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시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12.22 01:52
최근연재일 :
2019.09.28 16:11
연재수 :
269 회
조회수 :
153,566
추천수 :
3,759
글자수 :
1,685,206

작성
19.09.28 16:11
조회
70
추천
2
글자
10쪽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9)

DUMMY

향락의 공기가 흐려지고, 대신 어수선함이 도시를 휘감고 있다.

성 밖의 전황을 분 단위 속보로 전하던 언론사들도 어느새 잠잠해졌으며, 휘황찬란하던 거리의 불빛과 코를 찌르던 향수 냄새는 어느새 무겁고 두꺼운 어둠 아래 묻힌 뒤였다. 이미 한번 죽음을 경험한 망자들은 침묵 아래 묻혀있고, 도리어 생명의 목소리를 가진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피를 흩뿌리는 역설의 시간.


“.......”


그리고 그 뒤바뀐 시간의 어둠 속을 역행하는 눈빛들이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얼굴들이 밖의 혼란, 내부의 침묵을 뚫고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는 명백했다.


“경비는 없는 거 같은데.”


“아무리 부자 도시라지만, 이런 때에 도시치안까지 일일이 생각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대답하는 혀끝에 가시가 돋쳐있다고 느껴진 것은 착각일까.

빛이 찬란한 바깥 세계에서의 그녀는 최고의 연예인이지만, 어둠 속의 그녀와 그녀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한 ‘수장’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괴리에, 그리고 그녀가 짊어진 ‘동족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안톤이었기에, 그녀가 직접 손을 더럽히는 일만큼은 없도록 하자고 다짐해왔다. 그래서 그녀가 직접 제국 땅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극구 만류하고, 그녀가 직접 나서겠다고 했을 때에도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지만,

그 광경, 그리고 그 배신 앞에서,

안톤도 더 이상 실비아의 행동을 마냥 막아설 수만은 없었다.


“.......알고 있겠지만, 이건 저들의 입장에선 테러나 마찬가지야.”


“알고 있어.”


“그리고 해결사협회와는 완전히 관계가 끝나게 돼.”


“알아.”


“적대관계가 되는 거지. 그리고 상대는 우리의 정체, 소속, 본거지도 알고 있고.”


“안다니까.”


“실비아, 지금 네가 하려는 선택이 지금까지의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걸 뒤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야.”


아무것도 없는 계단.

그랬기에 실비아의 걸음이 멈췄다는 사실을 안톤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거 같아?”


“.......”


“그냥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아니면 내가 무슨 구원자라도 된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거 같아?”

대답을 허락하지 않는, 묵직한 목소리.

“솔직히? 기분 나빠. 여긴 제국이고, 제국에서 우리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어. 그런데, 과연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짓을 한다고 생각해?”


“그럼 왜-”


“내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면, ‘소울 슬레이어’는 정말로 이걸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버릴 거야.”


“.......”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이어진다.


“‘그 아이’를 향한 그의 애정은 집착에 가까워. 그 둘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집착이 이어졌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그의 집착은 전혀 흐려지지 않았어. 오히려 더욱 짙어지고 있지. 그리고 그 결과, 그의 마음은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도 된다-’고 변질된 거야. 언젠간 그 집착이 그 둘을 포함해서 주변의 모두를 파멸로 이끌게 분명한데도.”


“.......”


“그가 힘과 권력을 얻을수록, 기회를 얻을수록 그를 막을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 제동장치는 사라지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소울 슬레이어는 엄청난 위협이야.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기회이기도 해. 그리고 나는 그 위협을 기회로 완전히 탈바꿈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을 해야 하고.”


수단.

그리고 희생.

감정이라는 가면 아래에 숨어있는,

그녀의 진정한 얼굴.

안톤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


또다시 실비아의 걸음이 멈춘다. 그리고 안톤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전기가 사라진 건물.

먹색의 배경을 씹으며 계단을 오르던 그들의 위로,

작지만 짙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너도 참 대단하네. 네 주인이 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주인의 곁에서 싸우는 대신에 여기로 온 거야?”


실비아의 얕은 조롱에, 그림자에게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당신들이 여기로 올 거라고 말해줬어.”


“누가? 주인이?”

아니다-라고, 소녀는 굳이 답하지 않는다.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네. 지금 중요한 건, 네 주인이 이 대학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어?”


“.......”


“.......너한텐 그것도 중요하지 않나보구나.”


계단은 좁지도, 넓지도 않다.

마음먹고 지나간다면 성인 4~5명도 붙어서 오르내릴 수 있는 수준.

하지만 고작 소녀 한 명이 서있다는 이유로, 안톤은 거대한 벽이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실비아.”


“그래.”


이것은 상사로서의 허락일까, 아니면 동포로서의 동의일까.

어느 쪽이든,

안톤은 움직였다.


“-!”


실비아의 은빛 머리칼이 휘날릴 정도로 격한 도약. 발판의 희생양이 된 바닥엔 균열이 일었고, 뒤이어 방향 전환의 희생양이 된 벽에도 똑같은 흔적이 남았다.

인형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무게.

미지의 합금으로 이루어진 뼈와, 현대의 기술로는 정체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물질의 관절. 그리고 묵직한 인공근육들의 향연.

그 얽히고설킨 조직들의 집합체와, 기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속도까지 가미된 ‘인형’의 도약은 균열로 끝난 게 신기할 정도로 묵직하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흡!”


죽이지는 않는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무기도 꺼내지 않았고, 살의를 담지 않았다.



안톤은 자신의 이런 선택이 치명적인 오만함이자, 안일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


모든 무게와 의지를 담은 뒤꿈치찍기.

소녀는 그런 안톤의 공격을 ‘가볍게’ 손등으로 쳐내고, 그의 자세가 무너지기도 전에 안면으로 발을 날린다. 순간적으로 두 손을 들어 막아내긴 했지만, 공중에선 그 충격을 흡수해줄 그 어떠한 완충재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실비아를 넘어 계단 아래로 곤두박질쳐야 했다. 만약 안톤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즉사를 하고도 남았을 정도의 충격.


“.......”

여기 있는 모두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저런 공격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안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인지는 실비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재키, 소라.”


부름을 받은 두 남녀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의 손에는 안톤과는 달리, 명백한 악의가 어둠을 머금고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


그럼에도, 소녀는 단검도, 권총도 뽑지 않는다. 이런 그녀의 행동이 신경을 거스른 것인지, 두 인형의 도약은 안톤보다도 거칠고, 난잡하게 소녀의 양쪽을 노리며 시작되었다.

왼쪽으로 몸을 낮춘 남자는 소녀의 다리를, 오른쪽에서 뛰어오른 여자는 소녀의 목을 노리며 단검을 휘둘렀고, 그 속도와 뒤틀린 각도가 의미하는 것은,

소녀에겐 피할 곳이 없다-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


소녀는 피하지 않았다.


“.......”


이 순간 가장 당황한 것은, 소녀를 향해 단검을 찌른 남녀였다.

찌르기는 정확했고, 소녀는 양손으로밖엔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단검은 그저 소녀의 손바닥 1cm정도를 파고들었을 뿐, 그 이상의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로 정지된 상태였다.


“무슨-”


붙잡힌 칼날. 꿈쩍도 하지 않는 자신의 무기에 당황하여 남자가 뒤로 물러났지만, 곧바로 거대한 어둠이 자신을 덮쳐오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녀가 반대편 손으로 붙잡은 여인을 그대로 들어 올려 남자 쪽으로 내리꽂은 것이다.

남자는 엉겁결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동료의 몸을 받아내야 했고, 그 엄청난 무게와 충격에 휘청이는 사이, 소녀의 오른발이 그의 무릎에 직격, 결국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동료와 함께 계단을 나뒹굴었다.


“잠깐.”

실비아가 곧바로 다시 튀어 나가려던 안톤을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안톤, 애들 무장 뭘로 시켰어?”


“.......? 그냥 평소와 같은 걸로.”


“어두워도 내가 제대로 봤어. 찌르기가 제대로 들어갔다고.”


“.......”


“그런데 살만 조금 파였을 뿐, 뼈에는 상처도 못 낸 거 같네.”

짧은 한숨. 실비아의 얼굴에 표정이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저 아이, 틀림없는 ‘군용’이야.”


“뭐? 하지만-”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튼튼한 골격, 주인에 대한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체술과 무기 모두에 능숙해.”


“.......저 아이가 정말로 ‘그거’라면, 우리로는 상대할 수가......”


“괜찮아. 저 아이는 저주에 묶여있으니까. 자기가 뭔지도 모르고 깨어나, 그 흔적만을 품고 휘둘리는 중이지.”


“.......”


“재키, 소라, 달튼, 소우자, 막시. 전원 저 아이의 움직임을 막아.”


한걸음, 계단을 오르는 실비아.

어둠 속에선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저 위에 있는 소녀와 정면에서 눈을 마주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머진 나랑 안톤이 알아서 할게.”


작가의말

부족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168시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공지 19.10.14 120 0 -
공지 안녕하세요. 공지입니다. (지도첨부 01/10 수정) +4 15.01.10 2,091 0 -
»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9) 19.09.28 71 2 10쪽
268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8) 19.09.23 49 2 11쪽
267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7) +2 19.09.18 71 3 9쪽
266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6) 19.09.12 53 3 10쪽
265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5) 19.09.07 42 3 11쪽
264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4) 19.09.02 46 3 10쪽
263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3) 19.08.28 51 3 11쪽
262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2) 19.08.22 45 3 10쪽
261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1) 19.08.11 61 3 10쪽
260 (레인) 인형의 인형 (12) 19.08.05 64 2 9쪽
259 (레인) 인형의 인형 (11) 19.07.31 69 2 12쪽
258 (레인) 인형의 인형 (10) 19.07.26 65 3 10쪽
257 (레인) 인형의 인형 (9) 19.07.21 92 3 11쪽
256 (레인) 인형의 인형 (8) 19.07.16 52 3 11쪽
255 (레인) 인형의 인형 (7) 19.07.10 58 4 10쪽
254 (레인) 인형의 인형 (6) 19.07.03 55 3 11쪽
253 (레인) 인형의 인형 (5) 19.06.15 67 3 10쪽
252 (레인) 인형의 인형 (4) 19.06.08 78 2 12쪽
251 (레인) 인형의 인형 (3) 19.06.01 79 1 10쪽
250 (레인) 인형의 인형 (2) 19.05.24 75 2 9쪽
249 (레인) 인형의 인형 (1) +1 19.05.15 81 2 10쪽
248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1) 19.05.10 74 2 13쪽
247 연재 관련 +4 18.11.28 188 3 1쪽
246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0) 18.11.17 190 2 11쪽
245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9) 18.11.12 126 4 14쪽
244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8) 18.11.07 139 2 11쪽
243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7) 18.11.02 115 2 11쪽
242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6) 18.10.28 110 3 11쪽
241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5) 18.10.23 127 2 12쪽
240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4) 18.10.18 133 1 10쪽
239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3) 18.10.13 102 2 12쪽
238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2) 18.10.08 114 2 12쪽
237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 18.10.03 112 3 11쪽
236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10) 18.09.27 112 3 11쪽
235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9) 18.09.22 116 2 11쪽
234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8) 18.09.17 111 2 12쪽
233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7) 18.09.12 121 2 12쪽
232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6) +1 18.01.14 171 3 13쪽
231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5) +2 18.01.09 189 3 12쪽
230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4) +2 18.01.04 163 3 13쪽
229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3) +1 17.12.30 172 4 13쪽
228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2) +2 17.12.25 149 4 11쪽
227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1) +1 17.12.19 180 3 12쪽
226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10) +4 17.12.15 204 3 14쪽
225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9) +2 17.12.10 208 4 12쪽
224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8) +2 17.12.03 158 4 12쪽
223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7) +1 17.11.27 141 4 15쪽
222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6) +2 17.11.22 176 4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