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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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spberry
작품등록일 :
2016.04.2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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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1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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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스승

DUMMY

"아마 이전의 지식은 너희들이 찾고 있는 무한동력에 있을 듯 하구나."



프리드리히는 도로스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인간, 동물형 수인, 곤충형 수인, 그리고 자동인형. 도제에게 머문 시선은 자그마한 안타까움을 띄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그 편린 뿐이란다."



그래도 괜찮겠니? 말없이 묻는 시선에 도로스들은 뭐라 할 것도 없이 만장일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모든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세상 사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 풀리던가. 이런 단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일행들은 초조하게 프리드리히를 기다렸다. 그는 마치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프로바움이 조그맣게 과거의 정보를 훑는 중이라고 속삭였다. 그가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내용을 적절하게 속삭인 덕분에, 탐구심을 참지 못한 닥터 윌슨이 프리드리히에게 달려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바르르 잘게 떨리는 그의 등껍질과 속날개가 지금 그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카지트는 슬그머니 닥터 윌슨의 앞에 섰다. 여차하면 닥터 윌슨을 말릴 셈이다. 물론 경우와 상황을 아는 귀뚜라미였지만, 그간 보여준 학문적 호기심은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혹시나, 혹은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는 편이 낫겠지.



그러나 닥터 윌슨의 강렬한 고고학적 열망이 인내심을 끊어내기 전에, 프리드리히가 눈을 떴다. 잠시 일행들의 머리 위를 응시하며 정보를 정리한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 정보를 얻었을 정도니, 너희들 또한 위대하신 오즈에 대해 알고 있겠지."



앞뒤 잘라먹은 말이지만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 정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나눴던 이야기를 까먹을 정도로 멍청한 이는 도로스들 가운데 없었다.



그들이 맞다는 듯 긍정을 표하자, 프리드리히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딘가 먼곳을 바라보며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700여년 전 지상이란 곳에서 대재앙이 벌어졌을 때, 위대하신 오즈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내려오셨단다."



게름하르트에게 들었던 이야기. 그러나 오즈에 대한 찬양과 자부심으로 점칠된 그의 이야기완 다르게, 프리드리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좀 더 자세하고 객관적인 정보다.



"오즈께선 저 위에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만이 모든 인류의 희망이라고 말씀하셨지. 다만 말했다시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대체 어떠한 존재인지는 나도 알 수 없구나. 오즈께선 가장 중요한 정보들을 무한동력에 담아두셨으니, 무한동력을 찾으면 알게 되겠지."



어쩐지 씁쓸하다는 어조였다. 하긴 창조자가 자동인형이 아닌 무한동력에 중요한 정보들을 저장했다는 건, 자동인형보다 무한동력을 더 신뢰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상이란 곳으로 향하는 열쇠를 두셨는데, 그게 바로 너희들도 아는 무한동력이라 부르는 물건이란다. 다만 위대하신 오즈께서 그 무한동력의 사용자를 자신과 같은 순수한 피로만 제한하셨지."



순수한 피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인간의 피. 오즈는 자신과 같은 인간만이 무한동력을 다룰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걸어둔 것이다. 그렇기에 게름하르트 또한 도로스에게 자격을 운운하며 순순히 이야기를 해준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인간이란 종족이란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이들이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대목에서 프리드리히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지상으로 향하는 열쇠가 있어도 그 사용자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어찌본다면 자동인형들의 처지와 비슷했다. 최초의 자동인형 이래로 오즈의 명령에 따라 끊임없이 정보와 기록을 모으고 보존해왔으나, 정작 그 명령을 내렸던 이는 더 이상 없다. 그 후계 또한.



더 이상 지상으로 향할 방법을 잃어버린 이 닫힌 세계처럼 그들 또한 열화되는 정보와 함께 천천히 마모되어 가겠지. 그리고 천천히 영락한 끝에 녹슬고 닳아빠진 파이프 속에서 고철로 화할 것이다. 그렇게 설계되었기에 자동인형들은 운명의 굴레를 벗을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행히 그의 기색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프리드리히의 이야기에 한껏 집중했던 도로스는 어느 순간 그를 감싸고 있는 운명의 실타래를 느꼈다. 그의 감이 고하고 있었다. 그들의 길고 긴 모험의 종착지는 저 위의 지상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감이 경고했다.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지나쳐야 할 수많은 난관을. 이미 수없이 많은 위험과 고난을 헤쳐나왔지만 아직 조금 더 남아있다고.



도로스는 홀린 듯 방독면을 벗었다.



맨들맨들한 흰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 보통의 수인들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특징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와 기록을 품고 있는 자동인형은 그것이 어떤 종족의 특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로스의 얼굴을 본 프리드리히는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퍼지는 경악.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기쁨과 환희로 탈바꿈 했다.



"너는."



인간이로구나.



프리드리히는 눈가를 곱게 접으며 웃었다. 후후후 웃던 그의 웃음소리는 이윽고 점점 커져, 내부를 가득 메웠다. 체면따윈 내던져버리고 소리높여 웃는 모습은 자동인형이라기 보단 사람의 그것에 가까웠다.



"하하하! 아직 그분의 유지가 흐르고 있구나!"



하하, 웃는 모습에선 잔잔한 즐거움과 기쁨이 묻어나왔다. 새로운 세계. 열린 가능성. 순수한 기쁨을 담은 눈길이 도로스들과 프로바움을 훑었다. 특히 프로바움에게 조금 더 길게 머문 시선. 눈길을 거둔 프리드리히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정리하곤,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약해져갔단다. 대재앙의 영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그 정보 또한 우리들에게 허용되지 않았으니. 어쨌건, 이대로 안된다는 것을 느낀 인간들은 진화하기 시작했단다."



진화하기 시작했다?



아리송한 말에 도로스들은 의문을 표했다. 특히 의사인 닥터 윌슨에겐 더욱 큰 의문이었다.



"진화,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진화는 차,라리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 돌연변이,들 중에서 주변환경,에서 살아남기 용이,한 특징을 가진 것,들이 주류가 될 때, 그,것을 진화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드리히는 우묵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윌슨의 진화론이 꽤 인상깊은 듯 했다.



"나도 그 말에는 동감한단다. 다만.."



프리드리히는 말을 흐렸다. 이것을 말해도 좋을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 그의 망설임을 그대로 내비쳤다. 한참을 입을 달싹거리던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할 게 있나요?"



"..아니란다. 그보다 다시 이야기에 집중하자꾸나."



그는 말을 돌렸다.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천천히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도로스들은 관록, 혹은 기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느꼈다. 프리드리히가 쌓아온 세월의 파편일 것이다. 그 무게가 그들을 살포시 내리눌렀다. 온화하지만 강경한 태도에 감히 누구도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오즈의 피가 점점 엷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반목하기 시작했단다. 처음엔 소수였으나 점점 세를 불린 수인들과 그 수가 적어지는 인간들. 처음엔 종족적인 대립이었지만, 싸움의 불씨가 점점 커질수록 그런 건 무의미해졌단다. 거대한 전쟁의 불길이 아주 오랬동안 모든 것을 헤집어 놓았지."



프리드리히의 어두운 목소리에선 정보 그 이상의 것이 담겨있었다. 피비린내와 광기로 점칠된 역사를 지켜본 자의 심정일까. 어쩔 도리가 없는 탄식과 질척한 슬픔이 유황냄새처럼 묻어났다.



"어쩌면 오즈께서 그것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무한동력을 숨겨놓으신 거겠지."



"대체 그 전쟁이란 건.."



도로스의 물음에 프리드리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으로 오즈를 믿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따르는 자들. 그리고 무한동력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오즈의 후계자, 내지는 수호자를 자처하는 자들."



수호자. 닥터 윌슨은 그 이름을 천천히 입 속에서 굴려보았다. 700년 전의 케케묵은 과거는 그동안 쌓인 세월만큼 무겁고도 서늘했다. 그러고보면 게름하르트 또한 자신의 선조들을 수호자같은 것으로 묘사했었다.



그것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 닥터 윌슨은 침을 꼴깍 삼켰다. 온 신경을 프리드리히에게 쏟느라 그의 움직임엔 일절 미동도 없었다. 누군가본다면 동상이나 박제같은 것으로 생각 할 정도로.



"그들 사이의 전쟁이 터졌지. 그리고 그 전쟁은 수 백년이나 지속되었어. 서로를 없애기 위해, 그리고 같은 편 중에서 무한동력을 알고 있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즈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따르는 이들은 천천히 타락했단다. 인신공양과 광기의 물결이 그들을 휩쓸었지. 그리고 결국 그들은 광신도로 변질되어버렸구나. 반대로 무한동력만을 노리며 수호자를 자처한 이들은 시간이 지나자 정말 자신들이 오즈의 의지를 잇는 진정한 수호자라고 믿게 되었고. 아이러니한 일이지."



프리드리히는 씁쓸한 얼굴로 읊조렸다. 뒤바뀐 운명. 이 얼마나 얄궃은 일인가. 정 반대에서 시작된 두 집단은 결국 세월에 물살에 휩쓸려 변질되어버리고 말았다.



얕은 한숨. 지난날의 참상은 흘러간 세월에 묻혀 풍화되어야 하건만, 자동인형에겐 허락되지않은 권리다. 3세기에 걸쳐 누적된 혼란과 광기의 기억은 언제나 몸속의 톱니바퀴를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마른 세수를 한 프리드리히가 다시금 입을 열려고 할 때, 건물 안의 모두는 바깥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또아리튼 정적 사이로 고함과 고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이야기는 멈췄고, 장내의 모든 이가 문을 주시했다.



조금씩 커지는 소란은 바로 저 문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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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12. 종결 +1 18.04.04 241 11 17쪽
163 12. 종결 +1 18.03.21 264 12 20쪽
162 12. 종결 +1 18.03.04 259 1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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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12. 종결 +2 18.02.04 331 1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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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11. 전쟁 +3 17.12.24 289 11 20쪽
154 11. 전쟁 +1 17.12.17 315 12 10쪽
153 11. 전쟁 +1 17.12.09 316 11 16쪽
152 11. 전쟁 +2 17.12.01 325 12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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