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2. 기억을 잃기 위해 기억해 온 시간(5)
태명시로 돌아온 두 영혼은 지아가 살아온 흔적을 따라다녔다. 소명동의 초등학교와 태일동의 고등학교, 지아가 자주 갔던 찻집과 도서관, 시내 교습소 등.
이른 아침 두 영혼은 지아가 걷던 등굣길을 함께 걸었고,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학생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으며, 교사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기도 했다.
“글을 읽는 건 아름다운 일인데, 이 단어는 뭐고, 어떤 심상이 드러나고, 이렇게 획일적으로 배워야 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시험이야 보편적인 진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하면 문학 못 가르칠 텐데?”
“······.”
“그러니 학생들 가르치기에는 수학이나 과학이 좋지. 딱딱 떨어지니까. 후후후.”
두 영혼은 지아가 학당에 입소하던 날 결혼한 은주의 신혼생활을 지켜보기도 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경희의 집도 가 보았다.
어느 날 오후 이들은 태명동 광장을 지나치다 손 팻말을 들고 걷는 일단의 여인들을 보고 멈춰 섰다.
“여권신장 운동을 하나보구나.”
“3월은 여성의 달이에요.”
지아는 깊은 눈빛으로 여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977년 3월 8일에 카데스 왕국 수공업 공장에서 불이 나서 사백 명이 숨졌는데, 스무 명 빼고 전부 여성이었어요. 근데 화재 후속조치랑 사망자 보상에서 차별이 있었고,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들까지 그걸 규탄하면서 궐기했죠.”
“카데스 왕국에서 인류의 가치 회복 운동이 제일 먼저 일어났다던데, 그래서 그랬나 보네.”
“네. 맞아요.”
“생명은 다를 게 없는데, 죽은 후에도 누군 많이 주고 누군 조금 준다니······.”
“우리나라는 더하잖아요.”
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된 게 불과 7년 전이었고, 여성들은 여전히 신체적 능력이 크게 필요 없는 학문 분야에도 진출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예를 들을 필요도 없는 게, 으뜸바라기 학당의 입시부 강사 열셋 중에도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대해 일문은 우등생 학당의 부당주였을 때 ‘실력이야 차이가 없지만, 여자들은 뭐 하나 시키면 불만부터 얘기한단 말이야.’라고 말했고, 강호는 ‘그건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개인차 아닙니까?’라고 했었다.
“저는 대학 가서 저 운동에 꼭 참여하려고 했어요. 누굴 계몽시키겠다, 이런 건 아닌데, 적어도 저 자신은 제대로 알고 싶었거든요.”
“여기저기서 제약이 많은 건 분명하지. 나도 남자라서 다 모르겠지만.”
“네.”
“넌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 준비를 많이 했구나. 하아.”
“어어? 미안하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강호는 미안하다고 말하려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윽고 태일동으로 들어섰을 때 지아가 또다시 멈춰 섰다.
“왜?”
“저기 저 남자요.”
“저 연인 말하는 거야?”
“네. 쟤 이름은 궁혁민이에요. 저보다 한 살 많아요.”
“아! 아는 사람이구나?”
“제 첫사랑이에요.”
강호는 지아의 눈치를 슬쩍 본 후 말했다.
“어, 그래? 굉장히 잘생겼네. 다정해 보이고.”
“쟤 따라가도 돼요?”
“그럼.”
혁민과 그의 연인은 주택가에 접어들었고, 연인의 집 담벼락 안에서 진한 포옹과 입맞춤을 나눈 후 헤어졌다.
강호는 지아의 눈치를 보았지만 지아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저 친구는 어디 살아?”
“이사 갔다고 들었어요. 여기서 멀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연인 치고 너무 빨리 헤어진 거 아닌가? 난 연애할 때 애인 보내기 싫어 죽겠던데.”
“아마 이제 시작일 거예요.”
“무슨 말이야?”
“계속 따라가면 아실 거예요.”
두 영혼은 혁민을 따라갔다가 연인의 거리에서 아까와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문제는 혁민의 팔에 안겨 걷는 여인이 아까 그가 아니라는 것.
“뭐야 저 친구? 연인이 둘이었어?”
“저랑 만날 때도 저랬어요. 그때 애들은 아니네요.”
지아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휴. 한꺼번에 여러 사람 만나는 게 가능하긴 해?”
“다른 애들은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좋다는데, 저는 저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끝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저때 기억은 지우고 싶어요.”
“후우.”
“쟤는 변한 게 없네요. 가요.”
“응.”
강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생각하다가 자리에 우뚝 섰다.
지아가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 아니야.”
이때 강호는 군인 사이에 회자하는 속언 중 ‘군인은 한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기가 아주 어렵다. 그런데 두 여자는 된다.’를 떠올리고 있었다.
강호가 멈춘 것은 으뜸바라기 학당에서 자신의 행동 때문이었다. 학당 근처에서 출퇴근하느라 아내와는 주말에만 함께하며 직업군인처럼 생활해 왔고, 평일에는 그가 힘들어 할 때마다 힘을 북돋워 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늦게 퇴근해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혼이 되어서도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가자. 후후후후.”
강호는 길을 걸으면서도 한동안 쓴웃음을 삼켰고, 지아는 이유를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두 영혼은 혁민에게서 떨어져 나온 후 한동안 태일동 연인의 거리를 걸었다. 여기는 이들에게도 익숙한 공간이다.
“여기 오니까 작년 생각나네.”
“왜요?”
“12월에 아내랑 여기 나왔다가 은우랑 지연이 봤어.”
“두 분 다 남태명 쪽에 살지 않아요?”
“연애 문화 취재하려고 왔고, 나랑 아내도 면담했어. 물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겠지만.”
“아아.”
“그때는 둘이 연인이 되기 전이었는데, 은우 그놈이 지연이한테 새로 산 목도리 감아주면서 어찌나 떨던지. 크흐!”
“풉!”
“걔들은 잘 지내려나?”
“선생님! 우리 두 분한테 가 봐요.”
“어? 그래! 연구소도 구경하고 신문사도 가보고, 재미있겠네.”
강호는 벌쭉 웃었고, 지아는 그 모습을 보고 짙게 미소 지었다.
두 영혼은 밤이 깊도록 부부와 연인들로 넘쳐나는 거리를 걸었다. 지아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면서도 강호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귀여워서요.”
“······!”
“선생님 지금 20대 같아요.”
강호는 지아의 말을 듣고 얼굴을 살짝 굳혔다. 예술관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순간 진혜도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데퉁맞게 대꾸했다.
“똑같다는 얘기네. 나는 20대 때도 이랬으니까.”
“사람들 눈에 우리가 보이면, 선생님과 제자가 아니라 오빠랑 동생 같다고 했을 거예요.”
“뭐? 아이고. 내가 살다 살다 별 소릴 다 듣네.”
“우리 지금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 으음. 영혼은 살아 있잖아.”
강호는 이 말을 하면서 새삼 지아가 고마웠다. 만약 자신이 혼자 죽었다면 청경음 교수처럼 장례가 끝나자마자 영계의 사자를 따라가 망혼주(亡魂酒)를 마시고 기억을 잃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문득 지아의 눈에 또 장난기가 어렸다.
“저기. 오빠라고 해도 돼요?”
“······!”
“오빠?”
“뭐? 나?”
“네!”
강호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팍 돌렸다.
“야! 내가 무슨 오빠야? 다 늙어가지고.”
“어차피 저승 서열은 똑같잖아요.”
“크억!”
“오빠라고 부르면 안 돼요?”
“안 돼.”
“치잇! 알겠어요. 안 할게요.”
강호는 지아의 뾰로통한 말을 듣다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아의 첫사랑이라던 아까 그 남자는 지아에게 오빠라 불렸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이것은 살아 있었다면 못 느낄 감정이었다.
“애기야.”
“네.”
“고마워.”
두 영혼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게 해 줘서.”
“저도 선생님 옆자리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허락한 게 아니야. 그냥 여기가 네 자리였던 거지.”
“······.”
“꼭 알아둬. 내가 너한테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거.”
“네. 알겠어요.”
지아의 미소는 짙은 것 이상의 묘한 표정으로 슬며시 바뀌었다.
“이제 은우한테 가 볼까? ······어? 어휴!”
“왜요?”
“나, 그 녀석 집 몰라. 연구소 위치랑, 인항동에 산다는 것만 알거든.”
“지연 언니는요?”
“걔는 아예 모르지. 정론신보는 찾아갈 수 있는데, 지금 가면 뭐하겠어.”
“······.”
“아무래도 연구소 앞에서 그놈 출근할 때까지 기다려야겠는데? 그래도 돼?”
“네. 거기까지 걸어가요.”
“그러자.”
어쨌든 두 영혼은 은우와 지연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
다음 날 새벽, 강호와 지아는 국립 연구소 정문 앞에 섰다.
“어? 저분들 황궁 사람들 아니에요?”
“으음. 오늘 폐하께서 여기 납시려나?”
“네?”
“대학교 다닐 때도 폐하께서 오시는 날마다 저랬어. 학교 정문 앞에 궁정 근위대랑 정보요원들이 신분 확인하고 그랬거든.”
“아아.”
이윽고 두 영혼이 크게 놀랐다. 은우가 신분 확인을 통과하지 못하고 정문 앞에서 뒤돌아섰기 때문이다.
“은우 선배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럴 리가 있나? 그랬으면 연구원 자체를 못 했겠지. 일단 따라가자.”
뒤이어 누군가가 은우를 붙잡았고, 강호는 두 남자가 나눈 대화를 들으며 굳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라는 저 남자분, 아무래도 정론신보······.”
“분명히 환민구 기자야.”
“선배랑 언니가 대단한 진실을 알아냈다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그것 때문에, 폐하를 이곳까지 납시게 만든 연구를 매조진 놈이, 정작 폐하를 뵐 수가 없다?”
“그게 뭘까요?”
“환 기자 따라가 보자. 그 다음에는 지연이 따라다니면 될 거야. 둘이 매일 만나니까.”
“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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