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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와 모래시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레이브란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6.18 13:30
연재수 :
91 회
조회수 :
19,080
추천수 :
117
글자수 :
295,074

작성
15.10.1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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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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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8쪽

56

DUMMY

"...미안. 서론이 좀 길었나? 하지만 이 이야기도 처음에 해 줘야 정확히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싫더라도 이제 본론이니까 잘 들어달라고."

다시 들은 서론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날 보면서 그녀는 관심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끝마칠 뿐이었다. 그 모습에 혼란스러움만은 그대로였지만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 날, 나는 거기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이미 사라진 남자를 향한 저주만을 쏟아붓고 있었어. 집이 불타기 시작한 건 정오 무렵이었지만, 내 저주는 자정까지 계속되었어. 너무나도 지쳐있었던 나머지 고통스러운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 그러다가 결국 몸이 못 버텨서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어. 마침 그 남자도 떠난 지 오래라 이대로 얼어죽기 딱 좋다고 여기고 있었지. 그래, 그럴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말하는 것과 그다지 일치되지 못하는 말투와 어조, 표정, 그리고 분위기. 말하는 내용은 살벌하건만 그녀에게 있어선 아무런 것도 아니란 듯이 말하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 불편하다.

"죽을 수 있다. 그 때 바닥에 쓰러진 채로 미소를 짓고 있던 아이의 생각은 그게 다였어. 아까 성공시키지 못했던 도망을, 지금은 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마지막까지도 사랑해 마지않았던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아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거란 생각만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여전히 그 남자는 날 도망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야."

여전히 무표정인 채로 짜증난다는 듯이 말을 내뱉는 그녀. 그대로 몸을 뒤로 기대어 기지개를 키는 모습은 그녀가 지금을 따분해하고 있단 걸 보여주고 있었다. 아, 하품도 하네.

"몸이 슬슬 한계를 향해가고 있던 때, 그 남자가 돌아왔어. 달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지. 바람에 나부끼는 풀소리까지도 들리지 않는 조용함을 깨면서 다가온 그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고만 있었어. 몸 상태가 안 좋았던 탓에 날 동정하고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어. 안 보였거든, 그 얼굴이. 구해져놓고서도 다시금 자신의 의지로 죽으려는, 만신창이의 날 보는 그 눈빛이 말이야."

"애초에 보고 싶기는 했던 겁니까."

생각에도 없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하고 싶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이 질문을 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이 이야기를 끌고 싶었던 걸까.

"글쎄? 하지만... 보고 싶지 않았으려나."

"어째서죠?"

내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 카펠라를 다시 밀어내면서 되물었다. 내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자, 몸이 밀려나는데에 아쉬워하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그저 손을 겹칠 뿐인 카펠라. 실은 내가 그녀를 온힘을 다해 밀어내려 한다고 해도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이라면 그녀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그런 괴물이니까.

"그건 말이야, 의외로 단순한 거 아닐까? 날 봐. 난 그 때로부터 조금도 자라지 않았어. 그 때는 보이는 그대로의 나이였으니, 정말로 '아이'였다고."

"그런데요?"

이 쯤 되면 슬슬 그녀 또한 눈치를 챘을 것 같다. 이렇게 계속 튀어나오고 있는 쓸데없는 질문들은,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일 뿐이란 걸...

"내 어릴 적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부야. 아버지 또한 어머니 못지 않게 날 사랑했지만, 집에 계시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엔 대부분 일을 나가셨으니까. 그런 시간동안 난 어머니와 줄곧 함께였어. 상냥하고, 자상하고, 누구보다도 날 사랑... 했던."

그녀가 말을 아주 잠깐 동안 멈추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왜 반응해 버리는 거야, 내 몸은!

"그러니까 더욱 누군가의 사랑이라던가 호의에 달라붙게 되고 마는 거지. '아이'라는 건, 그렇게나 여리고 섬세한 존재들이니까. 섬세하고 또 섬세해서, 망가지기도 쉬운. 그렇지?"

"네, 정말로 그렇네요."

눈을 감고 일상적으로 대답을 해주려 노력한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내 이런 반응을 즐기고 있는 거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눈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정말로 나에게 호의를 지니고서 손을 뻗은 걸까, 단순히 지나가던 길에 쓸데없는 정의감에 젖어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날 이용하기 위해서 손을 뻗어주었던 걸까... 같은 건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순수하지 못한 것 아닌가요?"

"글쎄? 애초에 아이가 순수해야 한다는 건 누가 정한거지?"

여유로운 미소를 얼굴에 드리우며 얼굴을 들이미는 카펠라. 너무나도 당당한 그 얼굴은, 마치 당연한 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의 그것과도 닮아 보였다.

"순수라. 그래, 말이 나왔으니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가장 순수한 색이 뭐라고 생각해?"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더욱 짙게 물들이며 카펠라가 장난스레 질문을 해왔다. 가장 순수한 색? 그야...

"단, 흰색은 답으로 제시할 수 없어."

"...네?"

"못 들은 거야? 귀가 안 좋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방금, 흰색은 답으로 제시할 수 없다고 하신 것 맞나요?"

"어. 잘 들었네?"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순진하게 웃고 있는 카펠라.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마는 나였다.

하아, 뭘 대답으로 내놓을까. 보통 '순수'하다고 하면 흰색을 떠올리지 않았었나.

"뭐야, 왜 갑자기 대답을 못해? 넌 그래도 꽤 재미있는 녀석 같았는데..."

"검정."

"에...?"

"검정이라고 했습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무 색이나 내뱉었다. 근데 어째선지 카펠라가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즐거워 보이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검정, 이라. 역시 넌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대답이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아니, 오히려 너무 마음에 들어서 탈이야. 정답이거든."

내 질문에 대답하며 그대로 앉아있던 책상에 드러누워 버리는 카펠라.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전혀 모르는 멜로디였지만.

"난 말야, 무려 천 년이나 되는 시간동안 살아왔어. 정확히는 천 년도 넘지만."

"네, 알고 있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나도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해야 했어. 난 왜 죽지 않지? 뭐, 무슨 일이 날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이해하지만 어떻게 해서 죽지 않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들 말이야. 그러다 결국 도달한 건 인간에 대한 의문이었어."

몸을 뒤척이며 즐거운 듯 작게 키득거리는 카펠라. 그러면서도 말을 잇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다.

"사람을 물건에 비교한다면, 뭐가 좋을까? 같은 거 말이야. 나처럼 시간이 너무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생각해 본 적 있을 거야. 지금 당장도, 그 언젠가인 나중에도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 내 나름대로의 답만 알려주자면, 인간은 스케치북 같더라고."

"스케치북...이요?"

"그래, 스케치북. 너무 하얗고 또 하얘서, 모든 것에 너무나도 쉽게 물들고 변해버리는. 이젠 하얗다고도 할 수도 없을만큼 투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긴 하는. 인간이란 건, 그런 스케치북 같더라고."

스케치북이라. 이건 방금 듣지 못했던 이야기인데...

"근데, 유일하게 예외가 하나 있어."

"...네?"

"아이는 스케치북이 검게 물들어있거든."


작가의말

조회수가 1800을 넘었건만, 한 달 만에야 글을 올리네요. 연말이 가까워 올수록 연재수가 줄어들다가 급격히 늘어날 예상이 드니, 가끔씩은 들려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시간이셨나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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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60 15.12.31 219 1 8쪽
61 59 15.12.29 222 1 7쪽
60 58 15.11.19 211 1 7쪽
59 57 15.11.16 226 1 7쪽
58 [할로윈 특전] 또다른 레이브란의 이야기 15.10.31 230 1 10쪽
» 56 15.10.14 284 3 8쪽
56 55 15.09.13 229 1 8쪽
55 54 15.08.17 246 1 7쪽
54 53 15.07.29 265 1 10쪽
53 52 15.07.27 396 1 7쪽
52 51 15.07.25 342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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