본래 감성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베르달숲과 바크달룬성에서 평생을 함께 해왔던 자들이기에 그들의 신음과 비명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목구멍에 박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피를 쏟아내는 심정으로 영력을 담은 고함을 멈추지 않고 내지른다.


“짜식들아! 조금은 근성이 보이고 있다! 밀리는 새끼는 내가 직접 거시기를 도려낼 거야!”


건장한 성인 남성보다도 한 뼘은 더 커다란 덩치의 그녀였기에, 그 존재감은 제국군에게도 쉽게 식별될 수 있을 정도로 돋보였다. 혼란의 와중에 그녀에게 집중되는 화살과 마법, 그리고 총탄들. 하지만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베르달의 병사들은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생명을 내어놓는다. 물론 올리가 이들을 막아낼 여력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혹시나 모를 작은 가능성’을 위해, 그들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고 있었다.


“대장! 기병대가 움직였데!”


한 베르달의 용사가 반대 방향으로 꺾인 의수의 새끼손가락을 뒤틀어 버려버리는 올리에게 다가서며 외쳤다. 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주변을 둘러본다.


“왕비님은?”


“위치에서 대기하고 계셔!”


“좋아, 대장들한테 전해. 내가 신호하면 작전 시작이니까, 제대로 긴장 빨고 있으라고.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말발굽에 치여서 뒤지고 싶지 않으면 실수하지 말라고 똑똑히 전해. 알았어? 아 그리고 감청당하면 안 되니까 발로 뛰면서 전파하고.”


“내가 신삥이냐? 그 정도는 알아.”


“좋다고 뛰어다니다가 쳐맞지나 말아라.”


크게 웃으며 혼란 속으로 사라지는 용사. 올리는 남아있는 윤활유를 모두 짜내 의수에 쏟아부으면서, 크게 숨을 들이킨다.

가장 이곳에 서있고 싶어 했던 ‘엄마’를 대신하여 이곳에 와있다. 그녀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기 위해서 앞니가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이제, 그 시작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올리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남서쪽으로 기울어진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그녀에게 향하는 공격마법을 대신 맞은 용사의 머리가 터져도, 귓가에 총알이 스쳐도,

그녀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올리의 신호, 그 하나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용사들은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한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의 홍수 속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높은 시야.

혼란의 정점을 찍고 있는 그 끝에서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

지평선에서 피어오르는 먼지 바람.


올리는,

망설이지 않는다.



“지금이야!”








“저건.......”


전장을 크게 우회하여 베르달군의 좌익으로 내달리던 쥬넨의 눈에 이상한 기류가 잡힌다.


“대령님! 적의 중앙군이 후퇴하려나 봅니다! 퇴로를 개척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같은 장면을 잡아낸 부관이 쥬넨의 곁으로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돌파를 시도해온 중앙군이 후퇴한다는 것은, 즉 적의 본대로 향하는 길이 개척된다는 사실을 의미했기에 부관은 지금의 상황을 승기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후퇴.......? 아니다, 저건 후퇴를 가장한....... 간격을 벌리고 있잖나.”


“패퇴하는 적의 간격이 난잡하게 되는 건 흔한 일이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도 우리 군이 압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측면을 찌르면, 에밀리오 장군님의 생각대로 적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될 겁니다!”


“.......”


부관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쥬넨의 먹색 눈동자에 깃든 의심의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침묵을 가만히 지켜보던 부관은, 낮은 목소리와 함께 쥬넨의 곁에 자신의 말을 가까이 붙여놓는다.


“대령님은 장군님의 명령만 따르시면 됩니다. 상관의 명령에는 목숨을 다해 복종. 그것이 제국군의 군율입니다. 만약 자신의 지휘관이 총사령관의 선택에 의심을 품는다면, 저와 부관들은 지휘관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 아닙니다. 사실을 알려드릴 뿐입니다.”


“......그렇겠지.”

어느덧 중앙군의 모습이 희미해지고, 저 멀리 치열하게 전투 중인 베르달군의 좌익과 제국군의 우익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베르달군은 이제야 제국기병대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허겁지겁 창벽을 세우고 대열을 만들어 제압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우베르 중령이 당했던 일이 반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쥬넨은 신중함을 잃지 않는다.

“둘로 나뉜다. 내가 적의 바로 앞에서 말머리를 돌려 후방으로 교란하겠다. 너희는 놈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서 송곳처럼 파고들어라. 나머지는 아군 보병이 알아서 해줄 거다.”


“옛!”


정황상 베르달군의 좌익이 이쪽의 기병대를 당해낼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는 커질 테고,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좌익은 무너지고 본대가 노출될 것이다. 그곳에 말발굽이 닿는다면 전투는 끝.

그럼에도,

쥬넨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간격이 벌어지게 둬!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틀어막기만 하면 된다!”


돌파해온 베르달 중앙군의 후방을 봉쇄하고 있던 제국의 지휘관은 갑자기 이쪽으로 머리를 돌린 베르달군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저 움직임은 퇴각을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다. 게다가 퇴각명령으로 인한 혼란 때문인지, 적은 후방 쪽이 아닌 양옆으로 간격을 벌리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비대가 동원됐겠지만, 그들을 대신하여 접근 중인 무리는 베르달의 어설픈 기병대. 아군이 밀집된 지역을 말을 타고 돌파할 수는 없으니, 지금 기병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쪽을 위협하기 위해 말을 타고 알짱거리다 입맛을 다시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지휘관은 잘 알고 있었다.


“중대장님! 적의 기병대가 접근합니다!”


“하핫! 카나반의 개새끼들도 참 불쌍하군! 자기들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놈들이 쓸모없는 기병대였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대열을 정비하고 창벽을 세우시겠습니까?”


부관의 물음에, 지휘관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그럴 필요 없다! 놈들은 돌진해오지 못해! 이 상황에서 속도를 붙여 우리를 돌파하려고 하면 도리어 피해를 입는 것은 안에 있는 베르달 잡년들이다! 외곽에서 입맛만 다시고 있을 테니, 화력으로 견제만 해!”


“옛!”


짤막한 명령 뒤에 지휘관을 시선은 다시금 혼란이 가득한 포위망으로 향한다. 점점 벌어지는 간격과,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방어벽. 승기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확신하는 풍경이었다.


“주.......중대장님?”


“뭐야, 왜?”


다가올 진급의 기분을 만끽하는 걸 방해받은 것이 불쾌했는지, 부관을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부관의 공허한 표정이었다.


“.......적의 기병대가 돌진해옵니다만......?”


“뭐어?!”

다급하게 부관을 밀치고 망원경을 뺏어드는 중대장. 동시에, 그 또한 경악의 비명을 내지른다.

“저것들이 미쳤나?! 아군까지 짓밟을 생각인가?! 아, 알았다! 저건 허세다! 우리가 물러나길 기대하고 있는 거야!”


“중대장님 하지만-”


“얕은 수다! 포위를 풀지 마라! 사격으로 견제하면 금방 포기하고 돌아갈 거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망원경에 비친 기병의 무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흐려지고 있었다.


“중대장님!”


“가만히 있어! 대열을 유지해!”


그림자가 다가오고,

쏟아지는 공격마법과 총탄을 모두 튕겨내는 보호막의 존재가 육안으로 확인된다.

기병대의 선두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늑대’의 모습까지 확인되고 있었지만, 중대장은 떨리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먼저 쪼는 쪽이 지는 거다!”


“중대장니임!!!”



제국군을 짓밟으며 뛰어오르는 늑대의 흑마.

그의 검에 잘려 허공으로 치솟는 와중에도,

중대장의 얼굴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포위당한 베르달군의 후방으로 치고 들어온 기병대를 바라보며,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모두가 같은 예상을 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밀고 들어온 저 기병대가 이제 베르달 중앙군의 후미를 짓밟고 그제야 실수를 깨달을 것이라고.

그리고 아군과 얽혀 속도를 잃은 기병대만큼 쉬운 먹잇감은 없을 것이라고.

어설픈 기병의 운용이 낳을 수 있는 최악의 참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처음부터 완전히 빗나가고 만다.


방향을 바꾸지도,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그대로 아군의 대열로 뛰어드는 베르달의 기병대.


적이 자초한 장면이지만 제국군은 경악에 빠진다. 이제 곧 말에 치이고 밟힌 자들의 비명으로 전장이 얼룩질 것이다. 비록 지긋지긋한 놈들이지만, 이런 형태로 죽어나가는 것에 대해 동정을 표하는 자들도 있었다.





“저런 자폭을 하다니! 카나반의 왕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입니다!”


에밀리오의 곁을 지키고 있던 장군과 지휘관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중이었다. 물론, 에밀리오의 표정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쪽이 절반의 기병대만 내보낼 줄은 몰랐던 것이지. 성과도 없이 지 부인이 고립되니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군을 움직인 모양이다. 참으로 어리석군.”


“중앙군과 기병대를 함께 싸먹고, 좌익은 예비대로, 우익은 남은 기병대로 정리될 겁니다. 승리를 축하합니다, 에밀리오 장군님. 이제 카나반 왕의 목만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군요.”


“여러분들 덕이오. 군단장님도 기뻐하실 거요.”


술잔만 없을 뿐이지, 이미 승리의 축제라도 벌어진 듯한 지휘부의 분위기.

그 들뜬 목소리들 사이로, 어색한 무게의 음색이 모두의 흥을 집어삼키며 솟아오른다.


“적의 속도가 줄지 않고 있습니다.”


“음?”


역시나 불쾌한 얼굴로 댄을 바라보는 에밀리오. 댄은 그의 시선을 받자, 다시 한 번 전장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시선을 촉구한다.


“적의 기병대 말입니다. 아군을 짓밟고 있는 것치고는 속도가 전혀 줄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적이랑 아군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인가 보지! 댄 장군은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소?”


에밀리오를 대신하여 장군 하나가 나서서 댄에게 핀잔을 준다. 그러나 댄은 그런 그녀에게 답은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고 턱을 만지며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시당한 것에 여장군이 역정을 내려는 순간, 댄은 급격하게 미간을 구기며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통신병에게 손짓을 한다.


“적의 기병대가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아있는지 보고하라 일러라.”


“옛.”


“흔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댄의 돌발행동에 쏟아지는 모든 적대적인 시선을 가로막으며 에밀리오가 댄에게 다가와 묻는다.


“장군, 잘 버티던 적이 갑자기 퇴각하는 척 좌우로 간격을 넓히고 방어벽을 허술하게 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뭐라고?”


에밀리오의 뒤틀린 목소리는, 다급하게 돌아온 통신병의 보고에 의해 간단하게 묻힌다.


“자, 장군님! 아,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적의 기병대가 지나간 자리에, 놈들의 시체는커녕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의 보고를 듣는 순간,

댄 스파인은 에밀리오를 향해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크게 외쳤다.




“장군! 지금 당장 기병대와 예비대를 복귀시키십시오!!”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적의 중앙군을 덮쳐온 베르달의 기병대들. 그 막무가내의 돌격에 상대인 자신들조차 움찔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기에 급할 것이 없었다. 짓밟힌 베르달의 중앙군은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나뒹굴 것이고, 아군이라는 저지물에 가로막힌 기병대는 곧 속도를 잃고 멈춰 설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기병대의 속도는 줄어들질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베르달군의 시체는커녕, 버려진 무기나 장비조차도 보이질 않는다.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송곳처럼 돌파해온 기병대 진형의 내부에는, 주인이 없는, 오직 군마들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포위되어 있던 베르달의 중앙군들이, 마치 휴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대열에 흡수되어 ‘기병’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칫 잘못했다간 대열 자체가 무너지고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마치 곡예와도 같은 이 ‘작전’을, 제국군의 그 어떤 이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이 멈추질 않습니다! 돌진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통신병의 절망스러운 보고와 함께,

베르달 기병대의 꼭짓점이 대여섯 명의 제국군을 공중으로 휘날리며 평원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에밀리오와 그의 장군들이 지켜보고 있는 본대를 향해, 더욱 박차를 가하며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에밀리오는 그 꼭짓점의 존재를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다.




제국군의 피로 물든 황금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대한 태양 하나가 이쪽을 향해 검은 불꽃을 불태우며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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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8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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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8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5 12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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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4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6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4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2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2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7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4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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