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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works
작품등록일 :
2015.06.21 20:32
최근연재일 :
2020.07.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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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06.2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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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쪽

세탁소는 안 되는 이유

DUMMY

어느 순간

나는 어떤 음료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만드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조법을 적어둔 종이도 나에겐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음료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준비하고

일련의 제조과정을 떠올리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그라인더의 둔탁한 소리를,

에스프레소 기계의 기괴한 소리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음료를 만들지 못하는 카페의 주인은 의미가 없다.


나는 문을 연지 일 년 남짓한 카페를 정리하고

그곳을 떠나왔다.



예전 카페의 이름은

끝에 관한 단어와 시작에 관한 단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 삶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많은 것들을 끝내고 싶었고,

그러나 그건 많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되지 않는 일들이었고,

더 이상은 미루고 싶지 않아

끝내는 일을 시작하고 싶다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끝을 내는 일은 쉽지 않았고

다행히도 몇 가지 일들과 몇 명의 사람들은 시간에 휩쓸려 잊혀졌고


그러나 끝내고 싶었던 것들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나는 카페를 끝내버렸다.


문을 닫은 카페의 앞에는

이제 카페가 끝났다는 뜻으로

카페의 이름 뒤에 끝에 관한 단어를 한 번 더 적어두었고


그것은 끝에 관한 단어가 끝이 났다는

기묘한 뜻으로 읽혀지기도 했다.



나는 다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끝에 관한 단어와 시작에 관한 단어가 끝나면서

다른 시작도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한 동안

모든 것이 끝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내가 많은 것을 끝내기 위해

카페를 만들었던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왜 카페여야만 했을까.

세탁소면 안 되었던 것일까.


끝내 음료를 만들지 못하게 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했다.

음료를 만드는 건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있던 곳에서 멀리 떠나와

한동안 끝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았고

카페에 앉아있는 것이 괴로워

그곳에 있는 다른 카페에도 갈 수는 없었고

가끔 편의점에 앉아 캔에 담긴 커피를 마시곤 했다.


편의점엔 많은 사람들이 왔다.

라면 하나를 나눠 먹는 다정한 연인들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다투는 연인들도 있었고


그리고 그곳에서도

혼자서 외롭게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아주 오래전, 혼자서 울고 있었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외롭게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아주 오래전, 외롭게 있었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을 - 그리고 오래전의 나를 -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위로해주기 위해 그 사람의 옷을 벗겨 빨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카페의 주인이 아닌 나는,

그렇게 위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편의점에 들어오면

계산대로 가서 내가 먹은 것과 같은 종류의 커피를 하나 더 사서

그들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고맙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제서야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카페여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탁소면 안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나에게 얼마 남아있지 않은 돈으로

작은 가게를 하나 얻었다.


그 가게에는 주방도, 상하수도 시설도 없었다.

이제 그런 것은 음료를 만들지 못하는 나에게 필요가 없었다.


대신 유명한 브랜드의 이름이 적힌 큰 냉장고 하나를 무료로 들였고

거기에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진 음료들을 채워 넣었다.


튼튼하지만 불편한 의자와

음료 두세 잔이 겨우 올라가는 테이블을 몇 개 놓았다.

이전처럼 바를 만들 만한 자리는 없었고

계산을 위한 카운터을 구석진 곳에 놓았다.



예전과 같은 카페는

앞으로 다시는 시작할 수 없을지 몰랐다.

그런 의미의 카페는

내안에서 영원히 끝나버렸을지도 몰랐다.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간다는

그런 의미였다.


나는 정리가 끝난

불 꺼진 가게에 앉아

끝나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시작된 모든 것들이

언젠가 끝나야만 한다면

어떤 것도 끝나지 않도록

아무것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다 하지 못한

끝낸다는 일 조차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 그것은 지난 카페에 모두 버려두고 왔다. -



그저

이미 끝나버린 것들과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의 시간들을

소중하게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서 가게의 이름은

끝을 의미하는 단어와

남겨둠을 의미하는 단어로 정했다.


돈이 거의 남지 않아

간판은 달지 않기로 했다.

세탁소는 안되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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