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4)
“괜찮아요?”
여자는 이상혁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그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 무리해서 몸이 찌뿌둥하긴 했지만 크게 이상 있는 곳은 없었다.
“네. 괜찮아요.”
“괴로워하길래 어디 아픈 줄 알았어요.”
이아손은 그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검 손잡이에 손을 댔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보였다.
“키프로스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는 손잡이를 쥔 채 엘프의 질문에 답했다.
“조각가를 찾으러 왔습니다.”
“리온을 만나러 오셨나요?”
“네. 맞습니다.”
“그럼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저만 따라오세요.”
이아손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제 처음 보는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됐다.
일단 짐을 챙겨 따라가긴 했지만,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이상혁은 잠이 덜 깨서 이아손의 등만 보고 따라갔다.
“리온은 왜 만나러 가는 거예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뭐 어차피 높으신 분의 조각을 의뢰하러 온 거겠죠. 누가 보냈어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참 딱딱한 아저씨네. 계속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면 제가 겁먹고 도망가 버릴지도 몰라요.”
이아손은 찌푸린 인상을 조금 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은 조각가 리온과 무슨 관계입니까?”
“나도 말 안 해줄 거예요.”
대화가 끊기고 셋은 말없이 걸었다.
그게 불편했는지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엘리제고 리온은 제 남자친구예요.”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처음 듣네요.”
“얘가 저를 소중히 생각해서 외부 사람들한텐 잘 안 보여주려고 해요. 보다시피 너무 예뻐서 다른 데로 납치해 갈까 봐 걱정하거든요.”
뒤에서 멍하니 걷고 있던 이상혁이 피식 웃었다.
“지금 그거 비웃는 거죠?”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아는 여자애랑 닮아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저처럼 예쁜 사람이 또 있다니 신기하네요.”
그녀는 당당하게 말해놓고 이상혁의 반응을 살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그냥 귀여워서요.”
엘리제는 부끄러워하면서 이상혁의 팔을 툭 쳤다.
손등이 팔에 닿자 그는 조금 놀랐다.
생기 도는 얼굴과는 다르게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저한텐 리온이 있어요. 그런 말 해도 안 넘어가요.”
엘리제는 싱긋 웃으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마을 근처로 오니 조각상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대리석이나 상아로 만들어진 정교한 조각상들이었다.
주름이나 표정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색을 입혀 놓은 건 진짜 사람처럼 보였다.
인물상 말고도 몬스터나 드루이드 조각도 많이 있었다.
이상혁은 늑대 조각상에 다가갔다.
털 하나하나 전부 다 표현돼 있었다.
“대단하네요.”
“세계 최고의 조각간데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이 옆에 건 뭘 조각한 거예요?”
그는 늑대 옆에 있는 조각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악마처럼 생긴 조각상이었다.
이마에는 뿔이 나 있고 어깨에는 박쥐 날개가 달려있었다.
다른 곳은 채색이 안 돼 있는데 눈만 빨갛게 칠해졌다.
“글쎄요. 아마 상상해서 만들었을 걸요? 안쪽에 들어가면 더 많아요. 빨리 가요.”
그녀는 두 사람을 데리고 악마 조각상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갔다.
엘프와 수인이 어우러져 생활하고 있었다.
모두 엘리제를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했다.
마을 안에 있는 조각들은 밖에 것들보다 훨씬 화려했다.
그중에는 아르고호에 붙어있던 여신상과 똑같이 생긴 대리석상도 있었다.
이아손은 아련한 표정으로 여신상을 바라봤다.
“저 아저씨 왜 저래요?”
“잠깐 생각할 게 있나 봐요. 잠시 혼자 둬요.”
두 사람은 이아손을 놔두고 다른 조각들을 구경했다.
“갑시다.”
어느새 이아손이 가까이 왔다.
세 사람은 마을 안쪽에 있는 커다란 건물로 들어갔다.
‘툭! 투둑! 깡! 깡! 툭! 투둑!’
넓고 높은 창고 같은 방안에서 돌 깎는 소리가 울렸다.
사방에 작업 중인 조각들이 널려있었다.
그 사이에서 엘프 한 명이 대리석을 조각하고 있었다.
작업에 집중하느라 사람이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 했다.
그는 망치와 끌로 여러 부분을 세밀하고 깎아내고 유심히 들여다봤다.
점점 표정이 안 좋아지다가 갑자기 옆에 있는 커다란 해머를 집어 들었다.
‘쾅!’
조금 전까지 열심히 조각하던 대리석이 산산이 조각났다.
새로운 대리석을 가져오려고 입구로 가던 중 엘리제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왔어?”
“응. 여기 손님도 데려왔어.”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본 그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어쩐 일로 오셨나요.”
“왕비님의 의뢰를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 이걸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리온은 건네받은 문서를 읽고 한숨을 쉬었다.
“역린 좀 볼 수 있을까요?”
이아손은 고급스러운 상자를 건넸다.
리온은 내용물을 꺼내서 유심히 살펴봤다.
“좀 걸릴 것 같네요.”
“얼마나 걸릴까요?”
“일주일 정도 걸려요.”
“더 빠르게는 안 될까요?”
“두 분이 도와주시면 5일 정도?”
“네.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죠. 두 분은 옆 섬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마나석을 모아주세요.”
리온은 선글라스 같은 안경을 쓰고 작업대 위에 역린을 올려놨다.
잠깐 어깨를 풀고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어떤 섬 말하는 거죠?”
그는 아무 대답 없었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엘리제는 두 사람을 작업장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한 번 작업 시작하면 제가 유혹해도 안 멈춰요.”
“세계 최고다운 집중력이네요.”
그들은 바닷가로 나왔다.
나이가 지극한 수인이 배를 정비하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오늘 일하는 날이에요?”
“아니. 그냥 배 좀 보려고 나왔는데.”
“그럼 혹시 옆에 섬까지 태워주실 수 있어요?”
“엘리제가 부탁하면 태워줘야지 어쩌겠어.”
“고맙습니다.”
세 사람은 주민의 배를 얻어 타고 옆 섬에 갔다.
“이따 태우러 올게.”
“네. 여기서 기다릴게요.”
키프로스 섬과 달리 이곳은 사람의 손이 전혀 안 닿은 것처럼 보였다.
밀림이 무성하고 몬스터도 많았다.
이아손과 이상혁은 악어나 고릴라, 하마 같은 몬스터들을 베었다.
엘리제는 그들과 떨어져 있다가 전투가 끝나면 마나석을 주웠다.
처음엔 같이 다니는 게 걱정됐지만, 신기하게도 몬스터들은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무사히 사냥을 마치고 주민이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춰 바닷가로 갔다.
챙겨갔던 배낭이 마나석으로 가득 찼다.
바로 작업장으로 가서 모아온 마나석을 리온에게 전달했다.
그는 잠깐 눈길만 주고 계속해서 작업에 집중했다.
세 사람은 작업장을 나왔다.
태양 빛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두 분 다 잘 곳 있어요?”
“아니요. 이제부터 구하려고 합니다.”
“리온 집에 가서 자요. 어차피 걔는 작업장에서 사니까 상관없어요.”
이아손과 이상혁은 엘리제를 따라 리온의 집에 들어갔다.
크고 화려한 집이었지만 지저분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안내를 마친 그녀는 나가기 전에 충고 한 가지를 했다.
“해가 지면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왜요?”
“마을 규칙이에요. 절대 나오면 안 돼요. 알았죠?”
“알겠어요.”
항상 싱글싱글 웃던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하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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