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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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하랑
작품등록일 :
2016.07.12 16:19
최근연재일 :
2018.12.25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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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20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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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이별, 그에게 갇힌 모든 사람들에게.




DUMMY

현재 시간 새벽 2시. 모두가 깊은 잠에 들었을 시간! 강하게 유혹을 하는 이불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살을 파고드는 냉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늘은 결전의 날. 2주 전, 일한은 내가 길을 잃을 거라는 둥, 납치를 당할 거라는 둥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고집을 피웠고, 결국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난 지난 2주 동안, 다현이의 행동들을 곰곰이 다시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에게 믿음이 박살나버린 지금, 아무리 깊게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아, 얘가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혼자 끙끙 앓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인지, 다현이에 대한 남은 감정들이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그에게 전화가 오면 ‘왜 또 전화했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나를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다는 말도 곱씹을수록 기쁜 게 아니라 화만 났다. 정말 이번만큼은 그 애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믿지 말자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번 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일한이의 옆구리를 발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일어나. 이 아저씨야.”


그는 내가 새벽에 일어나지 못 할 거라며, 어젯밤 우리 집에서 잠을 청했다. 지금 못 일어나는 게 누군데!


“안 일어나?!”


미동도 않는 그를 한 번 더 강하게 찌르고, 안 되겠다 싶어 바닥에 내려왔다. 그를 괴롭힐 생각에 웃음부터 났다.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애써 참으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공격 개시! 나는 열과 성을 다해 그의 겨드랑이부터 옆구리, 배 까지 구석구석 간지럼을 태웠다. 한참을 신이 나게 간지럼을 태우다 문득 떠올랐다.


“···아, 맞다. 너 간지럼 안 타지···.”


그가 씩 미소를 지었다.


“뭐야! 언제부터 일어나있었어!”

“음, 네가 입 가리고 쿡쿡 웃을 때부터?”


입을 삐죽이며 그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퍽! 소리와 동시에 그가 드디어 눈을 떴다.


그는 자리에 앉아 기지개를 켜는 척 하더니,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아침부터 지금 뭐하는 짓이세요?”

“가만히 좀 있어봐. 너 때문에 잠 한숨도 못 잤으니까.”

“내가 왜!”

“음, 코를 심하게 골아서?”

“뭐!!”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쳤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다음 생에는 꼭 남자로 태어나도록 하세요. 아가씨.”

“남자로 태어나면 이 수모를 모두 갚아주겠어! 이제 이거 놔!”

“분부 받들겠습니다.”



준비를 마치고 나온 그와 나는 차에 몸을 실었다. 당연하게 바깥은 깜깜했고, 추위에 얼어붙은 차는 냉동 창고 같았다.


“와, 진짜 춥다.”

“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네가 따라온다고 벅벅 우겨놓고 이제 와서 딴 소리?”

“네, 네. 제가 죄송합니다.”

“대답은 한 번만.”

“네!”

“출발 한다!”



새벽이라 도로가 한산해서 금방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광주를 빠져나오기 전에, 24시간 하는 카페에 들러서 산 커피를 마시며 아직 비몽사몽 한 세포들을 마저 깨웠다.


“진짜 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만 마시는구나.”

“당연하지 ‘얼죽아아족’이란 말도 있잖아?”

“그게 뭐야?”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족!”

“얼씨구.”



창문을 잠깐 열었다, 닫았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찬바람이 순식간에 들어왔다. 차 안이 약간 더운 탓 이었을까, 볼을 때리는 바람이 마냥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보며 크게 심호흡 했다.


머릿속엔 오만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생각보다 차분했다. 오늘이 지나면 이제 이유마저 까먹어버린 답답함도, 나를 잠 못 들게 만드는 불안함도 다 사라질 것만 같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신나게 노래를 고르던 일한이가 물었다.


“자, 그래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응?”

“다현이랑 말이야.”

“음, 일단 대화유도가 먼저겠지?”

“유도?”

“응. ‘내가 왜 니 여자 친구냐’고 물었을 때, 만나서 얘기하자고 한건 걔니까.”

“흠.”


일한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난 돌려서 얘기하는 거 잘 못 하니까 그냥 직구 던질 거야. ‘자, 만났으니 이제 얘기해봐’라고. 어때?”

“걔가 순순히 대답할까?”

“음, 아닐걸? 아마 술을 마시자고 한다던가, 너한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한다던가? 뭐 그런 식으로 말 하겠지?”

“술 마시자고는 할 것 같긴 해. 그건 그렇다 치고, 후자의 경우면···.”

“내가 용납 안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옆에 있어.”


그가 말을 흐림과 동시에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 일한이는 말을 아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따라왔지만, 속으론 내가 걱정 돼서 따라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 내가 또 다현이에게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이 됐을 거다. 그리고 상처받은 그 시간에 혼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마 다현이에게 또 휘둘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걱정만큼은 앞으로 하지 않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현이에게 휘둘리는 건 아마 남은 미련 한 조각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 미련은, 온전히 그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다시 한 번 그를,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6시간을 달려, 드디어 다현의 부대 근처에 도착해서 미리 숙소를 잡았다.


장시간 운전으로 인해 피곤할뿐더러, 셋이 카페 같은 곳에 앉아 심각한 분위기를 잡는 것도 주변 눈치가 보였고, 그렇다고 이 추운 날 밖에서 떨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숙소에 대충 짐을 내려두고 다현의 부대 앞으로 갔다.


일한이는 차에서 기다리라 하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 간단한 면회 절차를 밟았다.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춰서 오는 사람은 없는지 나를 제외하고 일반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그를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로 마주해야될지 감이 오질 않았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멀리서 걸어오는 다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모습이 또렷해질수록,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다. 그리고 표정 역시 굳어갔다.


이내 그가 완벽히 내 앞으로 왔다. 그의 옆엔 선임으로 보이는 사람이 같이 있었다. 나는 짧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다 눈치를 슬쩍 봤다. 그의 행동으로 봐선 선임이 맞나보다.


그는 옆쪽으로 가서 외출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선임에게 경례를 하고, 이어서 부대 앞을 지키는 헌병대에 경례를 했다.



부대 앞을 조금 벗어났을 때 그는 심호흡을 했다.


“후, 드디어 숨통이 트이네. 잘 지냈어?”


다현은 인사를 함과 동시에 핸드폰 좀 빌려주라며 손을 내밀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뭐···. 그럭저럭.”

“무슨 대답이 그래. 나 안 반가워?”

“뭐, 그럭저럭? 너도 나보단 핸드폰을 더 반가워하는 것 같은데?”


시큰둥한 반응에 심통이 났는지, 그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핸드폰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쩜 군대를 가서도 저렇게 한결같은지.



다현을 데리고 주차를 한 곳으로 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보조석 문을 열었다.


“여, 안녕?”

“뭐야.”


그리고 그곳엔 일한이가 앉아있었다. 그는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지만 다현이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내게 물었다.


“같이 왔어?”

“응. 보시다시피.”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뭐야. 난 안보여?”


일한이는 웃으며 ‘추우니까 문 좀 닫아.’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에 다현은 팍! 인상을 썼다.


“넌 왜 왔어?”

“너의 ‘면회’라는 명목 하에, 별이랑 드라이브?”

“뭐?”


다현은 헛웃음을 쳤다. 그리곤 일한이를 죽일 듯 노려봤다. 하지만 그럴수록 일한은 약 올리듯 웃기만 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서있을 건데? 빨리 타, 밥 먹으러 가게.”


보다 못한 내가 말리자, 다현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뒷좌석에 앉았다. 얘들은 저번부터 자리가지고 왜 저렇게 싸우는 거야.



우리는 근처에 보이는 식당 중 적당한 곳을 정해 자리를 잡았다. 딱히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입맛도 없었고, 머릿속이 복잡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뉴 역시 대충 일한에게 내 것 까지 골라서 시키라하고, 잠깐 화장실에 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잠을 못 잔 탓에 피부도 푸석했고, 눈은 빨갛게 충혈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정전기에 산발이 된 머리가 단연 돋보였다. 손에 물을 묻혀 부스스해진 머리를 정돈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유독 일한이와 다현이가 앉아있는 자리만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았다. 내가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표정을 풀었다.


다현이는 외출사실이 마냥 신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 같으면 맘껏 즐기도록 내버려두겠지만, 오늘은 경우가 달랐다. 오는 길에만 해도 냉정해지자고 수백 번은 다짐했다. 배실 배실 웃는 그에게 무심코 툭 내뱉었다.


“나 놀러온 거 아니야. 숙소 잡아놨으니까, 밥 다 먹고 가서 얘기 좀 하자.”


다현은 금세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대충 마무리하고 숙소에 왔다. 다현은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에 인상이 쓰였지만 애써 고개를 돌렸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일한이가 내게 의자를 밀어줬다. ‘땡큐’라고 말하며 의자를 좀 더 당겨서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았지만,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다현이는 뭘 하는지, 아직까지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진짜 죽일 놈의 핸드폰.


“이제 핸드폰 좀 내려놓지?”


다현은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슥 쳐다보더니, 핸드폰을 침대에 툭 던져 놨다.


“만나서 얘기하자며.”


다현은 아무 말 없이 일한을 쳐다봤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등골이 서늘했다. 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아까 물어봤잖아. 쟤는 왜 왔냐고.”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그는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유? 얘기하기로 해놓고,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어떡하자는 건데.”

“만나서 얘기하자는 건 너였어.”

“너도 동의한 거 아니야?”

“통화 할 때마다 물어보면 말 돌리던 게 누구였지?”


그는 오만상을 쓰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유 일한. 잠깐 자리 좀 비켜줘.”

“아니. 가만히 있어.”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일한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했다. 차에서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본 장면이었다.

그는 나를 노려봤다. 이 역시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잠깐 나가 있어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너 오늘 왜 그러는데!”

“너야말로 왜 그래? 일한이가 들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말끝마다 일한이, 일한이. 둘이 정분이라도 났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건 여전하네.”


분위기가 싸늘하다 못 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나 사이에 험한 말이 몇 번 더 오갔고, 보다 못 한 일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정말 새우싸움에 고래 등 터지겠네!”


···뭔가 말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착각인가?


“···너 지금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 아니지?”

“맞는데···.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농담 한 번 해봤어. 둘 다 말 좀 좋게 해.”


다현은 담배를 하나 더 꺼냈다.


“그리고 황 다현. 너 지금 내가 있어도 이러는데, 자리 비켜줬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데?”

“그럴 일 없다. 부탁이야.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잠깐이면 돼.”


일한은 내 쪽을 바라봤다. 아마 내 동의를 기다리는 거겠지. 그는 내가 나가지 말라고 하면 다현이가 욕을 하든, 때리든 끝까지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난 잠시 고민했다. 일한이가 옆에 없어도 내가 다현이에게 떳떳하게 할 말을 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일한이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도 나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한은 ‘앞에 있을게’란 말을 남기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빨리 끝내자. 밖에 추우니까.”

“이 와중에도 일한이 걱정이야?”

“상식적으로 너랑 내가 얘기할거면, 일한이가 아니라 너랑 내가 밖으로 나가야 되는 게 맞지 않아?”

“그래···.”

“···내가 먼저 얘기 할 까, 아님 네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할 게. 여기까지 부른 건 나니까.”


그는 크게 심호흡하고, 입이 마르는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일단 이게 먼저겠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그래.”

“편지에도 쓰여 있다시피 나 입대하고 후회 엄청 했어. 너한테 모질게 굴었던 것들, 마지막 순간까지 안 좋은 모습들만 보였던 것도. 네 말대로 옆에 없으니까 조금은 알겠더라. 네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 심했을지.”


냉정해지자, 냉정해지자. 계속 되뇌었다. 울컥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다시 사귀자 하고 싶었는데, 전화로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말 못했어. 그래서 만나서 얘기하려고 한 거야.”

“다시 사귀자는 얘기를 만나서 하려고 했다는 말이야?”

“응.”

“그럼 얘기도 안 했는데 선임들한텐 왜 그렇게 말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확신이 있었거든.”

“무슨 확신?”

“네가 나한테 돌아와 줄 거라는 확신.”

“···지금은?”

“그런데 지금은···.”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는 어느새 필터까지 타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담배를 지져 끄고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네가 나한테서 돌아섰다는 확신이드네···.”


냉정해지자고, 오늘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정말 수백, 수천 번 되뇌었는데 또다시 목이 멨다.


그동안 쌓아뒀던 서운함이, 눌러놨던 의문들이, 참아냈던 감정들이 모두 한 번에 눈물로 터져 나왔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너를 사랑했기에, 배려하고 양보했다. 너를 사랑했기에, 그 어떤 무리한 부탁이라도 다 들어줬다. 너를 사랑했기에, 부정적인 모든 감정들을 숨겨왔다. 너를 사랑했기에, 이해하고 또 이해했다.


너는 내게, 이기적이기 그지없었다. 너는 너의 잘못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너는 내게,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알려줬다. 너는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짓밟았다.


너는 나를 사랑한 게 맞는 걸까. 매일을 의심하며 살았다.


내가 너에게 이별을 뱉었던 건, 한 순간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되었을 때 너를 놓았다.


의견충돌이 있고, 서로 얼굴 붉히며 싸우는 것도, 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엔 내가 화를 내고 쓴 소릴 하면, 네가 마음 아파 할 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너는 그걸 이용했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너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쯤, 넌 네가 잘못을 하고도 도리어 내게 화를 냈다.


나는 네 마음이 다칠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내 마음에 대못을 박아대는 너 때문에 많이도 울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내게 소리를 내지르는 건지. 난 너에게 서운하단 한 마디 조차도 못 하는데.


그때쯤 나는 화를 안 내는 게 아니라, 못 내게 되었다. 싸우는 게 너무 싫어서, 너랑 틀어지는 게 마음이 아파서, 나만 가슴앓이 하는 게 지겨워서.


너는 화를 내고 내 연락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겠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 그 시간들은 내 숨통을 조여 왔다.


결국 잘못한건 넌데, 사과는 약자인 내가 했다.


언제나 힘든 쪽은 나였다.


너의 마음을 붙잡아두려 애쓰는 내가 너무 불쌍할 만큼 많이 망가졌다.



너는 나를 두고 밥 먹듯이 다른 이성을 만났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난 머리에 피가 쏠렸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넌 참 당당하게도, 아니 뻔뻔스럽게도 그건 바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너의 핸드폰에 그녀의 번호는 이름이 아닌 애칭으로 되어있었다. 심지어 내 번호는 저장조차 안 되어 있었는데. 그래, 친한 사이면 그럴 수 있지.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녀와 밤새도록 통화 하는 것을 알았다. 나한텐 문자 한 통 조차도 반나절에 한 번 보내면서. 그래, 이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녀와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진 사실을 알았다. 그래, 술이야 마실 수 있지. 그런데 남들이 보는 앞에서 스킨십까지 서슴없이 했다더라. 추궁을 하니, 넌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그래, 술을 마셨으니 이번 한 번만 참자.


그녀에게 셀 수도 없는 애정표현을 한다는 걸 알았다. 보고 싶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와 신나게 내 욕을 한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얼굴, 이름조차도 모르는데, 그녀는 나를 입에 담지도 못 할 말들로 욕을 하더라.



카드사용 문자가 왔었다.


‘00모텔 02:11 40000원’


그리고 그 문자가 오기 몇 시간 전, 네가 그녀를 만나러 간 사실을 알았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에게 욕을 들은 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잠자리까지 마련해주다니.


진짜 얼마나 비참한지 웃음밖에 안 나왔다. 들키지 라도 말던가, 당당히 내 카드로 모텔 내역을 보낸 너에게 나는 도대체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바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바람인걸까.


그 날, 나는 네게 이별을 뱉었다.


턱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니었는데, 왜 이 지경까지 와버린 건지.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지 않았다. 나는 의자에 걸쳐둔 코트를 챙겨 입었다.


“더 할 말 없지?”


잠깐의 침묵을, 난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침대에 던져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를 잠깐 내려다봤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사과 한 마디. 딱 그거면 될 텐데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가 또 원망스러웠다.


그에게 시선을 거두고, 난 뒤돌아보지 않고 숙소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입구 앞에 쭈그려 앉아있는 일한이가 보였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 다 했어?”

“안아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심장 역시 그 여느 때 보다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일한이의 얼굴을 보니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안아달라는 내 말에 일한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추운 날씨 탓에 그의 옷은 차가웠지만 그 어디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는 평소처럼 가만히 내 머릴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등을 토닥여줬다. 울컥 다시 눈물이 흘렀다.


아직 화가 덜 풀린 건지, 아니면 안심이 돼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머릿속엔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내가 훌쩍일수록 그는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겨 실컷 울고 나니, 어느 정도 속이 후련했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다시 조용해졌다.


그에게 한 발자국 떨어져 눈물을 닦았다.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니, 그는 엉망이 된 내 머리를 정리해줬다.


“집에 갈래.”

“그러자.”


그는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의 옷깃을 잡으니 그는 한 팔로 내 등을 감쌌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코트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냈더니 일한이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잠자코 그에게 차키를 넘겼다. 그는 차문까지 열어줬다.


“고마워.”

“별 말씀을.”


내가 자리에 앉은걸 확인한 그는 후다닥 뛰어가 운전석에 앉았다.


그가 시동을 걸었을 때였다. 숙소 입구에서 헐레벌떡 뛰어 나오는 다현이가 보였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건조한 탓에 찢어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던 다현이는 이내 차를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다급하게 뛰어와서 앞창유리를 확인하더니, 보조석 창문을 두드렸다.


“별아! 창문 좀 내려 봐!”


나는 그를 외면하고 꿋꿋하게 앞만 바라봤다.


쿵쿵쿵!


“별아! 잠깐 창문 좀 내려 줘. 제발.”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한 채 창문만 내렸다.


“별아···.”

“그만 불러. 그리고 다시는 보지 말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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