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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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bleu
작품등록일 :
2016.10.2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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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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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4. 파탄

DUMMY

세실 공주님의 첫 로엔 이피스 방문 날이었다. 세실은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다. 10시 정각에 맞추어 차를 끓이던 빌라드 집사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늙은 집사에게 관심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렌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이끌었다. 수레국화 향기가 밝은 햇살 속을 떠돌았다. 그의 손이 닿자 복숭앗빛 뺨이 더욱 발그레해졌다.


"다음부터는 좀더 가볍게 입고 와도 괜찮아."

"그러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기를 쓰고 말려서요."

"옷을 선물할까. 나를 만나러 올 때 입을 수 있게."

"와, 정말요?"

"무슨 색이 좋아?"


로엔 이피스의 사용인들은 처음에는 흐뭇하게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점점 배신감이 밀려왔다. 저건 누구냐. 우리 각하가 아니다. 

손이, 눈빛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로맨틱도 웬만큼이지, 여기가 양계장이야?


"저도 뭔가 선물할까요?"

"하하. 뭘 하사하시려고?"

"음. 뭐가 좋을까."

"너 자신이 선물이야. 자주 놀러와 줘."


사용인들은 하나둘씩 응접실을 떠났다.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빌라드 집사가 헛기침을 했다.


"다들 명이 있기 전에는 자리를 지켜라."


알렌마저 '이런 눈치 없는......' 하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집사는 60대의 관록을 과시하며 말했다.


"명을 내려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오붓한 시간 보내시도록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그런 건 알아서 해."

"참고로 말씀드리면 공주님의 다음 일정이 30분 남았습니다."


세실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 그건 괜찮아요! 일정 취소되었거든요."


알렌이 물었다.


"일정이 뭐였지?"

"드라카스 치안 유지군 증원 건으로 회의 있었어요. 그런데 미뤄졌어요. 테일러 경이 휴가 쓰셨잖아요?"

"뭐? 휴가?"

"모르셨어요? 아침 일찍 와서 휴가 내셨어요. 잘 됐어요. 쉬셔야 돼요. 쉬질 않으시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다들 무서워하는......"


세실은 심상치 않은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알렌의 안색이 하얗게 변한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시종 하나를 지목했다.


"어제 날짜 우편물들을 가져와라."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시종이 허둥지둥 달려가 우편물 상자를 들고 왔다. 알렌은 빠른 손놀림으로 편지들을 확인하더니 시퍼런 눈빛으로 시종을 노려보았다.


"이 상자에 누가 손을 댔지?"


시종이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저와 집사님 말고는......"

"집사, 왜 편지가 하나 없어졌지?"


빌라드 집사의 얼굴빛도 창백해졌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혹시 어떤 편지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알렌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시종을 다그쳤다.


"손댄 사람이 더 없을 리 없다. 누구냐. 아는 대로 대라."


시종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가족 분들 외에는......"

"가족이라고는 나와 형님뿐 아닌가. 형님이 손을 댔어?"


호통에 몸 사리는 와중에도 시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편물 확인만은 철저하십니다."


쾅! 응접실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알렌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것이다. 세실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세요. 뭐가 문제예요?"


알렌의 입에서 폭언이 터져 나왔다.


"이 미친놈이!"


세실은 충격을 받았다. 알렌은 그녀 앞에서 욕을 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그토록 존경하던 형님에게.

알렌은 격분하고 있었다. 그의 손마디가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언제까지 뒷바라지를 해야 하나. 언제까지 제멋대로인 인생을 참아 줘야 하느냐고? 누군가가 참아 주기 때문에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대체 몇 살이 되어야 깨달을 거야!”

“저, 참으세요. 아르미렌 경, 제발......”


빌라드 집사조차 알렌이 이렇게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주눅이 든 꼬마였고, 나이가 든 후에는 냉정한 청년이었다. 한 가문의 주인이자 정부의 요인이었던 로엔 라피트 백작 아르미렌에게 분노는 부적절한 감정이었다.

알렌은 몇 번 더 탁자를 내리쳤다. 사용인들은 아연실색하여 슬금슬금 물러났다.


“서른일곱이면 철들 나이는 지났잖아. 어른으로 행동할 생각이 없단 말인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세실뿐이었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진정하세요. 테일러 경이 뭘 잘못했나요?”


알렌은 파란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 미친놈이! 자기가 17세 소년인 줄 알고 있잖아!”






미스트렌 미술대학 조교수 아메브 라이루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조용한 작업시간을 방해 받은 것도 짜증나는데, 방문객의 얼굴을 보니 더더욱 열이 받았다.


“오밤중에 들이닥치는 법은 누구에게 배웠나?”

“부모님께 배운 건 아니야.”


방문객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몸이 기울어졌다. 아메브는 당황하여 그를 부축했다.


“이것 봐, 괜찮아?”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정 넘어 찾아오더니 남의 사무실에서 기절까지 해?

아메브는 요즘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았기에 간이침대를 구비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객을 간이침대에 눕히고 찬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뜨거운 커피도 끓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이 나라 괜찮은 건가? 공무원이 이렇게 몸 상하도록 일을 해야 돌아가는 건가?


제이드는 곧 정신을 차렸다. 쓰러졌던 사람답지 않게 반짝 눈을 뜨더니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실례했어.”

“알긴 아는군.”

“급하게 오다 보니까.”

“오라고 빌어도 개무시하던 놈이 왜 왔어?”

“여전히 입이 거칠군. 선배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선배는 무슨 얼어죽을 선배야. 선배 대접 받고 싶으면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편지 못 받았어.”


아메브는 콧방귀를 뀌었다.


“로엔 이피스로 가는 우편물이야. 배달 사고 핑계를 댈 생각이라면 번지수 잘못 찾았어.”


제이드는 피식 웃었다.


“어떤 놈이 빼돌렸나 보지.”


무슨 개소리야. 아메브는 옛 선배에게 더 심한 욕을 해 주고 싶었지만, 제이드가 능란하게 화제를 돌렸다.


“부탁만 해 놓고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해. 그 애는 잘 지내나? 아프다는 연락을 받아서.”

“아프다고? 모르겠는데. 하지만 아플 만도 하지.”

“무슨 일이 있어?”


아메브는 그가 가을 전시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대 전시회 시즌이거든. 1학년들 모두가 작품을 냈지. 그런데 네 딸자식이 그린 그림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단 말이야.”

“딸 아니야.”

“딸이나 마찬가지니 잘 부탁한다고 1학기 개강 날부터 편지 날리던 분이 누구시더라?”


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 시간까지 일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나는 라스카 양 편이거든. 펜으로 편들어 주는 거지.”

“그 애가 무슨 그림을 그렸는데?”

“내일 네 눈으로 확인해. 작가에게 직접 해설을 들을 수 있겠군.”

“안 돼. 내가 갑자기 나타나면 싫어할 거야.”

“그럼 왜 왔어?”

“......”


그 때 커피가 완성되었다. 훌륭한 블랙커피를 얻어 마시면서 제이드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지난 반 년 동안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버텨왔지만,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반 스푼씩 넣으면 라스카가 끓여 주던 커피 맛과 비슷해질 것이다.


“아메브.”

“왜?”

“미안한데, 그 그림 지금 볼 수 없을까?”

“뭔 소리야. 밝을 때 보라니까. 성질이 급해서 안 되겠어? 아예 지금 라스카 양을 불러 줄까?”

“아직 결정을 못 내렸어.”

“뭘?”

“그 애를 보고 갈지, 조용히 돌아갈지.”


아메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자인지 딸인지 처음부터 이상했다. 그가 아는 제이드 라피트는 피후견인을 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애를 만나 보니 제이드와는 성격도 취향도 전혀 달랐다. 한층 미심쩍었지만, 사연이 있겠거니 했다.


“딸 눈치를 엄청 보는군.”

“잘못한 게 많아서.”

“무슨 잘못을 했는데.”


제이드는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흔한 얘기지. 우리들도 경험이 있잖아. 민감한 시기에 이해 받지 못한 경험. 무심함에 상처 입은 경험.”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런 경험이 극대화되는 관계지.”

“애 키우기가 힘들었나 보군.”

“그것보다 힘든 일은 없더군.”


아메브는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정말 제자일 뿐이야? 남에게 말 못할 사정이라든가 그런 건 없어?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제자일 뿐이냐는 질문은 틀렸어. 나는 마법사야. 아니, 마법사였지. 마법사의 제자는 마법사의 모든 것이란 말이야.”

“모르겠는데.”

“모르겠지.”

“주변 기혼자들이 ‘넌 애 안 키워 봐서 몰라’ 하는 말이랑 똑같이 들려.”

“정확해.”


아메브는 넌더리를 내며 일어났다.


“총각인 내가 양보할 테니, 일어나. 전시 홀로 가지.”


둘은 어두컴컴한 전시 홀로 갔다. 제이드는 다른 그림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파탄’이 걸린 벽 앞에서 아메브가 등불을 높이 쳐들었다. 그림은 인광처럼 희미한 빛을 냈다.

한참 그림을 바라보던 제이드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목이 있나?”

“거기 써 있잖아. ‘파탄’.”


아메브는 제이드가 그림을 감상하도록 10분 더 기다려 주었다. 그러고 나자 피곤하고 지루해진 그는 평론가 근성을 발휘했다.


“회화를 잘 모르지? 소재가 없는 그림은 처음 봤겠지만, 회화사적으로 보면......”

“설명해 줄 필요 없어.”


칼같이 자르는 어조였다. 아메브는 열이 뻗쳤다.


“이게 남의 말을 끊어? 맞고 싶어?”

“나는 이 그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헛소리 하고 있네.”


제이드는 아메브의 빈정거림을 무시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마법사로서의 안목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그림에 동원된 마력의 흐름을 낱낱이 느꼈다. 그것은 화가의 영혼의 지도나 마찬가지였다.

라스카는......

......더는 견딜 수가 없대요.

카티아 로즈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라스카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 라스카의 좋은 친구임에 틀림없다. 라스카는 여기서도 친구들을 사귄 것이다. 그 아이가 원했던 대로 넓은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이다. 잘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가 없는......


파탄.


“내일 만나야겠어.”


만나서 뭐라고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내일 만나면, 모레는 돌아가야 할까.


그는 번개처럼 찾아드는 예감들을 차단했다.


“내일 만나야겠어.”


지금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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