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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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bleu
작품등록일 :
2016.10.22 21:14
최근연재일 :
2017.10.24 00:18
연재수 :
265 회
조회수 :
63,680
추천수 :
1,206
글자수 :
1,636,485

작성
17.03.1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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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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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6쪽

#26. 시간의 수레바퀴

DUMMY

유리병 안에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

물이 넘칠 듯 넘칠 듯 병 입구에서 맴돌았다. 극지방의 얼음처럼 눈부신 흰 병 속에, 해구의 밑바닥처럼 시커먼 액체가 들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 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액체가 다시 병 속에서 회전했다. 이내 그 어둠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강철처럼 차가웠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에 그는 거부의 몸짓을 했다.


-가만히 있어.


강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놈. 아직 못 죽는다.


그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뭔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다가왔다. 그를 감싸주려는 것같이. 그는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속임수였다. 따뜻하던 문이 열리더니 아까의 강철 칼날들이 쏟아져 나왔다. 울컥울컥 밀고 들어왔다.

어둠이 몸을 채워 가면서, 오직 빛으로만 가득하던 눈부신 시야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사물의 윤곽선이 돌아왔다. 색깔들도 나타났다. 그 선과 색깔들은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다. 부산한 풍경.

청각이 돌아왔다. 발걸음 소리들. 말소리들. 흐느끼는 소리들.

촉각도 현실감을 찾았다. 냉온의 상반되는 감각.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미친놈아, 뭐하는 거야!”


이 말은 마리엔 어로 나왔다.

아이언은 그의 얼굴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닦았다.


“고맙다고 해.”


제이드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지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입가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자 누군가가 얼른 닦아냈다. 그는 그 사람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라스카.”


그의 손가락들이 꿈틀거렸다. 라스카가 부드럽게 그 손을 잡았다. 안도감이 가슴을 적셔나갔다.


“아주 고마워.”

“욕은 조금 이따 하겠다.”


아이언은 투덜거리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살았다. 번거로운 작업이었어.”


레나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해야지.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살려놓으니 대뜸 욕이야.”

“사과하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고지식한 목소리는 알렌의 것이었다. 아이언은 어깨를 으쓱했다.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 양해해주지. 괜찮았어?”


라스카의 손등을 쓰다듬던 제이드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가 괜찮았냐는 거야?”


아직도 턱까지 얼얼했다. 무지막지한 키스...... 아니, 인공호흡...... 아니, 강제 음용의 흔적이었다.


“흠.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처음 해본다는 건 확실히 알겠더군.”


알렌이 끼어들어 대마법사들의 미치고 환장할 대화를 중단시켰다.


“좀 쉬시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눈치 없고 마이 페이스이기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언 메타였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젊은이의 심정을 배려해 주지 않았다. 그는 환자의 가족이며 집안사람들을 병실에서 내쫓았다.


“아니다. 이제 목숨은 건졌다. 제이드, 나하고 얘기 좀 해야겠어.”

“저도 나갈까요?”


라스카가 조용히 물었다. 제이드가 대답했다.


“아니. 너는 여기 있어. 그리고 나 좀 일으켜주겠니?”


그녀는 선생님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얇은 셔츠를 통해 예전보다 더 말라 버린 몸이 느껴졌다. 라스카는 베개 옆에 몸을 버티고 걸터앉았다. 제이드는 겨우 일어나서 제자에게 기대었다.

아이언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어린 아가씨 품이 더 좋나.”

“당연한 걸 뭘 물어.”

“넌 그럴 자격 없다.”

“알고 있어.”


입가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었지만 회색 눈빛은 조금씩 차가워졌다.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

“안다고 생각해.”

“본인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알고 있나?”

“아직은 인간이야.”

“인간. 그렇지. 어떤 인간인가. 너는 계몽주의자다.”

“그래.”

“휴머니스트다.”

“그래.”

“그러나 무엇보다도 폭압적인 군주다.”

“......”

“독재자란 말이야. 알아듣겠나?”

“알아들었어.”

“후회할 생각 없나?”


제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없어.”


아이언은 일렁이는 회색 눈을 라스카에게 향했다.


“저놈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살아 있어서는 안돼. 라스카, 어떻게 생각하지?”


라스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더 단단히 선생님을 안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아서 치를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편이 더 괴로울지도 모르지.”


아이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있을지, 잘 생각해봐. 난 내일까지 머무르겠다.”


삐걱. 문이 닫혔다.


“넌 놀라지 않는구나.”

“예상했어요.”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고 인과가 뒤바뀌는 일. 라스카는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흰 꽃을 상기했다. 그 꽃이 라스카 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꽃을 꺾은 적이 있었다. 꺾인 꽃을 되살려낸 적이 있었다.

세계의 유일한 마법사에게 허락되는 기적.


“선생님과 비교하면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사라고 할 수도 없었나 봐요.”

“너는...... 알고 있구나.”


라스카의 창백한 얼굴에 더 창백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선생님, 제 고양이는 잊으셨더라고요.”

“헉.”


제이드는 정말 잊고 있었다는 듯 신음소리를 냈다.


“이런. 미안해.”

“그 일 말고 다른 일이 미안하지 않으세요?”

“미안한 일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아니요. 괜찮아요.”


라스카는 손을 뻗어 등불에 갓을 씌웠다. 어둑어둑해졌다. 밤 여덟 시. 석양을 덮으며 찾아오는 신선한 첫 어둠이었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세요. 의사 선생님을 오시라고 할까요? 아니면 혼자 쉬시겠어요?”

“아니. 네가 여기 있어 줘.”

“네.”


제이드는 소녀의 손을 잡은 채 잠이 들었다.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라스카는 어스름 속에 묻힌 그 얼굴을 바라보며 그에게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으로 가득한 로엔 이피스의 가을밤이었다.


작가의말

짧아서 죄송합니다만 다음 장면을 한 편으로 붙이기가 힘들어서 그냥 잘랐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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