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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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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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2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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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DUMMY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셨죠.”


“흠, 방심하지는 마라, 작은 왕. 이런 군중 사이의 암살자는 그 누구도 판별하기 어렵다.”

축축한 새벽공기가 채 가시지 않고 눌러앉은 이른 아침. 귀족파의 항복에 가까운 환영 통신을 받고서 밤새 달려와 도착한 곳, 카나반의 수도 회색도시 아르다르 북동쪽 성문에는 크라트가 오는 내내 경고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활짝 열려있는 육중한 성문과 몰려든 기자단, 그리고 신문에서만 봤던 왕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나와 있는 수많은 인파. 그들은 저 멀리 지평선에서 잔뜩 긴장한 채 군세를 이끌고 나타난 로빈의 그림자에 떠들썩거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어떻게 할 거냐, 왕? 위험이 남아있다고 판단되면 잠시 외곽에 주둔하는 것도 괜찮다.”


“아뇨, 이대로 입성하죠.”


로빈은 미소와 함께 그대로 말을 몰고 앞으로 나아간다. 크라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따를 뿐, 그 누구도 더 이상 그의 발걸음을 막지 않는다.

성문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로빈은 몰려있는 군중의 실체를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성문에서 통하는 도로 양쪽으로 근위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몰려드는 기자와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었고, 연신 터지고 있는 사진기의 불빛을 등진 채, 성문 바로 아래에서 로빈을 기다리는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소매가 매우 넓은 붉은 비단옷과 단정하게 머리를 꼬아서 말아 올린, 기품이 넘치는 귀족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로빈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음에도 그가 충분히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천천히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린다.


“입성을 환영합니다, 전하. 라즈팔라무스 가문의 가주이자 왕당파 귀족대표, 라즈팔라무스 오로메라고 합니다. 18년간의 혼란과 공백에 말로를 선언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오로메, 이 환영식은 당신의 생각인가?”


로빈의 대답 대신,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크라트의 푸른 눈동자였다. ‘늑대’를 살며시 올려다보는 오로메의 입가에 얇은 주름과 함께 미소가 번진다.


“이런, 니바르토가의 문제아께서 돌아오셨군요. 전하를 보조해주신 은의에 대신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질문에 답을 하자면, 이 환영식은 근위대장의 생각인지라, 자세한 것은 저도 잘······.”


“쥬넨?”


크라트의 차가운 시선이 그제야 멀리서 다가오는 조카의 얼굴을 찾아낸다. 자신의 형과 쏙 빼닮은, 특유의 먹색 눈동자. 도무지 귀여워할 수가 없는 인상이라고 생각하며, 크라트는 조심스럽게 가죽옷에 감춰진 자신의 검으로 손을 가져간다.


“근위대장, 쥬넨 니바르토입니다. 왕자님의 입성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전날의 무례는 부디 용서하시길.”


“아, 아닙니다. 그때는 서로 몰랐으니······.”


첫 만남에 대한 쥬넨의 정중한 사과. 하지만 로빈을 비롯한 이 자리의 모두는, 특히 그의 삼촌인 크라트는 쥬넨이 진정으로 왕자를 환영하고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왕자의 한마디만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귀족파의 운명이 끝장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켜보는 기자와 시민들마저도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 순간, 쥬넨은 오로지 자신과 왕자의 간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와,

그에 따른 영력의 파동을 크라트가 눈치채지 못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허리에 차고 있는 이스누시아산 연철검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뽑힐 준비가 되어있었다. 로빈의 뒤로 나타난 아뮤르와 스파인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왕자가 저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앞으로 움직여주기만 한다면-


“입성을 환영합니다. 전하.”

서늘한 분위기를 덮으며 들려오는 낮고 익숙한 목소리.

쥬넨은 순간 몸이 굳어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보랏빛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귀족파 대표이자, 섭정의 자리를 맡고 있던 마누앙 니바르토라고 합니다. 구면이긴 합니다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오로메와 마찬가지로 소매가 넓은 깔끔한 붉은 비단옷 위에 붉은 탕나무가 수놓인 회색 망토.

마누앙은 살며시 아들의 곁으로 다가와 로빈에게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린다. 그야말로 모든 기자들의 사진기가 불을 뿜는 순간이었다. 굳은 표정의 아들 머리 위로 얼굴을 들며, 마누앙이 느긋한 몸짓으로 말 위의 로빈을 올려다본다.

“마침내 본래 주인에게 자리를 넘겨드리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이곳은 다소 소란스러우니, 본궁으로 가셔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


오로메의 미소 가득한 얼굴이 마누앙과 마주친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딱히 그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마누앙은 별 반응 없이, 조용히 옆으로 비켜서며 로빈에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를 지나치며 내려다보는 로빈의 검붉은 눈에는, 복잡하면서도 수많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




굳건한 문이 열리고 로빈이 들어서자, 소란스러웠던 회의실은 순식간에 집중되는 시선으로 침묵에 휩싸인다.

광대한 숲과 그 위를 비행하는 사도의 모습이 새겨진 높은 천장 아래로 수많은 샹들리에와 조명이 눈부신 곳이었다. 붉은 탕나무 휘장이 새겨진 기다란 탁자의 양쪽엔 천장까지 닿아있는 불투명한 색유리들이 저마다 다채로운 색상으로 태양빛을 투과시켜 찬란함을 더했고, 그 탁자의 끝에 마련된 로빈의 자리 뒤로는 커다란 붉은 탕나무 문양이 펄럭이고 있었다.

로빈은 모두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으나, 워낙 탁자가 길었던 탓에 자신이 움직이는 그 긴 시간 동안 계속 쫓아오는 시선들은 결국 그에게 불편함을 선사하고 만다. 의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익숙지 않은 얼굴들에 둘러싸인 지금 상황이 너무도 어색한 그였다.


‘벤이나, 지나라도 있었으면······-’


이 순간 가장 그리운 두 얼굴을 떠올리지만, 귀족파와 왕당파, 그리고 왕자인 자신만이 허락된 자리였기에 부질없는 그리움이었다. 그 크라트마저 거부한 자리였으니, 로빈의 부담은 배가 되어 그를 죄일 수밖에.

로빈이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바로 오른쪽에 앉아있던, 익숙하지만 결코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야당을 대신하여, 왕자님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몇 가지 안건에 대해 먼저 상조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 얼굴도 두껍지! 당장 감옥에 가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상조?”


왕당파 귀족이 위치한 오른쪽 자리에서 마누앙을 향한 조소가 터져 나왔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며 로빈은 자신의 왼쪽에 앉은 오로메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사글사글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이 소란에 대해 어떠한 제지도 가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제 부덕과 위법성에 있어서는 차후 정당하게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빠르게 처리되어야 할 일이 바로 권력이양입니다. 일단 전하께서 정식으로 왕좌에 오르시고 나면, 그땐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질 터이니 너무 성급하게 구시진 마시길.”


“쳇! 말은 잘하는군.”


마누앙은 특유의 깊은 눈빛으로 청중을 훑고 난 후, 다시금 로빈을 향해 입을 연다.


“우선 당장 대관식의 날짜를 잡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정식으로 왕가의 핏줄임을 증명하신 뒤, 곧바로 왕좌에 오르시는 것으로 모든 절차를 시작해야 합니다.”


“대관식이라······, 어떤 식으로 절 증명해야 하죠?”


증명은 중요한 절차다. 크라트와 마누앙이라는 니바르토 가문의 두 기둥이 각자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로빈이 왕가의 핏줄임을 주장하고 나섰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윗사람’들의 사정일 뿐.

마누앙의 말처럼, 의회를 포함한 본궁의 모든 인원과 아르다르, 나아가선 공화국의 모든 국민에게 로빈이 진정한 ‘미트라블루스’의 혈통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시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증명’의 방식이 궁금했던 로빈의 물음에, 대답은 오로메에게서 나온다.


“왕립교회에서 식을 올리게 됩니다. 숲에게 축복받은 성수를 황금으로 만든 대야에 부은 뒤, 전하께서 직접 기도를 올리시고 전하의 피를 한 방울 떨어트리시면 우리 공화국이 국가의 사도(使徒)로 모시고 있는, ‘숲을 관장하는 사도’ 세뮈엘님이 강림하시어 축복을 내리실 겁니다.”


“그 뒤에 곧바로 즉위식을 올리게 됩니다. 동시에 제가 지난 18년간 대리로 수행해온 모든 권리가 폐지되는 것이니, 중앙군통수권을 비롯하여 제 이름으로 수행한 모든 입법, 사법권에 대한 재평가를 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루디 드렌턴과 벤이라는 마법사를 사면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로빈은 마누앙과 눈이 마주친다. 그의 깊은 먹색 눈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로빈은 그에게 증오를 느끼기보다는 아저씨가 무사하다는 생각에 먼저 안도감이 들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마누앙이 다시 입을 여는 것을 허락했다.

“왕가의 핏줄을 멋대로 숨기고, 또한 그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그들을 국가반역죄라고 판단한 건 어디까지나 제 독단적인 의지였으니, 이를 비롯하여 지난 18년간의 제 행적을 자세히 검토해보시고 저에 대한 처벌도 같이 결정하시면 됩니다. 동시에 제가 꾸린 내각도 다시 재편성하셔야 하고, 원하신다면 근위대장과 장군들의 처우도 다시 정하십시오.”


“제 아버지와 형제들에 대한 죄는 누구에게 물어야 맞습니까? 아니, 애초에 제가 그것을 따질 수가 있을까요?”


뼈가 담긴 로빈의 질문에, 귀족파의 모든 귀족들은 등줄기가 싸늘해짐을 느끼며 침을 삼킨다. 그중에서도 가슈펠라르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당장이라도 목이 떨어질 것만 같은 가시방석 위에서 불가시의 공포에 짓눌려야 했다. 하지만 대답하는 마누앙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원하신다면 그 죄를 물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윌리안 가슈펠라르와 직접 그 살육의 현장에 가담했던 그의 친척들, 그리고 그를 막지 못하고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한 귀족대표인 저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굳이 귀족파 전원에게 그 죄를 물으시겠다면 감히 제 입장에서 뭐라 간언드릴 수는 없겠지만,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양 세력의 균형을 잡는 것임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뻔뻔하구나! 아직까지도 권력을 놓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귀족파 전원에게 책임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나?!”


왕당파의 자리가 소란스러워진다. 이젠 오로메조차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채 마누앙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들을 별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귀족파 귀족들이 그대로 받고 있는 사이, 마누앙은 자신의 시선을 그대로 로빈에게 흘린다. 로빈은 어째선지, 그 깊은 눈을 마주 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선왕이 빛을 잃고, 끝내 시해당하며 그 일가까지 도륙당하고 있는 사이 당신들 왕당파는 무엇을 했습니까?”

낮지만 확실하게 들려온 마누앙의 말에, 모든 귀족들이 일순간에 침묵에 잠긴다.

“그를,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당신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지금 지하감옥에 감금되어있는 전 근위대장 루디 드렌턴은, 자신의 갓난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붉은 나무의 마지막 씨앗을 지켜내었고, 훌륭하게 복귀시켰습니다. 그가 피와 눈물을 머금는 그런 각오를 할 동안, 정작 당신들은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마누앙의 말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왕당파에 대한 분노도, 드렌턴에 대한 연민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무겁게, 더욱 매섭게 그의 말이 귀족들의 입을 잠그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이 회의실 안의 모두를 판단하고 있었기에.

“······실례했습니다, 전하.”


“아니, 아닙니다.”

로빈은 드렌턴이란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가슴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눈앞에서 자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는 이 남자에 대한 판단도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그는 과연 적인가 아군인가.


어째서 순순히 자신과 자신의 일족, 나아가 모든 귀족파의 운명을 이리도 쉽게 풋내기 왕자에게 맡겨버리는 것일까. 이 남자에 대한 판단은 역시 아저씨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로빈이었다. 그는 약간의 고민 끝에 다소 무거워진 회의실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울렸다.

“그렇다면, 일단 대관식 이후에 다시 회의를 가져야 할 것 같군요. 섭정의 말씀대로 최대한 일정을 빠르게 잡고 싶은데, 언제쯤 가능하겠습니까?”


로빈의 시선이 오로메를 향한다.


“오늘 언론에 발표하고, 교회 측이 빠르게 준비한다면 당장 내일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럼 오늘은 이만 해산하겠습니다.”


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든 귀족들이 곧바로 따라 일어나며 예를 취한다. 역시 적응이 안 되는 풍경이라고 생각하며, 로빈은 헛기침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오려는데,


“참! 오늘 저녁, 본궁 대합실에서 전하의 귀환을 축하하는 환영식이 예정되어 있으니, 모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으윽······.”


뒤에서 들려오는 오로메의 외침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로빈.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표정은 아무도 보지 못했으리라.

회의실을 빠져나와 계단을 통해 대합실에 이르자, 반가운 얼굴들이 로빈을 맞이한다.


“어, 왔구나, 폐하. 회의는 어땠어?”


“제발 부탁인데 남들 앞에선 제대로 예를 표하라구.”


로빈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벤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격하며 고도가 난처한 얼굴로 허리를 굽힌다. 로빈은 오히려 그런 고도의 태도가 부담스러운지 손사래를 친다.


“고도, 우리끼리 있을 땐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편하게 계세요.”


“어, 어찌 제가 감히······, 저, 전하.”


어색하게 말을 더듬는 고도를 내려다보며 벤이 웃음을 흘리는 바람에 그는 다시금 옆구리를 얻어맞아야 했다.


“그래, 이제 학교로 돌아가는 거야?”


“으윽······, 아, 응. 이제 곧 기말시험이라서. 혐의도 벗겨졌겠다, 빨리 학회장님에게 신고하고 빡세게 공부해야지.”


“아, 그럼 저녁에 환영식이 있다던데 못 오겠네. 너라도 있어야 숨이 좀 트일 것 같은데.”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그러면 어쩌냐, 왕자야. 뭐, 내가 없어도 그녀가 있잖아.”


벤이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뒤를 바라보니, 장난스러운 미소로 웃고 있는 지나가 있었다. 살짝 손을 들어 화답하는 로빈의 얼굴엔 어느새 덩달아 미소가 걸려있다. 미소에서 되돌아와 벤을 돌아봤을 땐 이미 그는 고도의 손을 잡고 대합실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나중에 학교로 놀러 갈게!”


“오지 마, 미친놈아! 네가 오면 또 괜히 예를 차린답시고 이것저것 귀찮아져!”


터덜터덜 멀어져가는 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로빈은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그 거리감이 쓸쓸해져 오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친구의 뒷모습에서,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멀어져가는 느낌을 받은 그였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지나가 새빨간 혀를 살짝 깨문 채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며 묻는다. 로빈은 그 샛노란 표정에 오랜만에 경계심 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얼굴은 오랜만이네. 너 요즘 너무 눈물이 많았던 거 알아?”


“그랬었나? 뭐, 누구 덕이지.”


지나도 덩달아 허탈하게 웃는다.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그 투명한 뺨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지나는 그 손을 되잡아, 다시금 아래로 내린다. 그에, 로빈의 가슴에서 깊은 무언가가 울컥하고 만다.


“결국······, 여기까지 왔어.”

로빈은 그녀가 잡아온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작게 속삭인다.

“내가 다른 명령을 내린다면······, 너는 그걸 받들 수 있을까?”


“하핫, 왕이시여······.”

지나가 얇게 웃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곁에 있으라 명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께 아무것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주세요.”


“내가 무엇 때문에, 누굴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해?”

로빈이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어온다.

“나는 정면으로 맞설 준비가 되어있어. 설령 내 아버지와 네 어머니가 실패했더라도,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전하, 주위에 사람들이-”


“상관없어!!”


영력이 실린 그의 목소리가 대합실에 울리며 침묵을 깔아버린다. 오가던 귀족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고, 로빈의 얼굴을 알아본 자들의 속삭임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할아버님을 뵈러 왔던 것인데, 뒤로 미뤄야겠군요.”

지나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어깨에 올린 로빈의 손을 뿌리치며 돌아선다. 로빈이 그녀를 잡기 위해 다시금 손을 뻗었지만, 지나는 보이지 않는 표정 뒤로, 이렇게 말할 뿐.

“저녁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대합실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로빈은 깊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감싸 쥔다. 때문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깊은 눈빛이 지나를 쫓아 대합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챌 수 없었다.


지나는 로빈과 마찬가지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기며 본궁 정문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연거푸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릿속엔 목욕 후에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생각을 간신히 밀어내면서 걸음에 속도를 붙이려 했다. 하지만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지나는 최대한 굳은 표정으로 돌아봐야 했다.


“아뮤르 소위.”


“네, 섭정 각하.”


대여섯 계단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끔찍하게 깊은 먹색 눈. 마누앙은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지나를 노려보았다.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한 지나가 다시금 입을 열려는 순간, 섭정은 한 칸 계단을 내려오면서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너만은 네 어머니가 몰고 왔던 그 모든 파국을 잘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것을 막을 방법을 너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사실도.”

지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입술을 깨문 채로, 지금 이 순간 가장 증오스러우면서도 가장 현명한 말을 하고 있는 존재를, 어머니와 꼭 닮은 그 태양과도 같은 눈동자로 노려본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말없이 지켜본다.

“이루어질 수 없다. 아니,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18년 전 그날, 그리고 이후 18년간, 내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죗값을, 내 이름, 내 명예, 내 가문-, 내 모든 것을 걸고 받을 각오가 되어있다. 그렇기에 나에겐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책임이 있다.”

눈동자를 아래로 흘리는 지나에게, 마누앙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내가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하길 바란다. 한나의 딸이여.”


지나는 끝내 어떠한 것도 대답하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멍하니 감정과 목소리를 씹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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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4) +9 14.11.12 1,663 60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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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2) +6 14.11.10 1,474 6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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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0) +12 14.11.06 2,186 64 17쪽
71 (막중) 나는 상처입었다 +13 14.11.04 1,994 57 15쪽
70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9) +12 14.11.03 2,240 49 19쪽
69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8) +9 14.11.02 1,859 55 18쪽
68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7) +5 14.10.31 1,686 50 19쪽
67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6) +8 14.10.30 3,055 73 20쪽
66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5) +11 14.10.29 2,488 69 26쪽
65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4) +8 14.10.26 1,990 61 23쪽
64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3) +8 14.10.24 2,546 66 21쪽
63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2) +8 14.10.22 2,066 85 23쪽
62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 +12 14.10.20 2,743 57 17쪽
61 (막간) 따듯해지는 겨울과 그것을 바라보는 악마와 인형 +22 14.10.18 1,879 53 16쪽
60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10) +7 14.10.17 1,886 57 28쪽
59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9) +8 14.10.15 2,694 81 20쪽
58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8) +4 14.10.13 2,241 51 18쪽
57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7) +14 14.10.13 1,966 59 21쪽
56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6) +20 14.10.11 2,261 57 17쪽
55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5) +5 14.10.10 2,080 53 20쪽
54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4) +9 14.10.08 2,223 74 21쪽
53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3) +6 14.10.06 2,221 58 15쪽
52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2) +12 14.10.05 2,311 63 21쪽
51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1) +12 14.10.04 1,870 61 19쪽
50 (막간) 꽃잎이 부는 정원 +10 14.10.03 2,210 57 13쪽
49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9) +16 14.10.02 2,277 64 21쪽
48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8) +15 14.10.01 2,617 68 18쪽
47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7) +12 14.09.30 2,373 73 18쪽
46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6) +14 14.09.29 2,541 69 20쪽
45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5) +12 14.09.28 3,034 81 18쪽
44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4) +10 14.09.27 2,116 6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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