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3_하얀 그림자
장가에서 두억시니들과 싸우면서 아름답던 흰 옷은 전부 찢어져 사라졌다. 그래서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추락하는 피는 무엇도 적시지 못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는 피가 닿을 자리가 없었다. 기린의 몸 대신, 분노가 담긴 새까만 ‘바다’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왜 이 모든 걸 시작하게 만든 거야?”
무린은 더 이상 장무기를 바라보지 않았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와 대화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자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
땅에 쓰러져 있던 오비르니드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최초로, ‘그 또는 그녀’가 적개심을 숨기지 않은 채 하늘을 향해 달려나갔다. 장무기의 입에서 새어나온 탄성이 그 궤적에 이끌려 하늘로 흩어졌다.
“오오, 네가···. 네 목소리가······.”
깊은 우물 속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린이라고 해도 자연스레 두려움에 빠진다. 그건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어두움’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건 이 땅의 것이 아니다. 이 하늘을 찢고 들어와 저 안에 고여있는, 좀 더 먼 곳의 것.
무린의 발 밑에 깔린 용의 사체들마저 숨을 죽였다. 적막과 고요가, 검은 하늘의 찢어진 부분을 응시했다.
-안돼!
오비르니드의 목소리가 우레처럼 울려, 균열에서 쏟아지는 ‘어두움’을 밀어냈다. ‘그녀 또는 그’의 몸뚱아리인 검은 하늘은 뿔 같은 가지를 뻗어 하늘의 구멍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메우는 속도보다, 쏟아지는 것이 더 많았다.
마침내 ‘어두움’이 땅에 닿았다. 오비르니드의 필사적인 저지로, 겨우 무린만한 크기의 한 방울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더 많은 양의 ‘어두움’은 검은 하늘에서 오비르니드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린은 피를 훑어내고 ‘어두움’을 향해 걸어갔다. 장무기는 한 발자국 떨어져 서, 방해하지 않았다.
「아.」
한 방울 뿐이었지만, 그것이 열려 낸 목소리는 지상의 모든 것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두억시니들이 머리를 쥐어잡고 쓰러지는 게 느껴졌다. ‘바다’를 품은 무린조차도 무릎이 떨릴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그건 무린의 뜻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은 자신과 대등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돌아가라!
하늘의 구멍을 메우면서도, 오비르니드의 목소리는 한방울의 ‘어두움’에 가닿았다. 그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하늘 이전부터 시작된, 훨씬 더 멀고 먼 소리의 잔향. ‘그 또는 그녀’의 짙은 분노가 무린의 몸 안에 깃든 ‘바다’를 짓이겼다.
「우.」
하지만 두 번째 말이 오비르니드의 힘을 산산히 흩뜨렸다. 아니, 덮어씌웠다고 할까. 첫 번째 한 마디가 이곳을 가늠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무린은 더딘 걸음을, 제 무릎을 밀어냈다. 혼이, 몸이 발버둥치며 거부하는 것을 자신의 ‘의지’라는 이름으로 관철시켰다.
몇 번 더, 오비르니드의 시도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소리도 없이 흩어졌고, 그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무린은 마침내 이 작은 ‘어두움’의 지척에 닿았다.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그녀 안의 ‘바다’도 들끓었다. 이 작은 것은, 전하기 위해내려온 것이다. 무린의 질문, 이 세계 그 누구도 해본 적 없는 바깥으로의 의사소통에 대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
“대답해.”
「에.」
‘그녀’가 말에 이어 무언가를 내뻗었다. 단지, 한 방울 뿐인 ‘어두움’에서 뻗어나온 줄기에 불과했지만 무슨 표현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무린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테.」
땅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번쩍이는 흰 빛과 함께 거대한 날개를 가진 자가 하늘로 치솟았다. 작은 ‘어두움’은 무린을 끌어당겨 제 안으로 삼켰다. 무린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거대하고도 거대한, 그리고 희고도 흰 용이었다.
「우름.」
0113_하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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