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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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그림자꾼
작품등록일 :
2016.08.19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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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1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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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1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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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타락의 군주 + 에필로그>

.




DUMMY

“...뭐?”

셀롬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르타르크를 올려다봤다.

이 세계는 부패하고, 썩어빠졌다. 창조신 아르타르크는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을 사랑했고, 그들이 조화롭게 살고자 바랬지만, 그런 신의 바람과는 달리 서로 간의 다른 특성과 생김새, 삶의 방식이 달라 종족끼리 나뉘게 되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을 통제하던 신앙마저 일그러져 마물에게는 신앙이 사라지고, 인간들에게는 변질되어버렸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마물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인간들은 서로가 탐욕에 물들어 동족과 싸워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한 미래를 생각한 아르타르크는 자신을 죽여 신의 파편을 세상에 남겨두었고, 세상을 조율할 조율자를 선택받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고대 아르타르크가 신의 파편을 지상에 남긴 이유였다.

그런데···. 그런 선택자가 지금, 토마가 아닌 ‘셀롬 갓슈란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아르타르크는 셀롬을 조롱하는 듯 말했다.

[내가 복수 따위를 하기 위해 이 힘을 가졌다면, 이미 네놈은 30년 전에 죽었다. 끊임없이 추격하고 추격하여 네놈을 잡아 그 사지를 찢겨 언데드에게 먹이로 먹였을 것이고 영혼은 산산조각을 내버렸겠지.]

“...”

[그런 네가 살아 있고, 지금까지 무사하다? 그것도 평화롭다 못해 압도적인 권세를 유지하며 세상의 지배자로서 떵떵거리고 살아 있다?]

아르타르크는 눈웃음을 짓고 셀롬을 내려다봤다.

[부패하고 검게 물든 신앙 국가가 붕괴하지도 않은 채, 오히려 수많은 ‘제국’과 ‘왕국’의 지원 아래 부흥하며 오랫동안 우뚝 서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셀롬은 아르타르크의 말을 들으며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제국과 왕국들이 눈앞의 존재, 예전 성황법국의 수도를 무너뜨렸던 라니아의 악마가 등장한 후, 끊임없는 지원을 해왔다.

왕도가 무너지고, 새로운 제2의 왕도를 건립하는 데 있어, 그 시간은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해낼 수 있었다.

그 덕에 수많은 이들이 법황 셀롬을 칭송했다.

왕도가 무너져 내렸음에도, 그 책임을 묻기보다는 수많은 왕국과 제국의 지지를 받는 영향력 있는 법황이라고!!

그런데 눈앞의 이, 토마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신의 파편은 오직, ‘세상을 조율하는 결과물’을 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그래, 그러한 신의 파편을 가진 건 너잖아! 영원한 불사를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세상을 파괴하고 창조할 정도의 힘을...!”

[나는 가졌을 뿐이다.]

셀롬은 입을 다물었다.

아르타르크는 그런 셀롬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걸어 다녔다.

[세상을 조율한다. 그것이 쉬울 것으로 보이는가? 절대적인 힘을 가졌다고 해도, 수천 년간 굳게 잡혀버린 법과 규율을 깨부수고 이 세상을 재정립하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보이는가?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고 해도 그건 힘일 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데 있어, 매우 부족하지.]

셀롬은 마른 침을 삼켰다.

눈앞의 존재, 라니아의 악마가 예전 동료이었던 토마라는 걸 떠올리며 불안한 감에 얽매였다.

용사 토마.

인류를 위해 태어난 진짜 용사처럼 정의롭고 지혜로웠으며, 신앙심 또한 높은 자였다.

‘용사’로서 칭송받는 자로 충분했지만, 마왕을 쓰러뜨리는 방법은 셀롬마저 소름 돋을 정도로 치가 떨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략, 동료 이외의 모든 이들은 ‘도구’로써 사용하는 악랄한과 잔혹함을 가지고 있었다.

[신의 파편은 이 세상의 법과 규칙, 신앙심을 파괴하고 그것들을 재정립하여 창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다. 그럼 묻지. 이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르타르크는 손가락으로 셀롬을 가리켰다.

[세상을 파괴할 존재.]

“...!”

[그리고...]

아르타르크는 한 존재를 떠올렸다.

인간과 마물의 경계선에 있는 존재, 선하고 올곧은 마음을 가진 여성.

마왕 릴리 골트.

[...세상을 재정립해 창조할 존재.]

아르타르크는 무게감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이 둘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절대적인 권위에 미쳐 광기에 휘둘리는 폭군, 그와 반대로 권위를 이용해 백성들을 자애롭게 다스리는 성군!]

아르타르크는 셀롬을 내려다봤다.

[그 둘 중 네 녀석이 선택받은 것이다. 신의 바라던 조율자로서 세상을 파괴하는 존재로 말이다. 그리고 그 임무를 정확히 수행하였다.]

법황 셀롬은 수많은 일을 저질렀다.

대륙 전체를 통제하던 대륙법의 어기며 규율의 끈을 끊어버렸고, 신앙을 더럽히면서 종교관을 부숴버렸다.

또한, 광기로 얼룩진 공포 정치로 인간들을 통제하며 지옥과도 같은 억압과 부패를 저질렀다.

이로써 조건은 갖추어졌다.

규율이 무너졌다. 신앙도 사라졌다.

광기라는 공포에 떠는 이들을 구원할 존재가 나타나, 그들에게 새로운 법과 신앙, 그리고 ‘구원’이라는 달콤한 이야기를 속삭인다면···?

새로운 세상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셀롬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물로 신에게 선택받았다.

[30년 전 네놈이 붙잡혀 나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 파괴자라는 역활은 내가 되었겠지. 마왕으로서, 타락한 군주로서 세상을 지배하여 공포에 몰아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릴리 골트라는 마물이 나를 죽임으로써 세상은 구원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너는 아주 훌륭한 ‘말’로서 광기에 미쳐주었다]

법황 셀롬 갓슈란체. 그는 세상의 지배자이자, 성직자, 그리고 또 하나의 오염된 군주,‘타락한 군주’이자 신이 세상을 조율하기 위한‘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 말을 듣던 셀롬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일그러졌다.

지금껏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생각했다.

세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절대 군주!!

하지만, 하지만···! 자신이 시기하고, 질투하였으며, 버리고 배반했던 옛 동료, 토마라는 존재에게 단지 사용되는 체스말에 지나지 않았다.

도구로서 이용당하고 만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채 빼앗긴 채 말이다.

이건 굴욕이었다. 치욕이었다!

용사 토마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자신이 그의 위에 우뚝 서 있다고 생각했거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의 위에 서 있던 적이···. 없었다.

[이곳에 일곱 개의 황제와 왕들이 모였다. 그들 앞에 파괴자인 네놈이, 창조자인 마왕에게 살해 당한다면... 새로운 세상이 탄생하는 순간이 되겠지.]

“하....하...하하... 이건 신에게 선택받은 게 아니라···. 당신에게 선택받은 거잖아.”

[...지금의 내 이름이 무엇인 줄 아나?]

아르타르크는 허리를 숙여 셀롬의 시선에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말에 셀롬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르타르크. 창조신의 이름을 부여 받았다.]

“...무슨...?"

[난 앞으로 세상에 깃든다. 제2의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신으로서 세상을 파괴할 자와 창조할 자를 고르고, 선택할 것이며, 그들을 이끌 것이다.]

즉, 눈앞의 존재는 신이 된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조율한 존재로서, 그가 선택한 자들은 선택받은 줄도 모른 채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것이다.

셀롬, 자신이 당한 거처럼!

“무, 무엇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까지 하느냐 말이냐! 도대체 그 무엇이 네녀석을...!”

[무엇을 위해? 아주 간단한 질문이로군. 아까도 말했다시피 세상을 조율하기 위해서다. 그래, 난 단지...]

아르타르크는 창을 움켜쥐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셀롬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백색으로 물든 뼈의 창이 성력을 뿜어내는 것을 본 셀롬은 겁에 질렸다.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얻고자 했을 뿐이다.]

“...”

아르타르크의 황금빛 안광이 가늘어졌다.

오래전에 한 여성이 원하던 그리운 소원.

[지금보다 더 편안하고, 더 평화롭고,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고, 덜 굶주리고, 보다 걱정이 없는 나은 세상...]

아르타르크의 창날이 들어 올려진 셀롬의 가슴에 겨누어지며, 황금빛 안광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난 그것을 원할 뿐이다.]

“...미쳤어.”

아르타르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셀롬은 제정신이 아닌 듯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나보다 훨씬 미쳤어! 겨우 그것 때문에···. 세상을 움직였다? 전쟁을 일으켰다? 도대체 토마 당신은...! ”

[필요한 건 결과다.]

“...”

[모든 것은 결과를 위한 과정일 뿐이다.]

셀롬을 절대자의 자리에 올리고, 그가 세상을 파괴하게 방치하며,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과 마물들이 죽어 나갔다.

지금껏 몇만의 인간이 죽었을까? 지금껏 얼마나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을까?

그것들이 모두 눈앞의 단 한 존재에 의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과정’일 뿐이었다.

[그러한 결과에 대한 과정은···. 별거 아닌 희생 아닌가?]

미쳤다.

셀롬은 몸을 떨며 미소를 지었다.

‘토마, 당신은 나보고 광기에 미쳐 제정신을 못 차리는 인간이라고 칭했지? 아니,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닌...’

바로 눈앞의 존재.

용사 토마라는 존재였다.

이런 자가 세상을 조율하는‘신’이 되었으니, 이 세상은 불안정해질 때마다 파괴되고 다시 창조되며 재정립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지옥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 지옥을 모른 채 천국으로 착각하며 살겠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또 하나의 타락한 군주여.]

셀롬은 진한 미소를 지은 채 아르타르크를 향해 말했다.

“토마···. 당신은 미쳤어.”

[...안녕이다. 오랜 친구여. 이것으로 너와 나의 질긴 인연도 끝이다.]

아르타르크는 창을 그의 가슴에 꽂았다.


* * *


“...후우... 후우...”

제국군과 왕국군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동료들의 시체와 그런 시체들을 도륙했던 수만의 언데드 군단이 눈앞에 보였지만, 그들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춰 세운 채 가만히 있었다.

하늘에서는 어느새 내리던 빛줄기가 사라졌다.

아침을 알리는 태양이 점차 떠오르자, 언데드들의 모습이 새하얗게 변했다.

성력을 뿜는 그들을 대치하던 제국군과 왕국군은 입을 다물었다.

‘왜 공격을 하지 않는 걸까?’

황제와 국왕들은 굳어진 채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도망치기 위해서는 지금이 기회다. 하지만 등을 보이는 순간 공격해온다면?

서로 간의 세력이 대치하며 고요한 침묵이 흐를 때, 언데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에 따라 왕국군과 제국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왕과 황제들이 언데드가 쳐다보고 있는 왕궁을 쳐다봤을 때, 하나의 존재가 추락하고 있었다.

인간이라고 보기에도 참으로 끔찍한 모습.

피부는 모두 타버려 벗겨졌고 있는 근육 마저 갈가리 찢겨져 있는 존재가 백색의 창에 찔려 언데드와 인간들 사이로 떨어졌다.

그리고 창날이 바닥에 박히는 순간, 창 주변으로 폭풍우가 불며 언데드들이 소멸한다.

언데드들이 재가 되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마왕군의 마물들이었다.

“아...아아...아아...”

“언데드들이 사라졌다? 소멸한 건가...?”

“저건...법황...?”

“셀롬 갓슈란체...?”

성력이 담긴 창날에 셀롬의 피부가 재생되었다. 하지만 창날에 꽂힌 그는 빠져나오지 못해 괴로워했다.

왕과 황제들, 그리고 인간 병사들과 마물들 가운데, 백색의 창날은 셀롬을 꿰뚫은 채 지상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으...으아...아아악!”

셀롬 자신의 가슴이 관통 당한 것에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성력으로 몸이 회복되고 있지만, 가슴이 관통 된 곳은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꿈틀거린 채 죽지 못해 허우적거린다. 신음을 흘리며 괴로운 듯 가슴에 찔린 창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바늘에 찔린 벌레로 저항을 해봐도 창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지 않는 건가?”

“불사...저게...?”

셀롬의 입과 코에서는 침과 피가 섞인 타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괴로움에 살려달라, 또는 죽여달라고 외치지도 못한 채 비명만을 지른다.

황제와 왕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하얀 까마귀가 말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불사’를 보여준다는 것.

그것이 이것을 나타내는 것일까?

“으...으아악.... 젠장...! 토마...! 이 자식...! 저주 할 테다...! 난 살 거야! 살 거라고ㅡ!”

셀롬은 창을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고자 자신의 몸을 위로 밀어 당긴다.

움직일 때마다 꿰뚫린 몸에서는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억지로 꿰뚫은 창날을 비집는 소리가 들려온다.

셀롬은 피눈물을 흘리며 발악하며 창끝에 도달했다.

그의 얼굴이 밝아지며 희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웃기지 마. 토마···! 난 당신 따위에게 지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당신의 체스말 따위가 되지 않겠어!’

이 세상의 파괴자로서 죽어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은 세상을 지배한 군주. 신에게 선택 받은 성직다. 그런 내가...!

창날에 나온 셀롬은 바닥에 떨어졌다.

꿈틀꿈틀하는 것이 한 마리의 지렁이와 같다. 그는 골불견이게 바닥을 기어갔다.

“...사, 살아남기만 하면 돼. 그럼 그 빌어먹을 용사가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아. 살기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용사 토마에게 조금이라도 그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위로 향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셀롬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휘청거리며 걷는다. 하지만 그 발걸음도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존재를 쳐다봤다.

황갈색의 구릿빛 피부, 새하얀 백발과 붉은 빛을 띤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검을 들고 있다.

마왕 릴리 골트.

용사 토마, 아니, 이제 제 2의 신이 되어가고 있는 아르타르크에게 선택받은 '창조자'.

“...아...아...아아아?”

셀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토마에게 선택받은 자가 눈앞에 있다. 그리고 앞길을 막고 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이 토마가 생각한 그대로를 향해 가고 있다...!

자신은 연극의 각본되로 움직이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난···. 난···. 살거야...! 살아서 네 놈에게 조금이라도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 할 거야!”

셀롬은 주변에 떨어진 검을 주웠다.

그 모습에 마물들이 마왕을 지키고자 움직이려 할 때, 카라쿨이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인간과 마물, 두 사이의 중심에, 그들의 군주들이 서 있었다.

인간의 군주, 셀롬 갓슈란체.

마물의 군주, 릴리 골트.

그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검을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먹을...!”

셀롬은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울먹이는 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는 있는 힘껏 검을 들어 올렸다.

‘토마... 난... 그저...!’

순간 섬광이 스쳐 지나가며 셀롬의 머리통이 하늘로 떠올랐다.

허공에 솟아오른 셀롬의 머리가 눈물을 흘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을... 넘고 싶었을... 뿐인데...”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져 공처럼 튕겨 굴러간다.

그 모습을 바라본 인간과 마물들은 입을 다물며 굳어졌다. 그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마왕 릴리 골트.

마왕의 지배자. 그리고 이번 전쟁을 끝을 낸 자.

그를 향해 지켜보던 마물들은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롬 왕국군과 아이란스 왕국군 역시 무릎을 꿇는다.

“...”

왕과 황제들은 넋이 나간 채 릴리를 쳐다보다 반사적으로 죽은 셀롬을 쳐다봤다.

머리통만 남은 셀롬의 얼굴에서 입이 뻐금거린다.

눈알이 돌아가고 숨이 막혀 괴로운 듯 떨리다 결국 머리통마저 미동하지 않은 채 죽어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본 왕과 황제들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무릅을 꿇었다.

제국군과 왕국군은 자신들의 군주가 무릎을 꿇자, 서로의 눈치를 보며 무릎을 꿇었다.

인간과 마물, 그들 사이에 있는 존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대륙의 새로운 법과 규칙을 만들 ‘창조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


[몸이 사라지는군.]

아르타르크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성력이 점차 녹아내려 증발해 사라진다. 육체가 무너져 내리며 빛의 가루가 되어 간다.

셀롬의 성력과 마력을 소멸시키는 힘도 있었지만, 이미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넘어서 버렸다.

이제 그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옛 창조신 아르타르크는 자신을 스스로를 죽여 신의 파편을 세상에 다시 두었다. 이제 내가 그 역할을 할 때인가?’

다음 세상을 조율한 파편을 남기고 잠든다. 그것이 조율자였다.

이미 죽었을 목숨이었다. 그것을 억지로 연장하고, 수많은 죽음을 거부했다.

이제는, 그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토...마...?”

아르타르크는 고개를 틀었다.

검은 흑발과 흑안, 창백할 정도의 흰 피부를 가진 여성이 아르타르크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엘린.

오래전 엘리와 함께 작지만,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했던 도플갱어.

아르타르크의 갑옷이 점차 소멸했다.

투구가 조각조각 부서진다.

그 속에 남은 것은 황금빛 금발과 눈을 가진 사내가 모습을 들어냈다.

하지만 젊은 모습은 아니다.

오래전, 아르타르크와 계약했던 중년 수도사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힘이 빠지는군.]

서 있던 토마의 몸이 무너지며 무릎 굵게 되고 손을 바닥에 짚는다.

그 모습을 본 엘린은 그에게 급히 달려가 부축했다.

토마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몸에 힘이 빠지며 축 늘어져 감각이 사라져 버린다.

“...뭐야... 왜 그래? 응?”

“피곤해서 말이야. 잠시 쉬고 싶어...”

토마가 눈을 감으려 할 때, 엘린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쉬지 마!”

“...”

눈을 감으려던 토마는 엘린을 힐끔 쳐다봤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살겠다며! 인적이 없는 작은 숲에서 오두막을 짓고,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심심하면 도심에 내려가 거리 구경을 하고, 한가롭게 하루하루를 보낼 거라며...!”

“...”

토마의 또 하나의 소원이었다. 그것을 엘린은 애처롭게 외치고 있었다.

“거기서 나랑 함께 지낼 거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토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좋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

“엘린, 엘리를 부탁한다.”

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리야?”

“그저 릴리를 부탁한다는 말이야.”

엘린은 가슴이 울컥 솟아오르는 울분을 토해냈다.

“네가 도우면 되잖아? 마왕님을 곁에서 도우면 되잖아? 나도 도와줄게. 그러니까 제발...!”

토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입을 제대로 열 힘이 없는지 입술이 떨려왔다.

“또 사라지는 거야? 또 이렇게...? 토...”

어느새 엘린이 코앞에 있음에도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몸에서도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

자신만이 세상에서 고립된 순간을 느낀 토마는 점차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토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리, 엘린. 고맙다. 너희 둘을 만나 참으로...

토마는 눈을 감았다.

“...행복했었다.”

토마는 모든 감각이 끊겼다.

모든 소리, 모든 시야가 끊겨 사라져 고요함만이 남았다. 그리고 뒤에 이어온 편안한 느낌에 몸을 맡겼다.

“토...마?”

눈을 감은 토마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을 억지로 부축하던 엘린은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왕 릴리 골트와 카라쿨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엘린이 부축해서 데려온 이를 쳐다봤다.

처음 보는 중년 사내의 시체였다.

하지만 그것을 본 릴리 골트는 그것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톰인 게냐...?”

“...네.”

엘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엘린의 말에 릴리는 입을 다물었다.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얼굴이 굳어버리고,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흘러내렸다.

그런 릴리를 바라보고 있던 카라쿨은 죽은 토마를 향해 한 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다음 릴리에게 말했다.

“폐하.”

“...”

“폐하!”

릴리는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얼굴로 카라쿨을 쳐다봤다.

카라쿨은 주변의 마물과 인간들을 쳐다봤다.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왕이라는 존재의 나약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폐하는 마왕이십니다. 마물들의 왕이십니다. 마물들과, 그리고 인간들 앞에서 그와 같은 얼굴을 해서는 안 되십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카라쿨 대장.”

카라쿨은 엘린을 쳐다봤다.

“토마가···. 죽었어. 그런데...”

“...톰 사도가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위대한 희생이다.”

“무슨 소리야? 위대한 희생? 그 딴게...!”

“폐하.”

카라쿨은 릴리를 무시한 채 말했다.

“폐하께서는 나라를 다스려야 할 존재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서는 안 되옵니다.”

릴리는 입을 다물었다.

“마물들이 봅니다. 인간들이 봅니다. 감정을 억제하시고, 그들을 이끌어주십시오. 그것을... 톰 사도도 바랄 것이옵니다.”

릴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가 입술을 꿰뚫어 핏방울을 떨어뜨렸고, 손에는 힘이 들어가 떨려왔다.

“나...나는...”

그것을 보고 있던 카라쿨은 이를 악물었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어쩔 수 없지.'

“법황, 셀롬 갓슈란체가 죽었다! 우리의 승리다!”

“오오오오오!”

카라쿨의 외침을 들은 마물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승리의 기쁨에 심취해 괴성이 대지에 요동쳤다.

그런 마물들의 기쁨에 영향을 받았는지, 롬 왕국군과 아이란스 왕국군 역시 희열에 찬 함성을 질렀다.

릴리는 그런 마물과 인간들의 함성을 들으며 카라쿨을 노려봤다.

“네놈...!”

“폐하.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카라쿨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입니다. 톰 사도가 바라는 결말입니다. 폐하께서는 단 한 가지만 해주시면 됩니다. 손을 들어, 승리를 알리십시오.”

"..."

"단지, 그것만 해주시면 됩니다."

릴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톰에게 달려가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며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손을 들자, 함성이 더욱 커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린은 입을 다물며 톰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모두가 기뻐하는 환호성 속에서 두 여인은 가슴에 억누른 마음이 자리잡았다.


전쟁은 끝이 났다.

이것으로 성황법국이라는 나라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마물들의 나라, 마도국이었다.

마도국은 롬 왕국과 아이란스 왕국, 그리고 제국과 왕국들 사이의 하나의 법국으로서 그들을 통제하고 중재하는 국가로 받아들여졌다.

릴리 골트는 마왕이라고 불렸지만, 인간들에게 있어 '마왕'이라는 호칭은 두려운 존재였기에 명칭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불리는 명칭은 '성마왕'이었다.

인간들의 왕, 마물들의 왕으로서.

마도국은 중심이 되어 대륙의 수 여러 나라를 통제했다.

롬 왕국의 피그니는 왕위에 앉은 채 오스칼과 함께 그간 전쟁을 통해 혼란스러워진 나라를 안정시키고, 다음 대의 왕이 될 자몽을 교육했다.

그리고 아이란스 왕국은 왕도가 무너져 더는 수도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어 또 다른 왕도를 정해야 했다.

이번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한 아이란스 세력은 작게 축소되고 경제적, 그리고 국가적 치안도 불안정해지며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각 나라의 지원을 통해 점차 안정되어갔다.

또한, 그런 왕국에서 작은 축복이 일어났다.

“왕자님이십니다!!”

왕궁의 노마도사들이 땀을 닦아내며 수건으로 조심스렇게 감싼 아이를 폴리 국왕에게 내밀었다.

“오...오오... 오오오오!!”

폴리 국왕은 한쪽 다리가 불편한지 지팡이를 짚은 채 엉거주춤거리며 아이를 어떻게든 안아보겠다는 듯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런 폴리 국왕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던 노마도사들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아이를 아카레알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왕비님!”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던 아카레알은 노마도사가 건네는 아이를 양손으로 받아들였다.

조금 전까지 아주 힘차게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트리다 지쳤는지 잠들어 있는 귀여운 아이.

그 아이를 받아든 아카레알은 미소를 짓고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폐하, 이 축북으로 태어난 왕자님에게 이름을 어떻게 지으시겠습니까?”

노마도사들이 폴리 국왕에게 말하자, 폴리 국왕은 아이를 안아보지 못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졌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이름을 언급하자, 다시 흥분한 듯 외쳤다.

“다, 당연히 멋있는 이름으로 지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 여자아이였다면 프레야, 또는 엘리스 같은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겠지만, 남자아이니 레온이나, 에론이나 아니면···!”

아카레알은 아이를 조용히 쳐다봤다.

폴리 국왕을 닮은 황금빛 금발이 상당히 눈에 띈다.

아카레알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조용히 눈을 떴다.

눈동자는 아카레알을 닮은 보랏빛을 띠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쪽 눈은...

아카레알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오? 부인?”

“...아니요. 아이의 눈이 무척이나 맑고 깨끗해서요.”

“그러시오? 그나저나 이름 말이오! 내가 정해보았소만...!”

“아, 그게...”

아카레알은 폴리 국왕을 보며 말했다.

“이 아이 이름, 제가 지어도 되겠나요?”

“...아, 그, 그, 그러시오! 어떤 이름으로 하겠소?”

폴리 국왕은 풀이 죽어버렸다. 아이도 안지 못했거늘, 이름마저 짓는 것이 부인에게 넘어가 아쉬운 것이다.

아카레알은 아이를 보며 폴리 국왕에게 이름을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들은 폴리 국왕은 의아한 듯 말했다.

“...? 너무 평범하지 않으오?”

“네, 하지만 저는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아카레알은 아이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분 덕분에 무사히 태어난 아이이니까요.”

 

<타락의 군주 - 에필로그>


옛날, 옛날, 한 자애로운 신은 모든 생명을 사랑했습니다.

인간도, 마물도, 모두 사랑하여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사이가 좋던 그들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만으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차별하고, 억압하고, 싫어하며 서로를 등지며 살았지요.

그런 그들 사이에서 전혀 다른 이들이 태어났습니다.

한 명은 몹시 나쁘고 욕심이 많은 왕이, 또 한 명은 자애롭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었습니다.

악한 왕은 백성들을 몰살케 굴었지만,선한 왕은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봤습니다.

서로가 맞지 않은 악한 왕과 선한 왕은 결국 싸우게 되었습니다.

악한 왕은 탐욕을 위해, 선한 왕은 백성들을 위해.

아주 큰 싸움을 벌어져, 결국 둘 중 한 사람이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스러진 건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외쳤습니다.

-난 당신을 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선한 왕처럼 친구가 많고, 착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후...후후...”

화려한 마차 안에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던 아카레알은 동화책을 읽어주다 옆에서 키득키득 웃는 아이를 쳐다봤다.

이제 곧 10살이 되는 소년.

아카레알의 아들이었다.

그녀와 그의 아들은 바쁜 폴리 국왕을 대신해, 이번 성마왕, 릴리 골트의 10주년 즉위식을 축하하는 연회에 초대받았다.

마차의 창가로 보이는 거리에는 마물과 인간들이 돌아다니며 수많은 먹거리와 공연이 이어져 있다.

퍼레이드의 거리를 지나며 동화 한 권을 사 읽어주던 아카레알은 갑자기 웃는 자신의 아이를 향해 물었다.

“...왜 그러니?”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동화 이야기가 너무 우습잖아요.”

“우습다니···?”

아카레알은 쓴웃음을 지었다.

법황과 마왕의 전쟁 이야기를 살짝 돌려 말한 동화.

옛 동료였던 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에 아카레알은 이 동화를 산 것과 읽어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카레알과는 달리, 소년은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네, 마지막 부분이 재밌어서요.”

“어떤 부분?”

“악한 왕이 선한 왕처럼 살고 싶었다는 부분이요. 아마도 그건 아닐 거로 생각해서요”

“...”

“아! 그러고 보니 마왕은 어떤 사람인가요? 아, 이름은 릴리라고...”

아카레알은 소년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

“마왕이 아니라 성마왕 폐하님이잖니. 그리고 릴리님이라고 불러야 한단다. 물론 모두가 있을 때는 성마왕 폐하라고 해야 하고.”

“...바름이 힘들잖아요. 억양도 이상하고.”

“어쨌든 그분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거라. 너도 한 나라의 왕자님 신분...”

“아아!!”

말을 하던 아카레알은 자기 아들이 창가를 가리키며 소리치자, 고개를 돌렸다.

창가 바깥에서 검은 까마귀와 하얀 까마귀가 나뭇가지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카레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기하구나. 색이 다른 까마귀라니. 게다가 성력과 마력이...”

아카레알은 그렇게 말하며 마차 안을 볼 때,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

소년은 마차에서 내려 축제가 열리는 거리를 쳐다봤다.

“넓다. 아니, 너무 커 보인다고 해야 할까?”

10살 아이에게는 모든 게 커 보인다.

큰 건물, 큰 인간, 그리고 아주 커다란 마물.

소의 머리에 상체는 인간의 팔과 몸, 하체는 소의 다리와 발굽이 있는 미노타우로스가 걷고 있었고, 소의 발굽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미노타우로스!?”

소년이 깜짝 놀라 외치자 그 소리를 듣고 소 발굽이 멈췄다.

“앙...?”

“멈춰!”

미노타우로스가 옆에 있던 하피 여성이 날갯짓하며 소리치자, 소 발굽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와! 큰일이 날뻔했어! 멍청아! 멍청아! 앞을 잘 봐! 멍청아!”

하피가 날개로 소 발굽을 툭툭 치며 외치자, 미노타우로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어이, 감시탑, 네놈 뭘 하는 거냐? 고블린의 눈은 장식이냐?”

그러자 미노타우르스의 어깨에 타고 있던 고블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 뭔 헛소리야! 나도 네 바로 밑은 보지 못한다고! 네가 주의해야지!”

과일이 잔뜩 담긴 상자 덩이를 짊어지고 걷던 커다란 미노타우로스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에 있던 고블린은 떨어질 뻔한 것을 부러진 소의 뿔을 잡고 겨우 지탱했다.

“어이쿠. 이런, 미안하다. 꼬맹아.”

“꼬맹이라니...”

소년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과의 의미로...”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열어 사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사과를 주마.”

“우엑, 재미없어! 설렁해!”

하피가 소리치며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를 툭툭 쳤다.

“고마워요. 알린. 아,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고마워요. 그럼...!”

소년은 사과를 받고 꾸벅 인사하고는 달렸다.

“잘 가렴~!”

스카니는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아이를 보다 흠칫 놀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라? 알린, 네 이름을 알고 있는데? 그리고 우리가 사도라는 걸 어떻게 알았대?”

알린과 쿨보는 의아한 듯 사라진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은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툭 부딪힌 상대를 쳐다봤다.

“아, 미안하구나. 눈이 불편해서.”

황금빛 금발에 눈을 감고 있는 장님. 지팡이를 든 젊은 청년이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소년은 손을 저었다.

“에길님,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장님의 옆에는 웬 초라한 노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하아... 아무리 거리에 치안이 좋아도 혼자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헬파론, 괜찮아요. 혼자서는...”

“그래도 거리를 걷고 싶어서요.”

소년은 그런 둘을 어색하게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벅 숙이고 걸어갔다.

“오오, 여기저기, 맛이 좋은 먹거리로군! 그전에 마물들이 하는 음식은 인류급이야! 젠장, 우리 왕실 음식이 더럽게 맛없게 느껴지네!”

“...왕자님. 폐하를 닮아가는 건 알겠는데 그거 말투 좀 바로 합시다.”

“그러는 오스칼, 네 녀석은 어떤 데? 합시다? 그게 왕자에게 할 말이냐? 앙?”

후드를 쓴 채 소리를 치는 여행객이 있는가 하면...

“릴리님이 좋아하실까?”

“그럴 거야. 빨리 돌아가자. 그분의 시중을 들어야지. 아참, 헤카론님 그리고 쿠만님, 짐을 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빵과 홍차를 산 토끼 귀를 가진 마물 남매와 그 뒤에 커다란 짐을 든 오우거, 켄타우로스 등이 걸어간다.

소년은 먹거리를 구경하며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가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어디가 볼까?’


* * *


웨어울프, 월프, 놀 나시스는 자신의 키보다 큰 책 더미를 엉거주춤하며 서재에 옮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르딘 우드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고맙네.”

“...별거 아닙니다.”

“...이양이면 직접 가져다 보지그래?”

월프는 간단하게 고개를 숙였고, 놀은 불만을 터트렸다.

“미안하구나. 그는 나와 업무 중이라.”

마도국을 다스리는 군주, 성마왕이라고 불리게 된 릴리 골트는 서재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으며 말했다.

월프와 나시스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폐하의 명이시라면야.”

“폐하.”

릴리는 힐끔 서재 입구를 쳐다봤다.

붉은색 갑주를 입은 오크, 카라쿨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준비를 맞췄습니다.”

“그런가?”

릴리가 책을 덮자, 옆에 있던 노르딘 우드가 말했다.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이제 곧 타국의 사신단들이 오게 됩니다.”

“응, 그게 중요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거든.”

“더 중요한 것?”

릴리는 미소를 지었다.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할셈은 마부석에서 마차를 끌었다.

평범해 보이는 상인 마차, 하지만 그 안에는 마도국의 지배자, 성마왕인 릴리와 대장군 카라쿨이 타고 있었지만,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상인 마차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왕도의 외관에 떨어진 작은 시골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숲 속에 배치된 하나의 비석 앞이었다.

릴리는 그곳에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고, 그녀는 살며시 눈을 뜨며 비석을 쳐다봤다.

그 위에 꽃 한 송이가 올려져 있다.

“...이미 그 애가 갔다간 모양이구나.”

기도를 올린 릴리가 향한 곳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두막으로 향했다.

“얼라? 손님이야?”

“인간이다!”

“오크도 있어!”

“저건 누구야? 뿔이 있는 예쁜 인간이네?”

“뿔이 있으면 인간이 아니잖아. 저건 마인이야!”

인간과 마물로 이루어진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집에 찾아온 낯선 이들을 쳐다봤다.

릴리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다, 오두막 문을 열고 나오는 이를 쳐다봤다.

“앗, 폐하? 그리고 할셈? 또...”

검은 머리카락과 눈,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도플갱어, 엘린은 갑자기 찾아온 낯익은 이들을 보며 반가워했다.

엘린은 릴리를 보며 기뻐했지만, 마지막으로 카라쿨을 바라본 엘린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카라쿨 대장.”

“오랜만이구나.”

전쟁이 끝난 후, 엘린은 사도직을 내려놓고 시골의 작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매번 자매처럼 같이 있던 그녀가 떠났다는 것에 릴리는 씁쓸함을 느낀 그녀였다.

“자, 다들 차 좀 드세요.”

엘린은 릴리에게, 그리고 할셈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카라쿨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할셈은 그런 카라쿨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하! 딸에게 미움받는 아버지 같구만!”

“끄응...”

카라쿨은 신음을 흘릴 뿐,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로서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거리를 두니 그로서도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카라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틀었다.

바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신기한 것을 본 듯 모여 있었다.

“얼라? 너는 누구야?”

“이 마을 사람이 아니지?”

“마인? 아니면 인간이야?”

"눈 예쁘다! 전혀 다른 색이네?"

아이들이 한 아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카라쿨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들이 사이에 있는 한 어린 소년.

황금빛 머리카락, 왼쪽 눈은 자줏빛 눈동자였지만, 다른 한쪽은 맑고 깨끗한 황금빛 눈동자였다.

그 소년을 본 카라쿨은 입을 벌리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소년은 그런 카라쿨과 시선을 마주치자, 방긋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었다.

카라쿨은 눈 근육이 실룩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찾아와도 되는 거예요?”

“잠깐 보고자 왔다. 이제 바로 가봐야 해. 다른 나라의 사신단들도 축하를 위해 왔으니 말이다.”

엘린의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라쿨은 작게 중얼거렸다.

“엘린.”

“뭐예요?”

엘린은 불만스러운 듯 카라쿨을 쳐다봤다.

카라쿨은 불편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네가 돌 보는 아이 중에, 자줏빛 눈동자와 황금빛 눈을 가진 아이가 있느냐?”

“오드 아이? 그런 아이는 없는데요?”

“그럼 저 아이는···. 누구냐?”

카라쿨이 창밖에 있는 소년을 가리키자, 엘린과 릴리는 서로를 마주 봤다.

두 사람이 바깥에 나가 소년을 만났을 때, 소년은 릴리와 엘린을 보며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얼굴 때문이라고 생각한 엘린과 릴리는 미소를 지었다.

“엘린, 네가 돌보는 아이가 아닌가 보구나.”

“네, 길을 잃은 아이인가? 너는 누구니? 어디 사는 애니?”

“아, 그... 처음 뵙겠습니다. 엘린님, 그리고 릴리님.”

엘린과 릴리는 깜짝 놀라며 소년을 쳐다봤다.

“우리를 아니?”

“네,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소년이 미소를 짓자, 릴리와 엘린은 의아해했다.

“어머니?”

“저희 어머니, 아이란스 왕국을 폴리 국왕님의 왕비이신, 아카레알 모르가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의 아들이죠!”

릴리와 엘린은 깜짝 놀랐다.

아카레알이 아이를 낳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고, 이렇게 쑥쑥 자란 아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름이 뭐니?”

“저요? 아,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않으셨나 보네요. 제 이름은...”

소년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토마. 토마라고 해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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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홍보!>>

-e북 카카오페이지, 네이버북스, 리디북스, 리디스토리, 원스토어 등등 여러 e북에서 연재 중인 <죄악의 군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타락의 군주를 재밌게 보셨다면 이 작품은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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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의 군주 시안2.jpg




안녕하세요! 그림자꾼입니다! 오타 및 맞춤법 지적해주시면 감사드리며, 재밌으시다면 [추천하기] 및 선작과 추천 부탁드립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작가의말

늦었습니다. 나뉘서 올리기에 애매해서 그냥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분량이 많아 읽기 힘드신 독자분들이 많을 거 같아 작가의 말은 다음 편에 남기겠습니다!

...그나저나 출판사에서 홍보 좀 해주지 ㅠㅠ 작가가 계속 셀프로 홍보해야하 다니...!!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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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타락의 군주> +62 17.06.03 3,542 108 16쪽
152 <타락의 군주> +20 17.05.29 3,908 96 14쪽
151 <연합군> +16 17.05.26 3,181 76 11쪽
150 <연합군> +12 17.05.24 3,005 86 13쪽
149 <연합군> +21 17.05.22 3,038 85 15쪽
148 <연합군> +22 17.05.19 3,136 92 24쪽
147 <연합군> +12 17.05.14 3,152 86 13쪽
146 <연합군> +16 17.05.11 3,163 86 15쪽
145 <연합군> +21 17.05.08 3,696 94 12쪽
144 <연합군> +16 17.05.05 3,330 88 16쪽
143 <연합군> +23 17.05.03 3,708 92 12쪽
142 <연합군> +17 17.04.30 3,477 94 19쪽
141 <연합군> +22 17.04.27 3,410 9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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