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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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bl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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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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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26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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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DUMMY

프레사 수녀는 일흔 살이었다. 아직 정정했다. 심장 문제로 죽을 고비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제이드 덕분에 건강을 되찾았다. 그는 심장을 치료하는 김에 수녀의 몸속에 잠자던 크고 작은 다른 질병들까지 싹 처리했다. 그녀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서 라스카와 함께 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수녀는 굳은 얼굴로 그라도스-크렐라인 포털을 통과했다. 지티가 씩씩거리며 따라갔다.


"고 계집애! 얌전한 고양이가 어떻다더니......"


건강해진 탓일까? 라스카의 편지를 받은 후 제대로 잠잔 날이 없는데도 프레사 수녀의 허리는 꼿꼿했고, 발걸음엔 힘이 넘쳤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표정이었다.


"라스카의 얼굴을 보고 말해야겠다."


깊이 팬 주름들이 수녀의 얼굴에 완고함을 더했다. 그녀의 입장은 편지를 읽은 순간부터 똑같았다.


-너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나의 딸이다. 하지만 그와의 결혼은 용납할 수 없다.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도 인정할 수 없다.


수녀의 사고 체계에서, 아버지처럼 생각하던 사람과의 결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라스카가 결혼을 고집한다면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내게 연락하지 마라. 지난 시간은 가슴에 묻자. 딸은 딸이지만 죽은 딸로 치겠다.


그러면 라스카는 분명히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 애는 늘 착한 딸이었다. 지금이야 남자에 눈이 멀었겠지만 금방 정신 차릴 것이다. 수녀는 그 때를 대비하여 회유책도 준비해 놓았다.


-아이를 지울 수는 없으니 태어나면 수도원에 맡기자. 마침 적당한 수도원을 안다. 아이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점을 고려하겠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수녀복의 풀 먹인 치맛자락이 스치며 사각사각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어린 여자아이를 꼬여낸 못된 놈에게도 한 마디 해야 한다. 아이를 아껴 준다고 감사할 줄만 알았지 내가 어리석었다. 나이 차이가 몇 살이 나든 남녀 관계는 남녀 관계인 것을. 무조건 예뻐하고 귀여워 죽으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녀는 쓰디쓴 심정을 곱씹었다. 얼굴만은 새파랗게 젊었지. 장점이 있는...... 매력이 있는 남자이긴 했지만.


전 백작이든 대마법사든 연장자의 위엄으로 한 소리 퍼붓고야 말겠다고 결의를 다지며, 수녀는 크렐라인의 거리로 나왔다. 지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여기 전쟁 났어요?"


무너진 서까래와 기둥들이 길가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목재에 까맣게 탄 자국이 선명했다. 노랗고 붉은 제복을 입은 소방관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군인들이었다. 군청색 제복 차림의 수도사령부 군인들이 골목마다 서서 서슬 퍼런 기색을 뿌렸다.

프레사 수녀와 지티는 평소와 다르게 포털 출구에서 엄중한 신분증 검사를 받았다. 수도사령부 병장이 그녀들의 이름과 주소를 파악해 갔다. 그러자 총검을 든 기사가 나타났다. 기사는 그녀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인상착의를 기록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붉은 망토를 걸친 기사단장이 나와 말등에서 뛰어내렸다.


"나스푸젠의 프레사 수녀님, 함께 사시는 지티 그리피스 양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저희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인데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문제는 없습니다. 신변상 경호가 필요하시니 근위대에서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경호가 필요하다고요......?"


기사단장은 정중하게 물었다.


"로엔 이피스로 가시지요?"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지요?"

"불편함이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두 여자는 불안감을 느끼며 기사들이 몰고 온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서 내다본 크렐라인 시내는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몰려나와 떠들어 댔다. 군인들과 치안대원들이 시민들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차가 로엔 이피스에 도착했다. 기사단은 로엔 이피스의 경비들에게 둘을 인도한 뒤 처음과 똑같이 정중한 인사를 올리고 돌아갔다.


수녀와 지티는 저택의 본관에는 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산뜻하게 꾸며진 귀족가의 응접실에 어쩐지 기가 죽었다.

저택의 주인인 아르미렌이 테이블 옆에 앉아 있었다. 이십대 중반을 넘기며 미모에 성숙함마저 더해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극도로 초췌해 보였다. 함께 있는 레나 역시 울고 난 것처럼 얼굴이 좋지 않았다.

빌라드 집사를 위시한 시종들이 주인들의 등뒤에 서 있었다. 이질적인 흰 얼굴의 여자들이 섞여 있었다. 그녀들은 피부색뿐 아니라 복색도 특이했다. 소매가 넓고 기장이 긴 옷이었다.


라스카가 응접실의 중앙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수녀님, 나가 보지 못해 죄송해요. 지티, 오랜만이네."


수녀와 지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스카도 예의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화려했다. 매끄러운 검은 천으로 지어진 로브에, 자수가 놓인 은색 휘장이 등과 어깨를 감쌌다. 허리를 느슨하게 감은 장식용 은띠, 긴 옷자락 바깥으로 드러난 비단 구두, 향유를 발라 빗어 내린 검은 머리칼과 흰 이마를 두르는 가느다란 은제 서클렛.

얼굴에는 살짝 화장을 했다. 지금까지는 밀렌다 화장품 중 가장 색조가 밝은 것을 사용했는데 이제 피부색에 맞는 것을 찾았다. 젊은 살결이 보석가루를 뿌린 듯이 빛났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옷자락이 몸의 선을 따라 물결치며 흘러내렸다. 늘씬한 몸매에 맞춘 듯이 어울렸다.


"설명이 길겠네요. 수녀님, 조용하게 말씀 나누는 것이 좋겠지요? 다들 물러나라고 할게요."


'물러가라고-' 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종들은 썰물처럼 사라지기 시작해, '-할게요'가 끝났을 때는 이미 응접실이 한산했다. 프레사 수녀와 지티는 남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라스카와 마주 앉았다.

남은 사람들이란 레나와 알렌이었다. 수녀는 라스카의 성년식 때 봐서 제이드의 동생들임을 알고 있었다. 대화의 주도권은 라스카에게 양보했는지 그들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라스카의 편을 들려는 건가?'


설마 이 결혼을 찬성하려고? 나를 압박하려고 배석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잘못 짚었다. 수녀는 둘의 나이를 합친 것보다 나이가 많았다. 삶의 지혜가 모자란 젊은이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대귀족 가문이다. 라스카 같은 외국인 평민 소녀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진 않겠지. 그러나 받아준다고 하여 은혜라도 베푸는 듯이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었다. 세상에는 신의 뜻 아래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다.

화려한 옷을 입힌다고 해서 이 애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는 라스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수녀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라스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집에 오지 않더니 이런 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라스카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해요."

"편지 잘 읽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 것 같니?"

"기뻐하지는 않으셨겠지요."

"잘 알고 있구나."


수녀는 약간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이 결혼은 안 돼. 당장은 마음이 아플지 몰라도 나중에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나는 네가 너와 비슷한...... 나이도 비슷하고 사회적 위치도 비슷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구나. 너를 위하는 마음인 것을 알아주렴. 나와 함께 나스푸젠으로 돌아가자."

"저를 내치지는 않으시는 건가요?"


수녀보다 지티가 앞질러 소리쳤다. "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성질 급한 둘째딸이 선수를 쳐 준 덕분에 수녀의 목소리는 더욱 침착해졌다.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마음이 아프니까."


라스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린 듯한...... 생기가 없는 미소였다.


"감사해요. 전 어디를 가더라도 제 어머니는 수녀님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허락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하지만 어디를 간다는 거니? 집에 가야지."


한숨을 내쉬려는 것처럼 입술이 벌어졌다. 지티는 그 입술 색깔의 미묘함에 주목했다. 선명한 코랄 핑크였다. 흰 얼굴에 잘 어울렸다. 저런 색깔 립스틱은 엄청 비싸겠지?

라스카의 입술은 한숨을 금지하고 다시금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수녀님, 수녀님 마음을 아프게 할 일은 없어졌어요. 저 결혼 안 해요."

"뭐? 그건 또 어떻게 된 일이냐?"

"못 하게 됐어요. 선생님은 돌아가셨어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티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 질문이 자기 몫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정말? 진짜? 언제? 왜......?"

"이틀 전에. 나를 살리느라."


지티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침묵이 더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아이는?"


수녀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라스카의 감정을 소거한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산했어요."


프레사 수녀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모든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사산을 했다고......? 몸은 괜찮니?"


걱정이 먼저 나오는 것은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을 느꼈는지 라스카의 표정이 흔들렸다.


"괜찮아요. 치료를 잘 받아서요. 수녀님,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빠르게 말씀드릴게요. 모든 사고는 스필레인이 전쟁을 원했기 때문에 일어났어요."


갑자기 국제 정세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수녀도 지티도 당황했다. 라스카는 천장을 바라보며 이틀 전 밤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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