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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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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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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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30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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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6)

DUMMY

“어떻습니까?”


천막을 나서자마자 들려오는 가는 목소리. 벤은 힐끗 그 주인을 바라본다. 흐릿한 인상의 남자였기에, 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에 꽤나 시간을 잡아먹어야 했다.


“아, 레이쇼 경.”


“경은 무슨, 중사라고 불러주십쇼. 성도 없는 비천한 출신입니다.”


“아하, 그쪽도 ‘그냥’ 레이쇼인가요? 저도 ‘그냥’ 벤입니다.”

천막을 지탱하는 말뚝에 걸터앉아 있던 레이쇼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몸을 일으킨다. 벤은 그의 시선이 다시금 천막의 입구를 향하는 것을 알아채고, 첫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준다.

“카논 씨는 좀 쉬면 괜찮을 겁니다. 피로가 누적되고 놀랐을 뿐이에요.”


“그렇습니까.”


레이쇼는 안도의 한숨 따윈 쉬지 뱉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입가엔 얇은 미소가 서려있었다. 비실한 그의 웃음을 보면서, 벤은 그가 이곳을 찾은 목적이 카논의 안부를 묻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뭐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벤이 레이쇼의 의도를 눈치 챈 것처럼, 레이쇼 또한 벤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었다. 슬며시 다가와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레이쇼를, 벤은 딱히 제지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까 소위님한테 살짝 들었는데, 이거 다 댁이 꾸민 거였다며?”


“꾸미다니, 누가 들이면 제가 음모라도 꾸민 줄 알겠네요.”


“우리입장에선 그렇게 느껴지거든. 자, 말해봐. 도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거야? 우린 처음엔 소위님이 하극상이라도 일으켜서 대대지휘권을 빼앗은 줄 알았는데.”


길어진 웃음만큼 동시에 짧아진 레이쇼의 말에도 벤은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왕의 대리인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의 지휘관에 임명되기는 했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군인이 아닌 수습마법사. 지휘관의 위엄 따위를 떠나 애초에 벤 스스로가 경어로 대접받는 것에 미련이 없었던 덕분이었다.


“제가 일주일동안 뭘 한 건가- 그게 궁금하신 건가요?”


“그래, 그거부터 시작해봅시다.”


벤은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표정의 레이쇼가 내미는 가죽수통을 받아들고 의심 없이 한 모금 들이킨다. 직후 그가 짧게 웃은 것은, 무색무취이어야 할 내용물에서 제대로 숙성된 포도의 달콤한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제 목적은 그냥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적의 지휘관을 확인하는 것. 하나는 아군 부관들로부터 배제당하는 것.”


“배제?”


수통을 되받기 위해 내민 레이쇼의 손을 무시하고서 계속 내용물을 비우는 벤. 자신의 입을 가볍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안타까움이 번져가는 레이쇼의 표정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네에-. 저라는 무능한 지휘관을 매개로 여러분의 생존본능을 일깨우기 위해서였죠. 우리 병사들을 보면 표면상으론 왕의 깃발아래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분열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건 우리 대대뿐만이 아니라 원정군 전체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먼저 피해를 보기 싫어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정작 마지막엔 가장 빛나는 위치에 남아있고 싶어 합니다.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흠, 글쎄.”


마침내 되찾은 수통. 그 가벼워진 무게에 레이쇼는 눈썹을 치켜 올린다.


“바로 공통의 이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죠. 각자 사병을 이끌고 온 만큼, 먼저 나서서 손해를 보기는 싫으면서도 동시에 명분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어떻게든 궁극적인 이익을 찾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봤습니다. 모두가 갖고 싶은 이익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모두가 피하고 싶은 손해를 만들어내서 하나로 결집시키면 어떨까- 하고요.”


“하, 그 손해라는 게, 당신이란 지휘관을 통해 전멸될 위기- 라는 말인가? 굳이 왜 피해를 입는 포진으로 퇴각을 반복하는지 궁금했었는데 말이지......”


“위기감을 조성해야했으니까요. 그리고 적군의 입장에서도 명확한 실적이 없으면 반복되는 승리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무엇보다도 제가 중요시 여겼던 건, 여러분이 확실히 저를 배제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 점에 있어서는 카논 씨의 역할이 컸죠. 만약 하극상에 의한 지휘권 박탈이라는 상황이 되더라도, 다시금 그 후임 자리에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부관들끼리 분열이 일어났을 테니까.”


“카논 소위님을 중심으로 재편된 지휘선. 반드시 이대로 우리끼리 승리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폐하가 직접 임명한 지휘관을 몰아냈으면서도 승리를 하지 못한 반역자가 된다-....... 그런 절박함을 유도했다는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카논 소위가 대대의 지휘권을 양도받았다고 선언한 뒤 명령을 내렸을 때 아무도 듣지 않았겠죠?”


레이쇼는 수통의 내용물을 비우고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전장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지휘관은 처음이었기에.


“그런데 어째서 일주일이나 걸린 거지? 적 지휘관을 파악하는 데 그리 많은 퇴각이 필요했나? 게다가 거기서 좀 더 시간을 끌었다면 당신에 대한 하극상은커녕 카논 소위님에게도 불똥이 튈 뻔했다고. 그러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저도 꽤 초조했죠. 생각보다 팔루뎀에 있는 적 중앙군이 늦게 움직여줬거든요.”


“팔루뎀? 중앙군?”


그랄데로부터의 암호문.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대에 벤과 카논뿐이었기에, 레이쇼가 지금 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원정에 내기가 걸려있다는 건 아시죠? 그라우치 장군의 복부군이 오늘 새벽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팔루뎀에 주둔 중이었던 적의 중앙군이 즉시 군대를 나누어서 각각 판도나성과 디팔루성으로 지원을 보냈다는 첩보도 받았죠. 자, 그럼 생각해봅시다. 만약 레이쇼 씨가 적 중앙군의 지휘관이라면, 선발대랍시고 보낸 군대가 연전연패하고 있는 적과, 전군이 동시에 국경을 넘어 침범해오는 적, 둘 중 어느 곳으로 주력을 보내겠습니까?”


“아아-! 그럼 이 모든 게 내기에서 이기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말이야? 하핫, 꽤 대담한데?”


레이쇼는 크게 웃으며 벤의 어깨를 강하게 쳐주었다. 격려와 감탄의 뜻이 담긴 손찌검이었지만, 벤의 표정은 영 밝지 못했다.


“......라고 제가 건의했습니다만, 우리의 왕께서는 다르게 생각하더군요.”


“다르게?”


“예에. 저보고 적 중앙군의 소식을 듣는 즉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라고 부탁했어요.”

왕이 지휘관에게 전투에서 이겨달라고 부탁했다-. 레이쇼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명령’이었다. 굳이 부탁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어 보이는데, 어째서 벤의 표정이 어두워졌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레이쇼의 표정에서 의문을 읽은 벤은 다시금 한숨과 함께 신음을 뱉는다.

“전 원래 여기서 대대의 절반 정도를 잃고 패퇴하는 시나리오를 그렸어요. 적 중앙군이 이쪽으로 보내는 영향을 최대한 줄이고, 동시에 우리 원정군에게 분열된 현실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요. 하지만 제 친구는 그냥 이겨달라고 했어요. 그렇게까지 같은 아군을 희생시키면서 ‘내기’에 이기고 싶지는 않다고. 여기서 내가 이긴다면, 적 중앙군의 지휘관도 지원군의 양분을 재편하는 걸 생각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요. 하여간 물러 터져가지고는 말도 드럽게 안 들어요.”


국왕다운 선택이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상황판단. 하지만 레이쇼의 가슴 속에 의구심과 괴리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왕의 선택이 아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선택이었다.


“흠......,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말입니까?”


여전히 무심한, 먹색 눈동자. 그의 공허한 시선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레이쇼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선택이든, 당신은 병사들을 희생시킨 것뿐만이 아니라 그 포장된 무능력에서 비롯된 모든 오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게 되잖아? 소문은 무지하게 빨라. 나 같은 부관한테 아무리 해명 해봐도, 병사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소문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어. 인사의 실패에 있어서 폐하가 직접적으로 입는 손해는 그리 크지 않지. 놀라울 정도로 흔한 일이니까. 오히려 네 작전이 들어맞는다면, 결과는 확실하게 폐하의 이득으로 다가왔을 테니까. 하지만 너는 어떻지? 너는 정말 폐하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오명을 짊어지고 그 길을 따라나서겠다는 거야?”


벤에게 동점심이 피어난 건 아니었다. 그가 자의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쯤은 레이쇼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모든 과정의 끝에 있는 벤의 의도.

지휘관도 기사도 아닌 그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전장에 발을 딛었나. 왕은 그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부탁’할 뿐이다. 정말로 그것만이 이 사내를 속박하는 주문인 것일까.


“이유라......”

벤의 먹색 눈동자는 길게 고민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런 거죠. 친구랑 둘이서 길을 가고 있어요. 그런데 장난을 치다가, 친구가 그만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파이를 쏟아버립니다. 그리고 난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죠. 그는 돈이 없고, 저는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우리한테 소리를 지르며 가게에서 나오는 주인에게 제가 그랬다고 하면서 돈을 지불하는 겁니다. 물론, 그 돈을 나중에 받겠다는 맹세 따위는 받지 않아요. 당연한 거니까요. 친구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기도 똑같이 했을 테니까.”

그는 짧게 숨을 내쉬며 푸석한 머리를 벅벅 긁는다.

“이 모든 게, 그 정도 일인 거예요. 저한테는.”


벤과 레이쇼 사이로 주둔지를 구축하는 공병들의 고함소리만이 흐른다. 그 적막을 깨트린 목소리는, 레이쇼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얇은 웃음소리였다.


“당신도 참 곤란한 친구를 뒀네.”


“제 친구가 좋은 친구를 둔 걸로 하죠.”


레이쇼는 크게 웃으며 허리춤에서 새로운 수통을 꺼낸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든 벤은, 레이쇼의 표정만으로도 뚜껑을 열기 전에 그 내용물을 알 수 있었다.




==============




“적 대대장을 잡은 뒤에 곧바로 본대와 예비대를 궤멸시켰다는군. 기병대를 포함한 많은 수를 놓치기는 했어도, 보급품을 뺐었으니 추격전은 따로 하지 않았다는데. 벤 녀석, 그 오합지졸들로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전투보고서를 읽는 드렌턴의 얼굴은 기쁨보다는 당혹감이 뒤덮여있었다. 창틀에 기대어 그의 보고를 듣고 있던 로빈은 검붉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 내가 되도록 이겨달라고 부탁했어.”


“......뭐야?! 너 임마, 이야기가 다르잖아!”


삐죽한 수염을 앞세워 달려드는 드렌턴의 성난 모습은 로빈에게 진심어린 공포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으앗,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수작을 부리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같은 공화국의 병사들이잖아?”


실실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드렌턴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니, 이길 생각도 없으면서 애초에 내기는 왜 꺼낸 거야?”


“이길 생각이 없다니?”

로빈은 미소와 함께 검붉은 눈동자를 빛낸다.

“난 반드시 이길 생각인데? 애초에 여기서 벤이 이겨준다면, 중앙군을 나누었던 적도 잠시 멈추고 생각을 바꿔야겠지. 그리고 그 틈을 노려서 빠르게 진격한다-라는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젠장.”


“그거 꼴좋네.”


진심이 담긴 드렌턴의 조소에 로빈은 어깨를 으쓱한다.

벤의 전투보고서와 함께 도착한 북부의 정찰보고.

선발대의 패배소식이 들려왔음에도 적의 중앙군은 그대로 멈추지 않고 진격과 포진을 유지했다는 내용이었다. 틈을 파고들겠다는 이쪽의 의도가 읽힌 것인지, 아니면 대대급 선발대의 궤멸정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자신감인지, 로빈으로서는 적을 정확히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적 중앙군 총지휘관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 로빈의 마음 한구석으로 무겁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냐, 로빈? 압도할 수 없는 군세를 상대로 정공으로 나설 수밖에 없게 됐잖아.”


불편한 드렌턴의 표정과는 달리, 창문너머로 기지개를 켜는 로빈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하다.


“뭐어- 별 수 없지. 우리도 국경을 넘어가볼까아.”


“속편하구만. 그럼 벤의 선발대가 복귀하는 대로-”


“아니, 내일 바로 출발할건데?”


“.......뭐어?! 선발대는 어쩌고?! 복귀를 기다리지 않을 거냐?”


로빈은 작게 웃는다. 흔들리는 드렌턴의 갈색 눈동자와는 달리, 줄곧 그는 느슨한 표정과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글쎄에, 과연 그 녀석이 복귀할까?”

이를 내보이는 장난스러운 미소. 반대로 표정을 잔뜩 찌푸리는 드렌턴을 향해, 로빈은 즐겁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기할래?”




=============




숨을 삼키며 카논은 적갈색 눈동자를 어둠 속에 흩뿌린다. 실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숙면의 달콤함이 얕은 여운으로 남아있는 밤이었다. 하지만 모포에 남아있는 온기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감촉이 느껴지는 셔츠. 꿈과 현실의 경계선상에서 아른거리는 불결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가슴 속 남아있는 응어리를 내뿜듯이, 길고 긴 한숨을 내쉬는 그녀.


“어, 일어났어요?”

순간 옆에서 들려온 얇은 남자의 목소리에, 카논은 화들짝 놀라며 모포를 끌어안았다. 달빛조차 새어 들어오지 않은 천막이었기에 어둠에 익숙해진 그녀의 눈으로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곧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아아- 죄송해요. 놀라게 해드렸네.”

마법사의 손에서 작은 발광체가 나타난다. 그 빛은 미약하여 간신히 사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지만, 카논의 눈은 그마저도 익숙해지는데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아, 벤......! 전투는......, 전투는 어찌됐습니까?”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부르며, 카논은 끌어안았던 모포를 살며시 놓을 수 있었다. 위대한 가문의 영광스러운 기사. 그런 강직해야하는 몸이지만, 남자라는 생물학적인 공포에서 완벽하게 해방되기엔 카논은 아직은 여린 소녀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벤이었기에 그녀의 침상에서 멀찍이 떨어져있던 참이었으나, 이런 어둠 속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걱정 마요. 이겼어요. 아, 그리고 죄송해요. 걱정돼서 잠깐만 들린다는 게, 이 녀석이 이렇게 돼버려서.”


카논은 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림자의 존재를 볼 수 있었다. 벤의 무릎을 베개 삼아 꿈속을 해매고 있는 소녀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는 탓에 얼굴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통통하게 올라있는 볼살과 반짝이는 입술만으로도 바라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만들기에 충분한 아이였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의 잠을 방해할 수는 없죠.”


그렇게 카논을 놀라게 한 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짧은 물음이었지만, 카논은 벤의 이 질문이 통상적인 인사치레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당했던 일, 그리고 자신이 당할 뻔했던 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억의 파편에 몸서리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먼저 고개를 숙인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기사된 자로서 무기에 의존하는 실수를 저질렀기에-”


“아뇨, 아닙니다. 카논 씨 덕분에 살아난 병사가 몇인데요. 그리고 첫 실전이셨으면서도 그 정도의 기사를 상대했다는 건 스스로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겁니다. 뭐어. 제가 기사가 아니니 잘은 모르겠지만요.”


결국, 잊고 싶은 광경이 그녀의 머릿속에 확실히 자리 잡는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되새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장 처참했던 순간에 자신이 안도할 수 있었던 그 부분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논은 그 순간 느꼈던 그 위화감의 정체를, 더욱 명확하게 되짚을 수 있었다.


“......벤 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네에, 뭐죠?”


한 번의 호흡을 삼키고, 카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벤 님이 저를 구해주실 때 쓰셨던 마법....... 숲의 생명을 갉아서 독을 생성하는 반(反)자연계 마법이 아니었습니까......? 공화국에서는 금지된 발현법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녀의 어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명과 명예를 지켜준 은인에게 역으로 따지는 모습처럼 비춰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대답하는 벤의 표정은 담담했다.


“어-, 그랬나요? 사실 저도 급하게 주문을 외운 거라, 뭔 주문을 시전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요. 그런 마법을 배우거나 외운 적도 없고요. 뭔가 확실히 처음 보는 주문이긴 했는데......”


“아, 아닙니다! 제가 따지려는 건 아니라, 단지 궁금해서......, 모르신다니, 제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카논은 속으로 자신의 당황스러운 혀보다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향해 마구 질책을 퍼붓고 있었다. 그에게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나- 라면서.

“저......,그......, 가,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인사와 함께 더욱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이 그에게 닿지 않기를 어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카논이었다.


“아뇨, 당연한 걸요. 오히려 제가 늦어서 험한 꼴을 당하신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 순간, 카논은 말문이 막히고 만다. 수치심보다도 여자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에 억지로 잊고 있었던 광경이 떠오른 것이다. 알몸을 드러낸 채로, 눈앞의 남자에게 안겨 펑펑 울었던 기억이.

“저, 저기......, 베,벤 님.......”


“예?”


모포에 얼굴을 반쯤 묻으며 개미소리만큼 작아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벤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귀를 기울여야했다.


“그......,그......, 보, 보셨나요......?”


“뭘요?”


“제......,그.......,제......, 아, 아니에요!”


제 노골적인 알몸을- 이라고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이번에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오른 건 ‘여자’로서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모포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과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그녀였다.


‘.......벤 님은 혹시.......’


왜 자신이 이토록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가 스스로를 향해 진지하게 물어본 후 답을 찾은 것은, 좀 더 후의 일이었다.


“얘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네. 그냥 깨워서 가봐야겠네요. 더 쉬세요.”


조심스럽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에게, 카논은 황급하게 모포 밖으로 얼굴을 꺼내며 물었다.


“아, 내일 바로 복귀하실 겁니까?”


“......복귀요?”


의아한 표정의 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카논의 표정은 더 큰 의문을 품는다.


“예, 새로 보급도 받아야하고, 인원도 보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일주일간 부상자가 많아서 그렇지 전력피해는 생각보다 적어요. 따라서 인원보충은 필요 없고, 보급은 적 선발대에게서 노획한 걸로 때우면 되니까 딱히 재보급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카논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이 다시 질문을 위해 열리기 직전에, 벤은 먼저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기로 한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녀에게 더욱 커다란 의문을 심어줄 뿐이었다.





“우린 팔루뎀으로 갑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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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9막) 흐름의 끝에서 (10) +11 14.11.26 1,536 58 24쪽
87 (9막) 흐름의 끝에서 (9) +8 14.11.25 1,644 5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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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5) +6 14.11.13 1,622 58 20쪽
76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4) +9 14.11.12 1,663 60 26쪽
75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3) +10 14.11.11 1,948 51 19쪽
74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2) +6 14.11.10 1,474 60 20쪽
73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1) +11 14.11.08 1,715 64 17쪽
72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0) +12 14.11.06 2,186 64 17쪽
71 (막중) 나는 상처입었다 +13 14.11.04 1,994 57 15쪽
70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9) +12 14.11.03 2,240 49 19쪽
69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8) +9 14.11.02 1,859 55 18쪽
68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7) +5 14.10.31 1,686 50 19쪽
»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6) +8 14.10.30 3,055 73 20쪽
66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5) +11 14.10.29 2,488 69 26쪽
65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4) +8 14.10.26 1,990 61 23쪽
64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3) +8 14.10.24 2,546 66 21쪽
63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2) +8 14.10.22 2,066 85 23쪽
62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 +12 14.10.20 2,743 57 17쪽
61 (막간) 따듯해지는 겨울과 그것을 바라보는 악마와 인형 +22 14.10.18 1,879 53 16쪽
60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10) +7 14.10.17 1,886 57 28쪽
59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9) +8 14.10.15 2,694 81 20쪽
58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8) +4 14.10.13 2,241 51 18쪽
57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7) +14 14.10.13 1,966 59 21쪽
56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6) +20 14.10.11 2,261 57 17쪽
55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5) +5 14.10.10 2,080 53 20쪽
54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4) +9 14.10.08 2,223 74 21쪽
53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3) +6 14.10.06 2,221 58 15쪽
52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2) +12 14.10.05 2,311 63 21쪽
51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1) +12 14.10.04 1,870 61 19쪽
50 (막간) 꽃잎이 부는 정원 +10 14.10.03 2,210 57 13쪽
49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9) +16 14.10.02 2,277 64 21쪽
48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8) +15 14.10.01 2,617 68 18쪽
47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7) +12 14.09.30 2,373 73 18쪽
46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6) +14 14.09.29 2,541 69 20쪽
45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5) +12 14.09.28 3,034 81 18쪽
44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4) +10 14.09.27 2,116 6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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