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46)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럼 소신은 이만.......”
잠시 후 주룡이 태사의에 몸을 깊숙이 박으며 깍지를
끼었다.
“활화산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약 일 다 경하고도 반 각 정도 더 시간이 흐른 이후
견정곽이 시선을 들어 사일록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한데 웬일인지 자신이 조금이나마 위축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이한 전율이 일고 왠지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사차주의 진심어린 의중은 무엇이오?”
견정곽도 동창의 우두머리들 중 한 사람답게 피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치고 들었다.
“견대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견정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몸통은 모르오.”
“꼬리만 아는 것이오?“
“그렇소.“
“그럼... 머리는 더더욱 모르겠군요.”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해 주셔서 고마웠소, 견대인. 다시 방문해 주실
날만 기다리겠소이다.”
“아, 근데...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무슨 소리요?”
견정곽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나가면서 사일록의 처세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아깝군.’
더 이상도 아니고 더 이하도 아닌 적당한 선에서
체면과 위신을 지켜주며 견정곽을 돌려보낸
것이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차주님이 뭘 모르신다는 거죠?”
“지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지.
잊어.”
“근데 다시 방문할 날이라고 했습니까?”
섭문이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되물었다.
사일록은 그저 서류철만 뒤적이며 다음 호출자를
고르고 있었다.
그때 여인향이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차주님, 정말 모르고 계신 것입니까?”
난데없는 그녀의 질문에 섭문은 어리둥절하여 여인향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사일록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일록도 의아한 표정으로 서류철에서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시고 계셨죠?”
“그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아니 여선배, 대체 궁금해서 그러는데 말이오!”
“숫자 이야기야.”
“숫자? 그게 무슨 황당한... 아, 맞다! 그 숫자,
칠(七)!”
여인향이 방긋 웃더니 사일록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 나도 궁금하긴 했다. 적어도 하북성 십대고수 중
두 명이나 등장했고, 죽어 나갔는데 그들에게서 그
숫자가 나오지 않았어. 그들 두 사람은 거기에는 관련이
없다는 것인데... 기다려봐야지.”
잠시 시간이 흐르고 섭문이 나섰다.
“차주님, 서류 정리를 하다가 이상한 걸 하나 발견하긴
했는데 이게 도무지 황당하여 좀.......”
“말해 봐.”
“약 삼십여 년 전 사건인데... 그 당시 이 나라가 막
들어서고 한참 혼란스러울 때인데 수많은 반역도
무리들이 처형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휴우... 정말 그때는 살벌했다고 들었습니다.”
“살벌이란 단어만으로 채울 수는 없어.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고 자식이 부모를 처형하고... 지옥의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어.”
여인향이 몸서리를 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태어나지 않았던 게 천운이지.”
“그런데 차주님, 그 당시에 서안의 지부란 분이었는데...
그 이름이... 아, 그래! 이만(李滿)이란 지부가
있었습니다.”
“근데?“
“근데 그게... 너무 황당하여... 그 사람의 기록 후반부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사람만?”
“예, 차주님!“
갑자기 사일록이 일어나서 그에게로 다가가더니
뒤통수를 때렸다.
섭문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 돌아보는데 사일록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큰 거 건졌네.”
여인향도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후배, 수고했다, 정말!”
사실 이번 사건은 너무나 막막했다.
한데 섭문이 대어를 하나 낚은 것 같았다.
“자넨, 모든 일에서 제외야. 단 이만이란 자의 기록을
반드시 찾아내, 지옥의 뒷구멍을 후벼 파더라도 찾아내,
알겠나?”
“옛, 차주님!“
“아, 왜 그런 줄 아나?”
“동기 부여입니다!”
사일록이 시익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어서 가봐?”
섭문은 나가고 여인향은 남았다.
갑자기 여인향은 가슴이 두근거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만큼 그녀가 어린 것도 아니고 미련한 것도
아니었다.
완숙미 넘치는 몸매처럼 그녀의 정신도 아주 성숙했다.
태연한 표정으로 얌전한 새색시처럼 굴었다.
‘한데 그게... 동기 부여라고? 느닷없는데... 왜 믿음이
가지.’
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시선을 든
사일록이었다.
“누구냐?”
“예, 차주님.
“안대인께서 오셨사옵니다.”
“모시거라.”
여인향은 숨만 들이켰다.
그녀가 바로 하북성 출신의 추관이었다.
그래서 성만 들어도 눈치를 차렸다.
“승선시정사사 대인께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고개 들어라.”
“예? 아, 옛!”
“자넨 살수국 소속이야. 그리고 지금 살인사건 수사
중이야.”
사일록의 그 한 마디에 갑자기 어디서 힘이 솟구치는지
당당해졌다.
당당한 행보로 안송이 들어서자 여인향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거렸으나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안송은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사일록에게 먼저 시선을
주고 나서 걸어와 두 개의 의자 중 좌측에 앉았다.
그는 그녀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태연하게 모호한
태도까지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한 방이 날라왔다.
“어허, 여추관? 아... 이제는 수사관이지. 날 모른 체
하나?”
“아... 반갑습니다, 대인.”
그녀는 단순하고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대인께서도 팔 인의 결사대 차출에 관여하셨죠?”
“그렇소.“
“역시 이름은 밝힐 수가 없겠죠?”
“그렇소.”
매우 단순 명료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자의 죽음에 다소의 미안한 기색은 느꼈소?”
대답이 없었다.
“그들 중 누가 첩자라고 보시오?”
즉시 고개를 들어 사일록을 직시했다.
여인향이 피식 웃었다.
‘하여튼 차주님은... 멋지셔!’
“아니면 명령권자 중 누가 첩자라고 보시는 것이오?”
‘둘 다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킥킥.’
절로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속으로
푸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아직 거기까지는.......”
“아, 모른다고 발뺌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소?”
“사대인!”
안송이 단호한 음성으로 사일록에게 소리치며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하나 사일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시선도 피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여인향은 이상한 걸 느꼈다.
‘혹시... 첩자가 없는 건 아닐까?’
그때였다. 정말 귀신이 따로 없었다.
“그럼, 내부 고발자는 있었소?”
여인향은 입이 따악 벌어졌다.
이런 걸 배워하는 것이었다.
돈을 주고서도 배우지 못할 이런 걸 배워야 한다는 걸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었다.
그런데 곧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배운다고 될 게 있고,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지금 사일록이 취하고 있는 이 심문 방식은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따라올 수 없는 그 만의 특허권이라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돌아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부학에 정통한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안송의 반응이 매우 괴이했다.
반발심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부감도 아닌 묘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호흡을 조절하더니 무언가 후회하는 듯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사라져버렸소.”
“잡을 수 없었소?”
“그 자에 관한 건 모조리... 거짓이었소.”
여인향은 즉시 알아차렸다.
이 폭발 사건 조직이 엄청나게 거대한 집단이란 것을.
이렇게 되면 이 사건 해결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절로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더욱 문제는 자신의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얼굴은 기억하오?”
“역용술이란 걸 이용하지 않았다면... 기억하오.”
“여수사관?”
“아......!”
안송이 사일록이 여인향을 부르자 곧 탄성을 질렀다.
“아, 여 수사관이 용모파기를 그리는데 일가견이
있소이다.”
“그, 그걸 어떻게?”
승선시정사사와도 같은 분이 어찌하여 말단 관리의
특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자넨 모를지 몰라도 하북성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어. 그래서 자네가 이곳으로
뽑혀오지 않았겠나?”
그제야 이해가 갔다.
“시작할까?”
“예, 대인.“
“아, 사차주? 혹시 등하불명이라고 아시오?”
사일록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눈빛이 묘하게
빛이 났다.
‘아직도 모르고 있다. 등하불명... 이건 마치 연결고리
같기도 한데... 뭐지?’
갑자기 온 몸에서 흐르는 기이한 기운에 의해서
사일록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눈을 뜬 채고 숨을 쉴 수가 있다는 자신감으로
연못 깊숙이 서서히 가라앉는데 심연의 비밀이
모조리 풀어지는 것 같았다.
두 눈도 또렷했고, 마음도 청결했으며 숨마저 쉴 수가
있는 이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다.
***
얼마나 초조한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고의성이 다분한 시간 때우기 식의 이런 불안감
조성에도 박혁로는 미동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돌격할 태세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서 있는 그 시간에 운기행공도 했고, 온 몸에 흐르는
충만한 이 기운을 이제야 써 먹을 데가 왔다고
느꼈다.
“자넨, 가만히 여기 있어.”
“선배?“
“잔말 말고!”
박혁로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모용이슬은 반박하려다가 참았다.
진지함을 충분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니 아마도 다른
복안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알겠어요.”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박혁로가 다시 쳐다보았다.
모용이슬은 뒤로 물러서다가 우연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눈빛을 보았다.
그 순간 무언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문이 열리는 즉시 도주해!”
그가 음성은 낮추어서 힘주어 경고했다.
“선배, 그 무슨 황당한?”
“내 말대로 해!”
“안 해요! 나만 살자고.......”
“둘 다 뒈져서, 여길 비밀로 할래? 아니면 알려서
비밀을 풀래?”
아주 절박한 음색을 느꼈다.
“”하, 하지만.......“
“안다, 알아. 후배가 날 사랑하는 거.”
그리고 한 쪽 눈을 찡긋하더니 돌변하여 싸늘하게
경고했다.
“열리는 즉시 도주해.”
끼이이이.......
그때 유령의 곡소리처럼 추임새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모용이슬은 소름이 돋았다.
고의성이 짙은 것이라고 해도 이런 장소에서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박혁로는 피식 웃더니 서서히 열리는 문을
보고만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박혁로는 즉시 움직일 줄 알았는데 가만히
서서 다시 고함을 질렀다.
“야, 이것들아! 감히 수사관 나리가 왔는데... 대접이
이따위야!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박혁로다운 반발이었다.
잠시 동안 아무런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고함 소리가 자신에게 경고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저벅저벅.
그때 박혁로가 불시에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용이슬이 움찔하다가 조금 전 박혁로가 다짐 둔
것을 잊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싶어서 한 보를 떼려고 하는데
박혁로의 냉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 마.”
모용이슬은 들어 올린 발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가지 않으면 향후, 안 본다.”
그녀는 냉정하게 팩 돌아서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을 흐르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죽어라 달렸다.
이대로 숨이 막힐 때까지 살수국으로 달려갈 것이다.
누구라도 막는다면 동귀어진을 하더라도 죽이고
말겠다.
그녀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바람아 부는 것도 몰랐고, 달려 나가는 것도 잊었다.
박혁로는 열린 문 안으로 천천히 걸어가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내부가 환하게 밝혀졌다.
약 이십여 명의 인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무 명은 일단 무사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인물들이고,
복면을 쓴 세 명의 인물은 아무리 보아도 관부 요인
같았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띠는 인물은 가장 후방에 서 있는
세 명의 인물이었다.
“젠장! 걸어서 나가긴 틀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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