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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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bleu
작품등록일 :
2016.10.22 21:14
최근연재일 :
2017.10.2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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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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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1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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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7. 그래도 인간 세상은 돌아간다

DUMMY

라스카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점심 안 드세요?”

“라스카니? 미안하지만 별 생각 없다고 전해주겠니?”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드셨는데요. 각하는 출근하셨고 레나 언니는 라디하고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들어와.”


아니,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하지만 라스카는 잠자코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제이드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몇 권의 책이 뒤적거리다 만 모양새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침대에는 잔 흔적이 없었고, 옷장이며 서랍장들은 대부분 전쟁에 나가기 전 잠가 둔 그대로였다.

방 주인이 있는데도 방엔 묘하게 인기척이 없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가을 햇살만 넘치도록 쏟아졌다.

선생님 얼굴은 예전과 별다르지 않았다. 핼쑥하긴 했지만 그 위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그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앉아. 너는 밥 먹었니?”

“아뇨. 저도 안 먹었어요. 같이 먹어요.”

“저런, 굶고 다니지 마.”

“이제 먹을 거라니까요. 오늘 메뉴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빨리 내려가요.”


그는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알렌도 레나도 없다고?”

“네. 저하고 선생님밖에 없어요.”

“그렇구나. 식사를 두 번 차리게 하긴 미안하니 나가서 먹을까.”


짧은 침묵 끝에 라스카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도 좋지만, 선생님,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무리라니. 그런 생각 안 했는데.”


아이언 메타의 방문 사건 이후 라스카는 밖에 나갈 때마다 따가운 시선들에 찔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도 그럴진대 선생님 본인에게는 얼마나 심할 것인가.

소문은 무척 빠르게 퍼져나갔다. 왜곡되는 속도는 더 빨랐다.

-남자를 좋아한다면서? 어쩐지 결혼을 안 한다 했어.

-반은 여자라면서? 어쩐지 남자답지 못하다 했어.

-늙지를 않는다면서? 요사해서 그런가.


제이드 라피트는 해명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부상을 입고 집에 돌아온 전역 군인답게 행동했다. 휴식. 회복. 간혹 외출.

9월이 다 지나가도록 로엔 이피스는 조용했다. 아무도 그와 길게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늘 주변사람들과 웃고 지내던 그였기에 라스카는 그 상황이 어색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모습은 어색해 보이지를 않았다. 응접실에서 혼자 신문을 읽고 있을 때, 테라스에서 햇볕을 쬐고 있을 때,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볼 때, 그의 주변엔 부드럽게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침묵의 공기가 어렸다.

기분 탓이었을까.

얼굴만 젊고 하는 짓은 늙었다고 여자아이들이 그를 아저씨라고 놀리곤 했다. 그러나 라스카는 마법을 잃어버린 그의 얼굴에서 스물여덟 살 청년의 모습을 보았다.

이마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림자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다. 자꾸 먼 곳으로 날아가는 시선은 미래에서 온 불안이다. 고독의 신이 있다면 괴롭히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제이드는 방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멈추어 섰다.


“그렇군. 네가 신경이 쓰이겠구나. 나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간단히 챙겨 먹도록 하자.”


라스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저 가고 싶은 식당 있어요. 아직 런치 안 끝났을 텐데 갈까요?”

“가 보고 싶은 식당이 있어?”

“네. 저 금방 옷 갈아입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자기 방으로 달려가서 옷장을 뒤집었다.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고심한 끝에 반짝이가 달린 파란 블라우스와 나풀나풀한 흰색 주름치마를 골랐다. 사 놓고 한 번도 안 신었던 뾰족 코 구두도 드디어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급히 머리를 땋으려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라스카는 마음을 바꾸었다. 땋은 머리는 너무 어린애 같아. 풀고 가야지.

응접실에서 제자를 기다리던 제이드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

“거긴 예쁘게 하고 가야 돼요.”

“드레스 코드가 있는 곳인가?”

“아뇨. 일단 갈까요?”


하지만 10분도 안 되어 라스카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다. 굽이 너무 높아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하다 못해 발이 엄청 아파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제이드는 참지 못하고 낄낄 웃었다.


“그냥 가까운 데 가자.”

“아악! 싫어요.”

“업어 줄까?”

“치마 입었단 말이에요!”


남에게 업혀 다니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다. 제이드는 제자를 길거리 벤치에 앉혀 두고 모퉁이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곧 플랫슈즈 한 켤레가 그녀 앞에 놓였다.


“이거 신어.”

“선생님, 저 너무 멍청해서 짜증나요.”

“아냐. 처음엔 다 그래. 넌 키가 작지도 않으니까 하이힐 안 신어도 된다.”

“하지만 힐이 예쁜데.”


낯익은 목소리가 라스카를 거들었다.


“그건 그렇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


“신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군인 물이 덜 빠진 딱딱한 말투였다.


“오랜만입니다. 원수 각하.”

“이제 군인 아니잖아. 반말 써.”

“그래? 고마워, 라나. 좋아 보이는데.”


제이드는 씩 웃었다. 밝은 미소였다. 방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얼굴에 깔려 있던 묘한 어둠은 아까부터 싹 사라졌다. 그 차이를 알아차린 것은 라스카 뿐이었다.

라나는 과연 좋아 보였다. 아름다운 금발은 잘 말아 등 위로 늘어뜨렸고, 꼼꼼히 화장을 하여 전쟁터에서 그을린 얼굴을 커버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강렬한 붉은 색 원피스가 성숙한 몸의 굴곡을 잘 드러냈다. 가죽 하이힐이 쭉 뻗은 각선미를 한껏 강조해 주었다.


“외출 중이야? 당신을 보러 로엔 이피스에 가고 있었는데.”

“그래. 오랜만에 제자랑 외식 한 번 하려고. 내겐 무슨 볼일이지?”

“내가 어제 개선한 거 몰라? 전공을 분배해야 하는데 당신과 할 말이 제일 많아.”

“난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하지만 전공은 거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냐.”

“원수 각하께서 알아서 잘 해 주시면 안 되나?”

“아무거나 막 떠안기는 수가 있어.”

“그건 곤란한데.”


제이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럼 셋이 같이 점심 먹을까. 라스카, 네가 가려던 곳에 가자. 어디지?”


이번엔 라스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원수 각하께서 가실 만한 곳은 아닌데......”


잠시 후 세 사람은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캐주얼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라나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와우. 벽지 귀엽네. 소녀 느낌 물씬한걸.”


라스카는 억울해졌다. 내가 여기 좋아서 오자고 한 거 아닌데. 이런 건 선생님이 좋아하시는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억울하나.

속을 알 수 없는 선생님의 표정도 맘에 안 들었다. 저거 설마 웃고 있는 건가. 이 상황이 재밌는 거야? 위로하는 보람이 없는 인간 같으니.


“손님 중에 우리가 나이 제일 많은 것 같지 않아?”


라나가 투덜거리자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주변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젊음의 활기가 과하여 시끌시끌 귀가 아팠다.

특히 젊은 커플들이 많았다. 스무 살 전후의 여자아이들이 빈약한 경험과 예산으로 치장하느라 온갖 희한한 패션들의 전시장이었다.


“라스카 양, 요즘은 저렇게 치렁치렁한 목걸이가 유행인가? 솔직히 예쁜 줄 모르겠는데.”


직설적이기로는 선생님에게 지지 않는 벨리어스 백작 각하의 물음에 라스카는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진짜 보석 목걸이를 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모조 보석으로 만들면 싸구려 티가 나니까 아예 저렇게 치렁치렁 늘어뜨려서 패션으로 만든 것입니다.”

“멀쩡한 옷을 찢어서 입고 다니는 것도 패션의 일환?”

“네. 고급 레이스를 사용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아하. 이해했어.”


그녀는 천으로 만든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맥주잔을 들었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품위 있는 오닉스 목걸이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맥주는 괜찮네.”


벌컥벌컥 잔을 비우는 모습에선 별로 품위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라나, 내가 여자 구두는 잘 몰라서. 하이힐도 신는 요령이 있나?”

“왜, 제자한테 도움이 될까 해서?”

“그래.”

“잘 신는 요령 따윈 없어. 발에 맞는 신발을 고르는 게 요령이지. 맞춤으로 할 수 있으면 좋고. 디자이너 소개해 줄까.”

“그럼 고맙지.”


라스카는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칵테일 새우 샐러드, 닭튀김, 소스를 발라 구운 감자 같은 것들이었다.


“아침도 점심도 고열량이라니. 안 좋은데.”


입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라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능숙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전장의 빈약한 식사에 익숙해서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식사 예절은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이 점은 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식도락과는 거리가 먼 그였으나 완벽주의자인 라이네이드 로엔 라피트 백작 부인에게서 혹독하게 훈련받은 덕에 식사 예절만큼은 어느 궁정에 갖다 놔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이 자리에 있을까.

칵테일 새우 같은 건 그냥 찍어 먹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라스카는 입 속에 잔뜩 음식을 우겨넣고 우물거렸다.


“이제 용건을 들어볼까?”


성질 급한 제이드가 채근했다. 라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스카 양이 들어도 될는지? 아직 밖에 새어나가면 안 되는데.”

“내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는 전부 라스카도 들어도 돼. 빨리 말해 봐.”

“무슨 말을 하든 거부하려고 그러지?”

“그건 들은 후에 판단하지.”


아하. 기가 강하다는 게 이런 거군.

라나는 동그란 맥주잔 입구를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맥주 거품이 묻어났다.


“어려워. 아주 어려워. 당신에게 뭔가를 주어야 하는데, 줄 것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지.”

“안 줘도 돼.”

“하지만 절차에 따라 나는 묻겠어. 무엇을 원하지, 테일러 라피트 대령?”


제이드는 팔짱을 끼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눈빛.


“평화?”

“음?”

“자유?”

“뭐라는 거야.”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라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라스카가 왜 사레가 들려 캑캑대는지 몰랐다.


“안타깝지만 평화와 자유는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니네. 우리 국왕 전하도 마찬가지일 걸. 아뢰어 볼까?”

“화낼 것 같군. 하지 마.”

“내 생각도 그래. 자자, 어른들끼리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하자고. 다음 중에서 골라 봐. 명예, 재물, 권한.”

“유서 깊은 함정이군. 충성과 겸양의 뜻을 표하며 모두 거부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할 거야.”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판의 측면에서는 나는 죽은 사람이야. 관짝에 대못이 쾅쾅 박혔다고. 대문 밖에 누가 와서 여기 반역자가 있다고 소리친다 하더라도 난 놀랄 것 같지 않군. 그러려니 하겠지.”

“내가 용납할 수 없어.”

“음?”

“아니잖아, 반역자. 당신은 국가의 영광을 드높였고 군인들의 생명을 보존했다.”

“그렇게 생각해?”

“내가 농락당했다며 분노할 거라 생각했나?”


그녀가 되묻자 제이드는 허를 찔린 표정이 되었다. 라나는 그 표정이 좋았다.


“변화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오기도 하지.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스스로를 비난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겠어. 따지고 보면 당신을 거기까지 몰아붙인 건 나라고 할 수 있지. 인과를 따지다 보면 끝이 없어.”

“하지만 선택은 내가 했지.”

“당신 혼자 선택한 게 아냐.”

“선택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장군은 피식 웃었다. 맥주잔이 비워졌다.


“출진, 전투, 승리. 그게 내 삶의 방식이었지. 삶의 방식이란 삶의 목적, 과정, 결과를 모두 포괄하는 거야. 과정이 좋았다고 실패를 받아들일 수도, 결과가 좋았다고 과정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오점은 오점대로, 영광은 영광대로 남지. 선택을 하고 결과를 감당하는 것만이 인생은 아냐. 어쩔 수 없는 파도를 견디는 것도 인생의 일부야.”

“......”

“전쟁에 임하여 승리하고자 했던 건 나의 의지였지만, 전쟁에 나가게 된 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그리고 내 인생엔 이 전쟁 말고도 많은 게 있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살다 보면 죽는 것보다 못한 일도 겪을 수 있고, 더 살다 보면 살아 있어서 다행인 순간도 와. 제이드 라피트, 잊어버려.”


제이드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원수 각하, 저는 이미 상훈을 받은 것 같군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둘 다 접시 위의 음식을 반도 먹지 않았다. 제이드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럼 사소한 것들만 더 받도록 하지. 스타넬 강가에 별장 하나 주면 감사하겠어.”

“아하. 재물로 할까?”

“볕이 잘 드는 곳에. 그리고 낚시 도구 일체와 월 200달란트 가량의 연금.”

“......은퇴의 꿈을 꾸고 있군.”

“물론이지. 더 있어. 시중을 들 미소년들도 보내 줘. 일은 할 만큼 했잖아. 환락의 은퇴생활을 누려야겠어.”

“헐.”


라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관짝 속에서 여생을 보내긴 너무 억울하다. 이제 세상이 다 알았으니 당당하게 살겠어. 용기를 줘서 고마워.”

“야...... 너......”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조용히 듣고 있던 라스카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각하, 선생님께서 각하를 놀리고 계신 것입니다.”

“뭐야? 그럴 수 있어?”


놀리면 놀리는 대로 발끈하니 놀릴 맛이 제법 났다. 그러나 라나리스의 손등에 힘줄이 파랗게 돋아난 걸 보니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제이드는 그쯤 해두었다.


“농담이야. 뭘 받을지는 생각해보지. 이왕이면 나 말고 우리 가문에 줘. 알렌에게라도 도움이 되게.”

“알렌은 크렐라인에서 고생했더군.”

“고생은 현재 진행형이야.”

“사고뭉치 형 때문에 고생이 더 많겠지.”

“그건 그래.”


라나는 군략을 짤 때처럼 턱 어림을 어루만졌다. 화장 지워질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알렌은 좀 고지식하잖아. 당신의 비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충격 받은 것 같더군.”

“해명했어?”

“해명이 소용이 있을까?”

“동생한테도 해명을 하지 않았어?”

“사실은 네가 해명을 듣고 싶은 것 아니야?”


이번에는 그녀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그건...... 그게...... 해명을 해줄 수 있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아.”

“남들에게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 당신의 특기였잖아. 논쟁가 제이드 라피트.”

“이해도 설득도 불가능해.”

“시도해 보겠어.”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스카는 오렌지 주스를 다 마셔 버렸다. 그 사실이 아쉬웠다. 선생님과 라나리스 백작 각하의 대화 말고 다른 집중할 것이 있었으면 했다.

그녀는 기껏 차려입은 주름치마 자락을 꽉 붙들었다.

저런 대화는 오늘 내가 하려고 한 거였는데.

대답도 내가 듣고 싶었는데.


“세상에 도는 말이 다 틀린 건 아냐. 다 맞지도 않고. 나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어. 남자를 좋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자도 좋아할 수 있지. 여자를 만난 적도 있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여자를 더 많이 만났어. 그리고 내 취향에 소위 여성스러운 점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대답이 되었어?”

“어...... 응...... 그런가.”

“커밍아웃 처음 해봐. 매우 당황스럽고 부끄럽기 때문에 배려해 줬으면 좋겠는데.”

“......”

“다 먹은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날까?”

“잠깐! 잠깐만!”


라나는 두 손을 휘저으며 그의 주의를 요구했다.


“왜?”

“하나만 더 물어볼래. 하나만 더.”

“뭔데?”

“마리엔 궁정마법사랑 스캔들 났잖아. 그 사람 좋아해? 정말?”


질문을 던진 라나가 되레 깜짝 놀랐다. 제이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면서 푸른 눈빛이 거의 표독스럽게 그녀를 쏘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개자식 얘기는 다시는 하지 마!”

“헐......”


라스카는 절룩이며 로엔 이피스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사준 플랫 슈즈는 신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현관에서 하이힐을 벗자 빨갛게 물집이 잡힌 맨발이 드러났다. 제이드가 한숨을 쉬었다.


“발이 이게 뭐냐. 이젠 고쳐 줄 수도 없는데. 가서 약 발라라.”

“네. 알겠어요.”

“밥을 별로 안 먹는 것 같던데 몸이 안 좋니?”

“아뇨.”


마음이 안좋은데요.


“선생님, 사실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는데요. 오늘치 대화는 충분히 하신 것 같으니까 내일 할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데? 들어보자.”

“들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안 그럴게. 말해봐.”


선생님이 들어서 기뻐하실 만한 말은 라나리스 백작 각하께서 다 해버리셨어요.


“선생님, 저기, 있잖아요. 레나 언니랑 아르미렌 각하하고 말씀을 해보세요.”

“그야 나도 하고 싶지만.”

“먼저 가서 이야기 해보세요. 제 생각엔 레나 언니하고는 잘 풀릴 것 같아요.”

“그래? 왜?”

“레나 언니한텐, 라디하고 시르첸 오빠가 있으니까.”

“그게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구나.”


라스카는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 끌었다. 제이드는 끄는 대로 따라왔다. 2층 복도. 둘이서 자주 서 있던 자리였다.


“아르미렌 각하께는 아무도 없어요. 무척 괴로워하고 계실 거예요.”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겠지.”

“아뇨. 아니요. 각하는 좀 고지식하긴 하지만 사려가 깊으신 분이에요. 결국 이해해 주실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러나.”

“그러나?”

“각하께선 선생님을 따랐어요. 존경하고 사랑했어요. 그러니 충격이 크실 거예요. 형에게 난 뭐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실 거예요.”

“......”

“무척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해 주세요. 제가 주제 넘는 말씀을 드리는 거라면 용서하세요.”


라스카는 아직도 선생님 소매를 잡고 있었다. 그 손이 떨렸다.


“알렌에게 미안하다고 해야겠구나.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은 소용이 없겠지.”

“그럴지도 모르지만, 단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 네가 다음에 무슨 말할지 알겠다.”


제이드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한다는 거지?”

“빨리도 배우셨네요.”


라스카는 선생님 소매를 놓았다.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선생님 마음 먼저 추스르시고요.”

“나는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녀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그거 아시죠? 라나리스 백작 각하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글쎄.”

“잘 어울리세요.”

“너도 알다시피 나는 누군가와 연애나 결혼을 할 처지가 아니야.”

“감수해 주실지도 몰라요.”

“감수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 없다.”

“하지만 외로워 보이셔서요.”


‘내가?’ 하고 되묻는 대신 제이드는 제자의 까만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슬퍼보였다.


“라스카, 이리 와.”

“왜요......?”


인간성을 잃어 가며 차가워지던 때와는 달리 그의 손은 너무나 따뜻했다. 손길이 귓불과 뺨을 미끄러져 갔다. 라스카는 눈을 깜빡였다.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포옹.


“나는 외롭지 않아.”


라스카는 자기 마음속에서 자신도 그 존재를 모르던 얼음덩이들을 잔뜩 찾아냈다. 그 얼음덩이들은 자존심도 없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전, 어리광 부리려고 한 거 아닌데.”

“알아.”

“위로해 드리고 싶었는데.”

“너무나 위로가 됐어. 고맙구나.”

“힘들어하지 마시라고......”

“힘들지 않아. 네 덕분에.”

“저는......”

“라스카, 아무하고도 비교하지 마라.”

“네?”

“그럴 필요가 없어. 넌 내게 유일한 존재니까.”

“......”


라스카는 말이 없어졌다. 제이드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를 살려 준 것은 지금 품속에 있는 사랑스러운 라스카와, 도망친 후 소식이 없는 아이언 메타였다. 후자에 대하여는 만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노라 결의를 다지며, 그는 조금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소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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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41. Homecoming 17.08.30 112 4 10쪽
242 #41. Homecoming 17.08.29 118 4 9쪽
241 #41. Homecoming 17.08.28 127 4 14쪽
240 #41. Homecoming 17.08.15 130 3 10쪽
239 #41. Homecoming 17.08.14 110 3 8쪽
238 #41. Homecoming 17.08.13 111 3 14쪽
237 #41. Homecoming 17.08.12 121 3 7쪽
236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11 113 4 12쪽
235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10 114 4 13쪽
234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9 125 4 12쪽
233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8 141 3 9쪽
232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7 117 3 8쪽
231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6 146 4 11쪽
230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5 159 4 12쪽
229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4 120 3 10쪽
228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3 126 4 7쪽
227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8.02 155 4 14쪽
226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8.01 90 3 8쪽
225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31 106 4 8쪽
224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30 131 4 13쪽
223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29 236 3 12쪽
222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28 144 4 7쪽
221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27 208 5 9쪽
220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26 137 5 10쪽
219 #38. 안녕, 내 사랑 17.07.25 146 4 9쪽
218 #38. 안녕, 내 사랑 17.07.24 133 5 7쪽
217 #38. 안녕, 내 사랑 17.07.23 12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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