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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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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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1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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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9막) 흐름의 끝에서 (3)

DUMMY

“아실레마 제국의 황제가 대전쟁 이후로 줄곧 침묵 중이라는 건 이제 숨길만한 사실도 아니지.”


푹신한 의자에 앉은 엘라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품에서 조용히 잠들어있는 ‘로즈’ 덕분이었다. 옆 탁자에는 턱을 괴고 행복한 표정으로 로즈를 바라보고 있는 지나가 있었지만, 맞은편에서 엘라의 입에 집중하고 있는 로빈과 크라트의 표정은 엘라만큼 부드럽지도, 지나만큼 행복해보이지도 않았다.


“대전쟁 이후로 이미 200년이 지났잖아요. 그 황제란 사람이 살아있기는 한 겁니까?”


의심이 가득한 로빈의 눈초리에, 엘라는 가볍게 미소를 짓는다.


“물론. 군단장이라고해도 말단장군이나 다름없는 나는 한 번밖에는 알현하지 못했지만. 심지어 별로 늙지도 않았던데.”


“허어, 꽤나 실력 있는 기사인가 보네요.”


“꽤나?”

엘라의 색기 넘치던 미소가, 빠르게 비웃음으로 바뀌어 번져나간다.

“다른 나라들은 물론이고 제국 내에서도 군고위층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다들 제국엔 검성이 좌검성과 우검성, 두 명 있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세 명이야.”


“예에?”


크게 눈을 뜨는 로빈과 마찬가지로, 크라트 또한 이 이야기는 처음이었는지 푸른 눈을 더욱 빛내며 엘라를 바라보았다.


“200년 전, 반도를 아펜타우스의 붉은 은총으로 물들였던 ‘학살의 검성’. 그가 바로 지금 침묵하고 있는 제국의 황제 본인이야.”

이번만큼은 지나마저도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로빈은 여전히 경악 중이었고, 크라트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엘라의 표정에서 농담을 찾으려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얕은 비웃음은 결코 장난을 담고 있지 않았다.

“즉위부터 개전까지 계속해서 베일에 싸여있던 황제였기에, 그 누구도 전투의 최전방에서 적들을 도륙하는 ‘학살의 검성’이 감히 황제 본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거지. 그건 제국군도 마찬가지였어. 애초에 ‘학살’이라는 별명은 침략당한 피해자 측에서 붙여준 것이었으니까. 제국 내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먼저 검성으로 인정받은 경우랄까. 그런 특이점 때문인지 전쟁 후에 이렇다 할 표면적 움직임이 없는 ‘학살의 검성’을, 다들 정치싸움에서 밀려났다-라고만 생각했지.”


“하지만 그 실체가 황제 본인이었다는 건가.”


크라트의 굳은 목소리에 엘라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 흔들림에 로즈가 뒤척였지만,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와 숨결에 그녀는 곧바로 다시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제는 어째서 200년 동안 침묵하고 있었죠? 아니, 애초에 그 침묵이란 게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어요.”


“침묵은, 말 그대로 침묵이야.”

다시 잠들어버린 로즈의 코를 장난스럽게 간질이며, 엘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는 200년 동안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아무런 명령도,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지. 두 검성이 서로 합의한 사항을 가지고 올라가면, 조용히 결재를 해주는 것이 전부야. 왜 대전쟁을 일으켰는지, 왜 반도를 통일하고도 15년 동안 방치했는지, 그리고 왜 200년간 침묵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건 아무도 몰라.”


“......그런데도 직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로빈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건 그의 압도적인 힘과 그 두려움을, 다름 아닌 두 검성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그에 대한 귀족 측의 입장은 이미 동경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워. 물론 황제에 대해 특이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있긴 있었지. 그중에서도 우리 엄마는 거의 집착이었어.”

질렸다는 듯이 이를 내보이며 고개를 흔들던 그녀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위해 다시 표정을 굳힌다.

“그리고 ‘분열’은, 바로 그 황제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시작됐어.”




============




“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고딘의 말에, 한가롭게 정원에서 차를 즐기던 엘라의 입술이 꿈틀거린다.


“없다고 해.”


“이미 오고계십니다만.”


“아, 진짜! 집사만 몇 년째인데 그런 눈치도 없어?”


짜증과 함께 날아드는 찻잔을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면서, 고딘은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군단장 취임을 축하하러 오신 거잖습니까. 좀 더 반갑게 맞이하시죠.”


“넌 그렇게 시달렸으면서도 아직 우리 엄마를 모르는구나.”


엘라는 깊은 한숨과 함께 길게 내렸던 머리를 묶어 올리고, 훤히 내놓았던 다리 위로 군용 스타킹을 끌어올린다. 단추란 단추는 모두 풀어헤쳤던 검은 제복을 하나하나 정돈하고서, 그녀는 고딘을 향해 팔을 벌린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내보임과 동시에, 정원의 입구로 붉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평안하셨는지요?”


최대한 공손한 태도와 목소리로 허리를 굽히는 엘라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고 차갑게 지나치는 여인.


“구역질나는 가식은 집어치우거라, 엘라론.”


“......저도 잘 지냈답니다.”


미소를 지우지 않고 몸을 세우던 엘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고딘의 안쓰러운 표정과 마주치고 씁쓸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정원을 만끽하고 있는 어머니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몸을 내려놓았다. 고딘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두 찻잔에 진홍빛 액체를 채웠고, 그것으로 한 모금 입술을 적시고 난 후에야 ‘붉은 장미’의 입이 열린다.


“아직도 임신할 생각이 없느냐? 언제까지 밖으로만 싸돌아다닐 생각이냐?”


“제가 어지간히 알아서 할까요.”


“몇 년 남지 않았다. 정 상대가 없다면 본가로 복귀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드리브달이라는 이름에 먹칠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예에-.”


정갈했던 엘라의 태도는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모았던 다리는 점점 벌어졌고, 세웠던 허리는 점점 굽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2군단장으로 취임했다고 들었다.”


“네에.”


제국 역사상 최연소 군단장 취임. 하지만 엘라는 그런 업적에도 어머니의 입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2군단이면 예비대였지 아마? 검성의 딸이니 체면은 세워줘야겠고, 하지만 태도와 실적은 그 모양이니 그 정도가 알맞긴 하겠구나. 차라리 전방 사단장이 낫겠다. 그 나이에 벌써 명예직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어머, 부끄러워라.”


둔탁한 소리와, 거대한 영력의 뒤틀림이 정원의 꽃잎을 뒤흔든다. 고딘이 손쓸 틈도 없이, 검성의 하얀 손이 엘라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엘라의 코와 입가로 모녀의 붉은 머리카락보다도 진한 줄기가 흐른다. 하지만 적의와 영력이 담긴 그 손길도, 부러진 이를 뱉어내는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를 앗아가지는 못했다.


“좀 더 네 이름에 자각을 가져라. 나에 대한 적개심은 접지 않더라도, 더 멀고 커다란 그림을 그려야 한다.”


“큰 그림?”


고딘에게서 받은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며 엘라가 되물었다.


“......‘그’가 폐하의 뜻을 이어가겠다며 귀족과 장군들을 규합하고 있어. 그리고 여전히 폐하께선 침묵 중이시고. 난 여기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지만, 유사시엔 밖에서 군을 소유하고 있는 네가 가문의 이름으로 움직여줘야 할 때가 올 거다. 예비대라도 좋다. 조용히 힘을 길러라. 섣부른 행동은 절대 하지 말고.”


“흐응, 결국 어머니께선 끝까지 폐하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계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어투에 담진 않았지만, 엘라의 말속에는 경멸이 담겨있었다. 그 미묘한 경계를 눈치 챘는지 그러지 못했는지, 검성의 표정은 단호하기만 했다.


“당연한 것을 묻느냐. 그것이 우리 가문의 신조다. 내가 장미라는 이름으로 검을 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러셨죠.”


일어나는 어머니를 배웅하는 대신, 엘라는 자리에 앉아 작게 중얼거린다.

단순에 정원을 빠져나갈 것처럼 보였던 장미는, 고딘의 앞에서 멈춰서 그의 눈을 바라보기 위해 잠시 시선을 남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엘라를 대신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검성은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부탁할게.”


고딘의 숙인 머리 위로 짧은 말만을 남긴 채, 장미의 검성은 유유히 딸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뾰족한 가시와도 같은 영력의 파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고딘은 머리를 들어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어떡하실 겁니까?”


“뭘 어째?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하시잖아?”

엘라는 웃으며 새빨간 침을 바닥에 뱉는다.

“난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




“그러니까, 온건파와 어머니는 내 군단이 멋대로 움직인 덕분에 대외적으로 설득력과 힘 모두를 잃어버린 셈이야. 모든 무게는 이제 강경파로 쏠렸고, 남은 건 어떻게 두 검성이 합의된 내용을 황제에게 승인을 받는가- 뿐이지.”


“......결국 엘라 때문에 제국의 정복전쟁이 빠르게 시작될 수도 있게 됐다는 뜻인가요.....?”


착잡한 로빈의 얼굴을 향해 엘라는 짓궂게 웃는다.


“어머, 어차피 시간문제였어. 내가 오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이 사실 자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텐데.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음......, 하긴 그건 그러네요. 그런데 황제에게 승인을 받으려면 두 검성이 동의해야한다고 하셨잖아요? 엘라의 어머니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로빈의 질문에 엘라가 미소를 고친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싸늘하고 소름끼치는 미소였기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여야 했다.


“말했잖아. 이미 강경파에게 기세가 기울었다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면 방법은 두 개 뿐이지. 반대하는 사람을 찬성하게 만들거나, 반대하는 사람을 없애버리거나.”

그녀의 싸늘한 영력을 느꼈는지, 로즈가 말똥한 눈을 뜨고 어미를 올려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엘라는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를 되찾아야했다.

“두 방법 모두 조용히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로빈은 깊은 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크라트가 출산 후 얼마 되지도 않은 엘라를 데리고 직접 수도로 온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그 무게가 너무 지나치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는 그를 대신하여 입을 연 입술은 지나였다.


“그럼, 이제부터 우린 뭘 해야 하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태양빛 눈동자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손을 내미는 로즈. 심각한 얼굴로 내민 질문이었지만, 그 작은 손에 손가락을 내어주는 지나의 얼굴엔 다시금 바보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저번 대전쟁 때 제국과 인접한 4개국이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당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대답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엘라의 입이 빠르게 열린다.

“바로 연합하여 대적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야.”


“그 말씀은......”


다시 몸을 앞으로 숙이는 로빈. 로즈가 완전히 깨어나서 칭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엘라는 하얀 가슴을 꺼내 아이에게 물린다.


“나에게 가장 강한 적은, 다른 적에게도 가장 위협적인 법이야.”

엘라의 이 짧은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로빈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열심히 해봐, 붉은 나무.”




==============




“본 재판은, 아스트로바톰 이론물리학과 4학년생 제르나비 고도를 피고로 하는 국립사제단의 종교재판형식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고도는 되도록 의연하게 있으려고 노력했지만, 수많은 사제들과 전투마법사에게 둘러싸인 채로 넓은 교회에 버려져있다는 생각에 좀처럼 시선을 잡아두지 못하고 있었다. 재판이 비공개로 진행된다는 사실에 안심을 해야 할지 아니면 불안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증인대기석에 앉아있는 벤의 존재였다.


“세뮈엘님의 축복을 받으신 미트라블루스 폐하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사들이 피고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본 사제단은 이를 겸허하게 수용하여 종교외적인 문제로는 피고를 처분하지 않을 것임을 엄숙히 밝히는 바입니다.”


‘아주 대놓고 정교유착을 광고하시지 그래.’

자신을 향한 재판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채, 고도는 대사제를 향해 비웃음을 날린다.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피고의 몸이 악마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피고, 앞으로 나오세요.”


올 것이 왔다- 라고. 고도는 굳은 얼굴로 일어서며 생각했다. 데로는 기척을 지우는 것쯤은 쉬운 일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애초에 악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그녀가 아니었기에 걱정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대사제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마자, 노인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온다.


“세뮈엘님과 숲의 축복을-”


봄의 활엽수처럼 푸른빛이 고도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그것은 따스하면서도 상쾌해서, 고도는 긴장감 넘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넋을 놓고 빛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이 자신의 몸을 수색하듯이 훑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했다. 이성은 불쾌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 안락함이 이미 그녀의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고도는 모든 긴장감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긴장감은, 빛이 사라진 순간 한꺼번에 고도의 심장으로 흘러들어온다. 두근거리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며, 그녀는 등 뒤에서 터져 나올 노인의 목소리를 숨을 죽인 채 기다린다.


“깨끗합니다.”


대사제의 목소리에 올가미가 풀린 듯, 고도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했지만 고개를 젓고 있는 벤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것을 삼켜야만 했다. 그녀가 피고인석으로 돌아가 앉자마자, 대사제의 높은 목소리가 다시 교회를 울린다.


“피고가 악마와 계약을 맺고 혈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미 자백과 증언을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본래는 그 사실만으로도 내부적인 판결이 가능하지만, 폐하와 마법대학총장님의 간곡한 탄원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추가적인 증언을 통해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대리인,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그의 말에 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단의 맞은편에 마련된 자리로 움직인다.

“세뮈엘님과 숲의 이름으로, 진실만을 고할 것을 맹세하십시오.”


“맹세합니다.”

순순히 손을 들어 보이는 벤이었지만, 그에게 푸른빛으로 축복을 내리는 대사제의 시선은 전혀 호의적이지가 않았다.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악마가 이 남자의 코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본 그였기 때문이었다.

“아, 그전에 질문이 하나있는데요.”


벤의 목소리에, 대사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뭡니까?”


“얘 말인데, 그냥 파문당하면 뭐가 안 좋은 거예요? 굳이 종교만 바꾸라는 뜻이면 상관없지 않을까 해서요.”


대사제를 비롯한 사제단이 뒤틀린 표정으로 벤을 바라보았고, 곧바로 당황한 고도의 목소리가 교회를 때린다.


“뭔 소리 하는 거야 병신아아아! 파문당하면 그대로 학교에서 짤리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고!”


“정숙하세요!”

고도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벤을 노려보고 있었고, 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깊은 한숨을 쉬며, 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대사제.

“......답이 되었습니까, 대리인?”


“아, 예에.”


“그럼 변호를 시작해 주십시오.”


노인이 사제단의 중앙에 자리를 잡자, 벤은 고도와 그들을 스윽 한번 둘러보더니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먼저 제가 왕의, 아니, 폐하의 대리이자 증인으로서 이곳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피고가 전투에서 혈마법을 사용했을 당시상황은 참으로 급박했습니다. 아군 마법사들의 마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좀처럼 적의 보호막을 돌파하지 못하는 중이었죠. 전방에선 적의 지원군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자칫했다간 성을 돌파하기는커녕 아군이 전멸할 위기였습니다.”

벤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사제단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들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혹시나 이런 상황이 있을까 사전에 악마와 계약을 하고서 나타난 피고 덕분에 성을 함락하고 폐하를 비롯한 모든 군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세뮈엘님을 향한 신념까지 버리면서 스스로를 희생한 이 영웅적인 행동에 격려와 포상은 못해줄망정 파문이라니요? 온 국민이 비웃을 겁니다.”


“재판의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결과적으로는 대리인의 말씀처럼 볼 수도 있지만, 원론적으로 악마와의 계약은 그 행위자체가 이단이자 중범죄입니다. 단순히 결과를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애초에 법이 왜 존재하겠습니까? 그리고 피고가 악마와 계약한 이유를 상당히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셨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제단 중 한 명이 벤에게 날카롭게 받아친다. 벤은 짧게 숨을 내쉰 후, 그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피고가 악마와 계약한 이유요? 간단합니다.”

순간 출처를 알 수 없는 깊은 불안을 느낀 고도가 벤을 돌아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건 피고가 폐하를 깊게 사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도는 그대로 얼어붙는다. 당황한 사제단의 웅성거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벤은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피고가 폐하를 찾아낸 수색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우리 폐하가 어떻습니까?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훈남이지 않습니까? 피고는 첫 만남 때부터 폐하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차마 전하지 못했지요. 이 얼마나 슬픈 신분의 제약입니까? 그런 와중에 폐하가 위험한 전투에 나서신다는 소리를 듣고, 피고는 크게 걱정이 되었죠.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그를 지키고 싶은 그 마음을, 여러분은 상상하실 수 있으십니까? 피고는 이제 열여덟의 소녀입니다. 소녀의 순정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옆에 악마가 있었지요. 그녀는 폐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를 쓴 것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목소리를 높여 묻는 벤의 표정에, 대사제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간신히 입을 열었다.


“허, 허나 원칙적으로-”


“아-! 그놈의 원칙, 원칙. 한번 원칙적으로 따져볼까요? 사제님들 피고와 계약한 악마의 이름을 아십니까? 모르시죠? 그 정체가 뭔지, 그가 관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대가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시죠? 그래서 역소환도 못하고 그대로 상주하는 걸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그를 악마로 단정 짓는 유일한 증거는 외모뿐이잖습니까? 악마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존재를, 단순히 보기에 악마라는 이유로 악마로 규정하고 있는 거잖습니까? 그게 원칙적으로 말이 됩니까? 국립사제단이 그렇게 허술한 단체였어요? 예? 만약 그가 혈마력을 쓰는 사도라면 어쩌실래요? 네? 대답해보세요.”







“잘된 거 같지?”


교회의 문을 나서며, 벤이 고도를 향해 물었다.


“.......나를 로빈 씨한테 집착하는 미친년으로 만들어 놓은 거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벤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는 고도였다.




==================




“소식은 들었습니다.”


로빈의 집무실로 들어서며 마누앙이 건넨 첫마디였다.


“아,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선출식은 최대한 앞당겨서 해야겠습니다. 관련부처에 명해주세요.”


“이미 일러두었습니다. 그보다, 다른 나라보다도 브린타이나에 먼저 사절을 보내야할 텐데, 생각해두신 인물이 있으신지요?”


“아아, 그거야 뭐.......”

로빈은 마누앙에게서 묵직한 서류를 받으며 얇게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면 생각나는 얼굴이 어김없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류를 책상에 올려놓고 그것에 얼굴을 파묻으려 했지만, 곧바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야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낀 덕분이었다.

“총리님, 하실 말씀이라도?”

오후엔 언제나 서류를 건네고 결재가 끝날 무렵 다시 찾아오던 마누앙이다. 그랬기에 자리를 뜨지 않고 있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 사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던 일입니다.”


“예? 어떤......?”


마누앙은 먹색 눈으로 왕의 의혹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가 지금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시간을, 로빈이 가늠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 아들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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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9막) 흐름의 끝에서 (2) +6 14.11.17 1,653 53 24쪽
79 (9막) 흐름의 끝에서 (1) +7 14.11.15 1,774 54 14쪽
78 (막간) 하누 대위기 / 달빛은 영원을 품고 +4 14.11.14 1,680 52 26쪽
77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5) +6 14.11.13 1,622 58 20쪽
76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4) +9 14.11.12 1,663 60 26쪽
75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3) +10 14.11.11 1,948 51 19쪽
74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2) +6 14.11.10 1,474 60 20쪽
73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1) +11 14.11.08 1,715 64 17쪽
72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0) +12 14.11.06 2,186 64 17쪽
71 (막중) 나는 상처입었다 +13 14.11.04 1,994 57 15쪽
70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9) +12 14.11.03 2,240 49 19쪽
69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8) +9 14.11.02 1,859 55 18쪽
68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7) +5 14.10.31 1,686 50 19쪽
67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6) +8 14.10.30 3,055 73 20쪽
66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5) +11 14.10.29 2,488 69 26쪽
65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4) +8 14.10.26 1,990 61 23쪽
64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3) +8 14.10.24 2,546 66 21쪽
63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2) +8 14.10.22 2,066 85 23쪽
62 (8막) 붉은 늪을 뚫고 진격한 병사들에게 커다란 태양의 축복을 (1) +12 14.10.20 2,743 57 17쪽
61 (막간) 따듯해지는 겨울과 그것을 바라보는 악마와 인형 +22 14.10.18 1,879 53 16쪽
60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10) +7 14.10.17 1,886 57 28쪽
59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9) +8 14.10.15 2,694 81 20쪽
58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8) +4 14.10.13 2,241 51 18쪽
57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7) +14 14.10.13 1,966 59 21쪽
56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6) +20 14.10.11 2,261 57 17쪽
55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5) +5 14.10.10 2,080 53 20쪽
54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4) +9 14.10.08 2,223 74 21쪽
53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3) +6 14.10.06 2,221 58 15쪽
52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2) +12 14.10.05 2,311 63 21쪽
51 (7막)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진다 (1) +12 14.10.04 1,870 61 19쪽
50 (막간) 꽃잎이 부는 정원 +10 14.10.03 2,210 57 13쪽
49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9) +16 14.10.02 2,277 64 21쪽
48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8) +15 14.10.01 2,617 68 18쪽
47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7) +12 14.09.30 2,373 73 18쪽
46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6) +14 14.09.29 2,541 69 20쪽
45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5) +12 14.09.28 3,034 81 18쪽
44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4) +10 14.09.27 2,116 6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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