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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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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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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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20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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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0. 운칠기삼(運七技三) (2)

DUMMY

“심 소저!”


나는 심하령이 머무는 거처를 찾아가 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평소라면 이런 무례를 저지를 리도 없고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지만, 조급할대로 조급한 지금은 그런 짓을 벌이고도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꺄악!”


커다란 문소리에 반응한 것은 낡은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있는 시비 하나였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나를 올려다보며 바들바들 떠는 시비가 금세 울음을 터트린다. 지필묵으로 가득했던 처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 텅 비어 있었다. 불안이 커진 나머지 내공까지 실어서 애꿎은 시비를 윽박질렀다.


“심 소저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던 물건들은 또 어떻게 됐고요?”


“자, 잠깐 출타하셨습니다. 여기 있던 물건들은 쇤네도 잘........”


“외출은 어디로?”


“그, 그것이.....”


겁에 질린 시비는 금방이라도 졸도할 듯 싶었다. 뒤늦게 지나쳤음을 깨달아 짤막한 사과를 남긴 다음, 한달음에 담을 넘고 지붕 위를 뛰어 천도를 가로질렀다. 바람을 가르며 하늘 높이 뛰어오르니 천도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큰 짐을 옮기고 있으니 높은 곳에서 보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바람을 담아 안력을 돋워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

돌연 맥이 풀리며 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혹시 무슨 횡액이라도 당했을까 하는 걱정과, 그녀가 날 속였다는 허탈함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몸을 한없이 끌어내렸다.


쿠웅!


“으핫!”


“우아악! 뭐얏?”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이 뚝 떨어지면 놀라지 않을 이가 있을까? 바둑을 구경하던 한 무리의 노인이며, 수레에 잔뜩 물건을 싣고 가던 장사치까지 모두 지면을 울리는 굉음에 놀라 길 한가운데로 떨어진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소란이냐!”


무림에서 소란이 이는 일이야 비일비재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벼락이 내리친 듯한 굉음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무뎌질 대로 무뎌진 천도의 무인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위험하니 모두 물러나시오!”


특히나 그 중 천도를 비호하는 천의검문은 다른 무인들에 앞서 소동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아니, 본래는 이 정도로 신속하게 대응할 순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길이란 것을 타고 오면서 벌인 소동 덕에 경계가 강화되었고, 그 덕에 내 주위는 금세 천의검문의 문도로 가득 찼다.


“소문주?”


난데없는 소란에 매서운 눈으로 달려온 이들이 일제히 포권을 쥐고 머리를 숙였다. 푸른 빛깔의 복색이나 검의 수실을 보니 천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경검대(警劍隊)인 것 같다. 저들이라면 심하령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심하령의 행방을 물었다.


“혹시 심가장의 행렬이나 마차..... 아니면 그와 관련된 것을 본 적 있으십니까?”


“심가장...... 아아, 심가장의 마차가 저쪽 길을 따라 심상의 지단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문주님.”


염치없게도 나는 불철주야 천도를 지키는 이들에게 그럴듯한 격려 하나 전하지 못하고 곧장 검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오가는 사람이 많아 급기야 나는 경공을 펼쳐 지붕으로 뛰어올라 날 듯이 천도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나아가기를 잠시. 오래지 않아 꽤 커다란 규모의 장원에 도착한 나는 그 현판을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심가장. 왜 진작 생각을 못했을까? 외부로 나간 게 아니라면 심하령이 갈만한 곳은 이곳일 가능성이 컸을 텐데.


“잠깐.”


그때 무심코 문을 지나쳐 들어가려 한 나를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누군가가 앞을 막아서니 절로 얼굴이 굳어간다. 아니지,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대단한 위인이었다고. 당연한 일이건만 지금까지 그런 걸 못 느낀 게 이상한 일이다. 너무 호사를 누렸어도 문제로군.


“지금은 아무도 들일 수 없으니 물러가시오.”


문을 막고 있는 건 칼을 찬 두 명의 호위무사다. 고작 두 명이라고 우습게 보기도 어려운 것이, 일신의 기도가 상당해서 어지간한 이들이 행패를 부리더라도 소란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중 긴 머리를 한데 묶은 붉은 무복의 도객이 얄팍한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안에 기별을 넣어 주시겠습니까? 천의검문의 소문주입니다.”


생각 같아서 당장 안에 있을 심하령에게 찾아가고 싶었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애써 예를 표했다. 그러나 어쨰 두 호위무사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붉은 무복을 입은 도객이 딱딱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어떤 외인도 명 없이 안에 들일 수 없소. 물러나시오!”


“저는 외인이 아니라....... 그렇다면 좋습니다. 안에 기별을 넣어 주신다면 그 명이란 것이 떨어질 테니 부디 그것만 부탁드리지요.”


“부(否). 후일 기별을 넣어 다시 오시오.”


도객과 상반되는 푸른 무복의 검객이 나섰다. 답답함이 먼저였고 이어서 걷잡을 수 없이 의혹이 피어오른다. 그 명이란 것은, 어쩌면 천의검문의 소문주를 들이지 말라는 따위의 명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왜?


“도대체 무슨 큰일이 있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더 대답할 필요는 없을 듯 하오. 당장 물어서지 않는다면 손을 쓰겠소.”


도객에게선 심지어 줄기줄기 투기마저 피어올랐다. 금방이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자세마저 취하고 있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내공이 꿈틀대며 그 투기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두 무인이 명백한 적의를 표한 다음이었다.


“네놈!”


“네놈이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 아니, 살의가 쏟아진다.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거기에 위양풍의 말과 심하령의 행방까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쳐라!”


일갈과 함께 두 무인이 몸을 날렸다. 기습적으로 달려든 한 쌍의 병장기에 느릿느릿 눈앞에 날아드는 게 보였다. 검기과 도기가 넘실대는 예기를 보고 나는 마음을 굳혔다. 무슨 영문인지는 이제 알고 싶지도 않다. 지금 중요한 건 저들이 내 정체를 알고도 적의를 표한 것. 다시 말해서 심가장이 내게 칼을 들이밀었다는 사실 뿐이다.


카앙!


호신강기에 튕겨 나온 병장기를 바라보는 두 무인이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에 빠져 있다. 특히 도객 쪽은 날 자체가 상해버린 애병을 확인하곤 이를 박박 갈아댔다.


“제기랄! 듣던 대로 정말 괴물이다! 청연, 호각을 불게! 전력을 다해도 여기서 뼈를 묻을 수밖에 없겠어.”


도객의 말에 푸른 옷을 입은 검객이 품속에서 호각을 불어 제꼈다. 순식간에 푸르고 붉은 무복을 입을 이들이 개미떼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나를 둘러쌌다.


“준비했었나........”


허탈한 마음에 중얼거린 한마디에는 혼란과 회한이 가득했다. 저들이 취한 포위진이란 한 명의 강대한 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방진. 거기에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빠른 대처.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될 리가 없다.


카캉! 캉! 캉!


살기등등한 공세가 쏟아진다. 그런 가운데 나는 채 그것을 쳐내거나 피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내공을 발해 호신강기를 펼쳐냈다. 복잡한 심경을 두드리는 날붙이 소리가 더욱 나를 심란하게 만든다.


“괴, 괴물! 듣던대로 괴물이다!”


듣던대로라. 부러진 검을 버리며 기수식을 취하는 무인에게서 짙은 공포심이 흘러나온다. 그 무방비함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건 내가 아직 망설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호신강기만을 두르고 뚝심있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싶었다.


“막아! 몸으로라도 막아라!”


누군가의 외침에 급기야 무인들이 병장기까지 내던지며 내게 달라붙었다. 조금만 신경을 기울이면 단숨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이들을 튕겨버릴 수 있다. 오히려 그러지 않으려 애쓰는 게 더욱 고된 일이었다.


“조, 좋아! 잘하고 있다! 청검조는 그렇게 놈의 손발을 묶어라! 홍도조는 격체전력으로 내게 내공을 집중해라!!”


붉은 무복을 휘날리며 도객들이 한데 모이고, 푸른 무복의 검객들은 검객이라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병장기 대신 몸으로 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나는 느리더라도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큭!”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격통을 느끼고 주렁주렁 검객들을 매단 채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호신강기는 멀쩡했다. 하지만 호신강기를 뚫고 뭔가가 가슴팍에 박혔다. 가슴팍에 손을 대니 자그마한 쇳조각이 하나 느껴졌다. 그와 함께 한껏 억누르던 심신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내공이 폭발적으로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크앗!”


한순간의 기세로 뭇 무인들이 떨어져 나갔다. 기회다. 다시 저들의 손이 닿기 전에, 나는 하늘로 뛰쳐 올랐다. 그리고는 발보등공(跋步登空)의 수법으로 더욱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경공. 덕분에 지금 허공에 떠오른 내 주위엔 아무도 없다. 그 일순을 통해 나는 가슴팍에 박혀 든 것을 빼들었다. 아릿한 아픔과 함께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이건.....”


가슴에 박혀든 물건은 괴상한 모양을 한 암기였다. 암기임에도 날카롭기는커녕 둔중하기만 하다. 하지만 호신강기를 뚫고 왔다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분명하다. 그런 물건까지 날릴 정도라. 점점 미혹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매를 찢어 그것을 잘 갈무리한 다음, 아슬아슬하게 장원의 지붕에 착지하고 아래에 바글바글한 무인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있는지 움직임이 부산하다. 어쩌다 보니 잘 지나쳐 온 것 같군. 우직하게 힘을 아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던가.


“거기까지다, 이 흉적!”


놀랍게도 지붕에 착지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자가 있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위협하고 있는 여인은 기다란 창을 내게 겨누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고 당황한 나머지 발을 헛디뎠다. 발치에 있던 기와가 버석 부서지며 파편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더 이상은 행패를 부린다면 나 철혈신창 곽여정이 용서치 않겠다!”


“.....아니었군.”


머리 색이며 목소리까지 닮은 것이라고는 하나 없었고 창을 든 여성이라는 점만 같을 뿐이다. 한마디로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나는 피가 줄줄 흐르는 가슴을 눌러 피를 멎게 해 두곤 포권을 쥐어 보였다.


“천의검문의 도군이외다. 여인에게 손속이 거칠다 탓하지 마시오.”


“뭐, 뭐?”


들불 맞은 소처럼 거침없이 달려들자 곽여정이라는 여인이 당황해서 창을 휘두르며 물러선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고 나는 창술을 상대하는 데도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 여인은 당혹스러움을 떨쳐내고 금세 날렵하게 창을 뻗어냈지만, 나는 손쉽게 창을 피해내고 단숨에 창대를 꺾어버렸다.

나무로 된 창대가 꺾이자 철혈신창이라는 여인은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았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여인을 지나쳐가며 말했다.


“후일 나를 찾아온다면 변상하리다. 그럼....”


“어딜 감히!”


창술만이 진신절기인 줄 알았던 여인이 갑자기 부러진 창을 버리고 적수공권으로 달려들었다. 쌍장을 마주 쳐내며 나는 지붕에서 발이 떨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견뎌냈다. 창을 버린 여인이 자신만만하게 쌍장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바보같긴. 내 특기는 사실 장법이지. 별호는 내가 만든 가짜다!”


허허실실을 노린 괜찮은 수이긴 했다. 단지 그 중간에 너무 뻣뻣해서 부자연스럽고 무엇보다 상대가 나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기수식까지 취하는 여유를 보였다.


“자, 얼마든지 와 보......”


여인의 말을 대번에 자르고 나는 허리에 찬 검을 쥐었다. 발검은 간신히 그만두고 손목을 틀어 허리띠를 끊어 검집까지 통째로 빼 들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여전히 일절. 웅혼한 풍압이 터져 나오며 거짓 별호를 댄 여인이 죽 밀려나서 지붕 끝의 장식물에 발을 걸고 멈추었다.


“꺄악! 이게 무슨.....”


검풍에 밀려난 여인이 뒤늦게 방어세를 갖추지만 느리다. 실전경험이 부족한 무인이라는 느낌이 역력하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저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대처하는 것만 봐도 알겠다. 단숨에 쇄도한 나는 재차 검집을 휘둘러 여인이 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리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꺄앗!”


지붕 귀퉁이가 과육을 베어 먹은 것처럼 거친 선을 남기고 통째로 잘려나갔다. 그 위에 올라 있던 여인이 버둥대는 걸 내려다보며 나는 등을 돌렸다. 무공 수준이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


그렇게 여인을 제압한 나는 다시 지붕을 타고 뛰어올라 가장 커다란 건물로 향했다. 날렵하게 몸을 회전해 기세를 죽이고 살짝 열려 있는 창문에 착지하니 주위가 어두컴컴하다.

내가 들어온 곳은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짧았던 격전이 잊혀질 정도로 이 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높이가 제법 높아서 그런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도 작기만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문을 열고 텅 빈 복도로 나가 이상하게 비어 있는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쓰지 않는 곳인가? 그런 곳 치고는 먼지 하나 없이 정리가 잘 돼 있군.

얼마나 텅 빈 곳을 헤매고 계단을 올랐다가 내려갔을까? 한참 지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거의 스무 층은 헤맸건만 사람은커녕 나가는 곳조차 없다고?


“빌어먹을.”


뒤늦게 나는 이 어색한 적막이 인위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법이다. 확신을 더하기 위해 창을 타고 바깥으로 뛰어내려 보니 역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여긴 현실이 아니라 진법 속 세상이다.


“정말로 나를 적대하기로 하기로 한 겁니까....... 심 소저!”


울컥하는 감정이 폭발하여 사자후를 터트렸다. 그렇지만 건물이 흔들리기는커녕 미약한 진동조치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껏 소리를 내지른 덕에 일렁이는 마음이 금세 진정되어 나는 금방 방도를 찾아냈다.


“중한 진법일 텐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소저.”


눈을 감고 더욱 마음을 가라앉힌다. 새벽녘 호수 같은 마음 아래 잘벼린 검을 세웠다. 그 검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잔잔한 호수에 그려내고 천천히 호수에 손을 담근다. 잔잔한 물결과 함께 끄집어낸 그 검의 이름은 바로 진천이었다.


“하아압!”


연이어 검기가 몰아친다. 검이 닿지 않은 곳까지 의념이 만들어낸 검기가 휘몰아쳐 적막한 방과 복도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곧이어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진법은 깨지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는 빛도 냄새도 감촉도 없는 무의 공간이 있었다.


“아아.....”


이상한 느낌에 순식간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감이 끊어지니 이런저런 생각도, 혼란도 점점 무뎌진다. 어미 뱃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몸이 웅크려지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막대한 내공마저도 점점 흐려지고 나는 깊은 늪 속에 빠져들었다.


“그만!”


압도적인 어둠에 녹아들기 전, 나는 오롯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검을 빼 들었다. 몸은 느껴지지 않건만 검의 형태만은 명확하다. 이미 내게 검은 신외지물을 넘어선 절대적인 개념이었다.

검이 등장하며 온 세상이 일그러지고 무너지는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지만 두 번의 생이 담긴 검이란 존재는 더없이 찬란하고 선명했다. 심신을 넘어선 그것을 직시한 순간, 나는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좋아, 좋다! 아주 좋아!”


세월이 쌓이며 무뎌졌던 검의가 낱낱이 보인다. 소천검이라는 허울이 벗겨지고 천하제일의 둔재라는 굴레도 벗겨진다. 마지막으로 혼돈에 순응했던 무제라는 그림자도 천천히 흐려지고, 내 것이 아니었으나 분명 존재했던 궁극의 경지가 순백의 나신을 드러냈다.


“으하하하하!!!”


검을 쥐었다. 아니, 육체가 없어서 검을 마음에 떠올렸다. 그리고 형체도 없는 내가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를 때 드는 잡상. 육신의 고통. 그런 것 따위가 사라진 이곳은 말 그대로 검만이 존재하는 세계(劍界). 형언할 수 없는 뭇 것들이 존재하는 무(武)의 보고다.


“일세지검(一世之檢)......”


그 안에서 가장 익숙한 보물을 손에 쥐었다. 기천의 적을 가르고 이 세상 무엇이든 갈라놓는 보물의 이름을 흥에 겨워 입에 담았다.


“대횡참!”


나를 중심으로 갈라진 틈을 탁 희미해졌던 사실들이 격류처럼 내게 쏟아졌다. 찰나의 순간 억겁의 살타래에 휩싸인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오직 손에 쥔 검만을 믿고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긴 숨을 내쉬며 힘차게 검을 집어넣었다.


“후우.....”


일세지검이라는 이름이 우습게 내가 행한 참격은 나무 바닥에 작은 생채기를 냈을 뿐인 일초식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나약한 검이 온 세상을 갈랐다. 진법이 만들어낸 허상의 세계를 갈라버린 나는 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내 앞에는 잔뜩 경악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도 공자......?”


어두컴컴한 곳에서 가장 먼저 나를 알아본 건 급히 불을 켠 심하령이었다. 심하령을 시작으로 사방의 등에 불이 밝혀지고 굳게 닫혔던 창문이 열렸다. 심하령이 앉아있던 자리 맞은편에 앉아있던 문사풍의 사내가 진심으로 감탄해서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경천동지할 무공! 무허(無虛)를 일격에...... 너는 신선. 아니, 검선(劍仙)이다!”


“빨리 진법을 해제해요! 이분은 적이 아니란 말에요!”


적이 아니라? 그럼 나게 던진 암기는 무엇이고 왜 심가장의 모두가 나를 적대했는가? 당장 따지고 싶어도 지금은 맥이 풀려서 쓴소리 하나도 내뱉기 어려웠다. 심하령의 부축을 받아 빈자리에 몸을 기댄 다음에도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산만하게 떠들고 있었다.


“푸하핫! 세인들의 눈이 단단히 삐었어. 저런 자의 별호에 왜 소(小)자가 붙은 거야? 대천검. 그래, 이제부터 대천검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심 소저. 우선 자초지정을 좀 들어야겠습니다만.”


정신사나운 사내는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심하령을 불렀다. 잠시 후 심하령이 천천히 내 시선을 마주하며 어렵사리 입을 달싹였다.


“죄송해요. 도 공자님. 모두 다 저희 심가장의 불찰이에요. 그리고 서둘러서 말씀을 전하지 못한 제 잘못이기도 하고요.”


“말씀해 보십시오.”


물어볼 것은 많았지만 나는 심하령에게 먼저 기회를 주었다. 정말 심가장이나 심하령이 위양풍의 말대로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면밀하게 밝히도록. 하지만 복잡하게도 나는 똑똑한 그녀가 나를 완벽히 속여넘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모든 것은......... 모처에 유폐됐던 일기당천이 남해로 들어온 다음이에요.”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또 오랜만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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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1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1 1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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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8. 등하불명(燈下不明) (6) +4 16.02.14 836 14 28쪽
204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3 16.02.10 916 14 18쪽
203 8. 등하불명(燈下不明) (4) +7 15.12.13 1,072 14 21쪽
202 8. 등하불명(燈下不明) (3) +11 15.10.12 866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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