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0_사_무
흙은 흙을 머금었고, 나무는 죽은 자신을 되살렸다. 무린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죽어가던 집은 제 모습을 되찾았다.
두억시니, 환가의 분류법대로라면 ‘신’이 된 무린의 능력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 원하는 성질로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린은 자신의 욕심이 과해 집이 지나치게 튼튼해지거나, 밖에서 봤을 때 크게 티가 날 정도로 변하지는 않도록 조절해야 했다. 돌아오려고 했던 장소였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두억시니들을 손님방에 재운 뒤, 무린은 대청마루에 혼자 나와 앉았다.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였다. 등 뒤의 안방은 문을 활짝 열어둔 채, 그녀는 굳게 닫힌 대문을 응시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달빛이 그녀 옆자리를 채웠고, 그것이 일종의 선물임을 깨달은 무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너무나도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처럼 예리했고, 가족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웠다. 또한 그녀는 강했다. 전신에 피를 흠뻑 묻힌 채 들어오는 날도 잦았다. 언제나 무린은 어머니의 무술을 동경했고, 따르고자 했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옷깃조차 스친 기억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무린을 닦달하진 않았지만, 차근차근 그녀에게 생존을 위한 방법을, 마음가짐을 가르쳤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보통의, 그러니까 무린이 아는 다른 린들이라면 쉽게 꺾일, 무너질만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과 해야 할 일을 판단하는 건 훈련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어머니는 무린이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검은 물을 마신 뒤 알게 된 지식은 이 땅과 하늘의 과거에 대한 것이 많았다. 보통의 기린이라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는 양이었지만, 두억시니가 된 무린은 그 모든 정보를 감내하고도 상당히 여유로웠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줄곧 궁금했던 것을 추적했다. 그건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어디서부터 정해졌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해한, 볼 수 있는 과거의 기억들은 일정 이상의 과거, 그러니까 모든 대지에 꽃이 단 하나밖에 없었던 시점보다 더 전의 일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의 일들에서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 했던 일들의 이면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그녀가 이가를 떠나 홀로 남하하다 만났던 다섯 명의 도적들이 운반하던 것이 운철검이라는 것. 그리고 장무기를 습격했던 그 날, 습격 직전에 휘린과 수린이 장무기를 만나는 모습과 장무기에 의해 전세가 역전된 직후 그들 손에 천린과 가주가 죽었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무린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상린과 하린이 생존을 위해 남하하던 도중, ‘그 또는 그녀’와 마주쳤던 정도였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땅이, 꽃이, 하늘이 기억하고 있는 그 순간만을 들어 알 수 있을 뿐이었으므로 당사자들 간에 어떤 대화 같은 건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자세한 내용은 직접 발로 뛰어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첫 번째 목표는 이곳, 사가였다.
그 날 밤 도대체 무슨 거래가 있었는 지. 어째서 다른 수많은 기린을 내버려두고 ‘사무린’을 팔아야 했는 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직접 들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복수심 같은 건 없었다. 가문은 언제나 그녀를 버릴 수 있었다. 어머니의 가르침도 그러했다. 가문이 나를 버릴지언정, 내가 가문을 버려선 안되는 것이었다. 그 때는 그 가르침이 이 사가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그 말의 뜻은 환가에 대한 것이었던 게 분명했다.
어머니는 환가를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끔찍한 지옥을 벗어난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 또는 그’가 나타나 무언가 언질을 했다. 그 순간의 이야기는 무린이 아무리 집중해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대략적으로 그건 환하린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몸을 빌어 태어날 자신, 그러니까 환가의 마지막 가주에 대한 이야기였을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유달리도 엄했던, 그리고 강했던 어머니가 짊어졌던 짐에 대해 무린은 애처로운 동정심을,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부글거리는 분노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걸 부과해야 했던 저 더러운 존재들의 놀음. 그것에 끌려 여기까지 온 자신. ‘그깟 꿈’에 놀아나버린 수많은 기린들······.
더 이상 끌려다니는 건 사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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