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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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bleu
작품등록일 :
2016.10.2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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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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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1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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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Homecoming

DUMMY

결국은 인간의 문제다. 비인간의 경우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또한 모든 것은 호오의 문제다. 좋고 싫고만 결정하면 된다. 그러면 받아들일지 맞서 싸울지도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법이다.

-라고, 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기분이 상쾌했다. 호오와 선악과 생사가 흑백으로 갈리는 이 명쾌함, 이 분명함! 딱 그녀의 취향이었다. 온갖 잡스러운 뒤처리가 수반되는 전쟁 따위보다 이쪽이 훨씬 좋았다.

대마법사 즈리엘 타마센은 여유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그녀의 편의에 맞게 만들어진 세상이었다. 지평선은 멀고, 그 먼 지평선을 둘렀던 푸르스름한 색채에 미묘하게 자줏빛이 섞이면서 밤과 낮이 섞이는 시간이었다. 세계는 확장되고 있었다. 뺨과 이마를 스치는 바람은 어쩐지 아주 먼 곳에서 불어왔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자기 나이를 정확히 몰랐다. 언젠가부터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 순간 그녀는 18세 소녀처럼 설레고, 팔십 살 노파처럼 초연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곤란하군.”

“뭐가 말입니까.”

“지금 기분 같아서는 나는 네놈을 좋아하는 것 같아.”

“여자를 좋아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야.”


즈리엘 타마센의 긴 인생 속에서 남자들은 대체로 인상이 흐릿했다. 신경 써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 놈은 예외였다.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이토록 신속하게 이행할 줄은 몰랐다. 즈리엘 자신도 역대급을 논하는 마법사였기 때문에 저 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았다. 아니지. 솔직히 말하면 잘 몰랐다. 그녀가 모르는 경지니까.


그녀는 자신의 세상 속에서 제이드 라피트와 마주 섰다.

제이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저는 갈 길이 급합니다만. 왜 막는 겁니까?”

“내가 어떻게 한 건지 알겠나?”

“우리 세계 위에 다른 세계를 한 겹 덮었군요. 다행히 부숴서 죄책감 느낄 만한 사물은 없는 것 같으니 나가도 괜찮겠습니까?”


말은 정중하지만 내용은 과격했다. 바쁘니까 밟고 가겠다는 것이다. 저놈은 원래 저런 놈이었다. 즈리엘은 미소 지었다.


“아니. 나를 밟고 가야지.”


제이드는 두 어깨를 늘어뜨렸다.


“싫습니다.”

“네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 막는 겁니까?”

“조국의 위협을 막는 거지.”


제이드의 얼굴에 생기가 조금 돌아왔다.


“스필레인을 멸망시키겠다는 쓸데없는 야심 따위는 품고 있지도 않으니까 그 점 걱정 마십시오. 못 믿을지 모르지만 저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싸우고 싶지도 않고요.”

“지인의 피를 손에 묻히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인간적이군. 그러나 제이드 라피트, 내 눈에는 네 몸을 적신 피가 보이는군.”


제이드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이곳은 즈리엘의 세계이므로 그녀의 관점이 절대적이었다.


“나를 살인자로 보는군요.”

“그 손에 전 세계의 피가 묻어 있지, 그렇지 않나?”


긍정의 의미를 담은 침묵이 잠깐 흘렀다.


“이미 충분히 마음 아프니까 비난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비난? 그런 걸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 나는 다른 세계의 일은 몰라.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는 내겐 없는 세계나 마찬가지다.”

“그럼 왜 저를 막는 겁니까?”

“인간인 채로는 돌아오지 못한다.”

“어째서죠?”


즈리엘은 한 박자 쉬었다가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지금 내 눈에 너는 Proschen과 다를 것이 없다.”

“......”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다. 인간인 채로 돌아가면 인간의 일에 고통받게 된다. 무수한 어리석은 일들, 사랑과 증오, 모순과 역설! 인간의 고통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 영원히 견딜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가?”

“아닙니다.”

“영원의 무게에 지쳐 쓰러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나? 미쳐 발광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막겠다.”


제이드는 미소 지었다.


“죽여 주겠다는 겁니까?”

“그런 헛된 희망은 품고 있지 않다.”

“그러면?”


즈리엘은 외교관보다는 군인 같은 태도로 선언했다.


“이곳에 가두겠다. 너는 나갈 수 없다.”

“최악이군요.”


즈리엘은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제이드는 세계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대지와 대기를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 바람의 입자 하나하나가 경련을 일으켰다.


‘놀라운 컨트롤이군.’


이 세계는 속속들이 즈리엘 타마센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 지배는 제이드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의 발밑에 깔린 흙과 피부에 와 닿는 공기로서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이 느껴졌다. 제이드는 혀를 찼다. 이 육신을 얻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이 몸은 분명히 제이드 라피트의 몸이었다. 그에게서 강탈했다.

아니지. 그와 내가 같은 존재라면 강도짓은 아니지.

그와 내가 같은 존재인지는 누가 판단하지?


지금 그 몸 속에는 더 뛰어난 마법사의 영혼이 있었다. 아니, 더 ‘멀리 간’ 마법사의 영혼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만하십시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명령했다. 즈리엘의 지배가 급격히 그 효력을 잃기 시작했다.

하지만 즈리엘은 침착했다. 그녀는 두 팔을 들어올렸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천지를 뒤엎을 것 같은 모래바람이었다. 제이드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마법사도 인간이다. 인간은 육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육체적 고통이나 감각의 혼란 속에서 평소처럼 마법을 사용하기는 어렵다.

제이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즈리엘의 마법이 아닌 즈리엘 본인을 직접 제압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기껏 강탈...... 아니, 되찾은 몸이 모래바람에 더러워지고 상처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연 시야 속에 즈리엘 타마센은 꼿꼿이 서 있었다. 제이드는 거무스름한 형체 한가운데서 빛나는 한 쌍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만......”


그의 마력이 즈리엘을 향해 뻗어나갔다. 찰나의 일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


“이런!”


효율성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살아온 마법사 제이드 라피트도 인간의 굴레를 벗지 못해서, 당황한 순간 쓸데없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젠장! 하고 욕설도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보다 빨리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모래바람이 멎었다. 눈앞을 가렸던 팔이 통째로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제이드는 눈을 떴다. 그래서는 안 됐다는 깨달음이 바로 다음 순간에, 그러나 너무 늦게 찾아왔다.

불타는 날개를 퍼덕이는 거대한 매가 눈앞에 있었다.

노파처럼도, 소녀처럼도 보였던 즈리엘 타마센의 모습은 거짓이었다.

그녀는 늙지 않는 불꽃의 매였다.

매는 사납고 영리하며, 사막의 뱀보다도 교활했다.

모래바람 속에 숨어 있다가, 단 한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믿고, 자기 자신의 육신으로 부딪쳐서 목표를 이룬다.


제이드가 본 것은 매의 거대한 부리 속에 담겼던 어둠뿐이었다.


맹금류가 고깃덩어리를 파헤치는 날카로운 소리. 피. 어둠.


매는 모래바람이 멎어 고요해진 땅 위에 피 묻은 전리품을 뱉어 냈다. 아직도 푸른색이 남아 있었다.


‘확실하게 해 둬야 한다.’


매는 쓰러진 상대방의 몸 위에 내려앉았다. 얇은 셔츠가 매의 발톱에 찢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매는 괘념치 않았다.


‘비명도 안 지르는군.’


비명을 못 지른 쪽에 가까울 것이다. 산 채로 눈을 파먹히는 고통을 인간이 견디기는 어렵다. 하지만 의식을 잃었을 뿐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벌써 죽으면 곤란하지.’


즈리엘은 잠시 옛 추억을 상기했다. 지금보다 조금 덜 위대한 마법사였던 시절, 그녀는 미친 신에게 존재를 시험당하고 그에게 패배했다. 부를 이름이 없어 Proschen, 즉 마리엔 어로 ‘지배와 탈취'이라 부르던 존재였다.


‘영원은 함부로 선택할 것이 못 돼.’


Proschen도 한때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성이 시간에 마모될수록 이해 불가능한 괴물로 변해 간 것이다.


‘차라리 인간이 아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이 아니면 무엇?

즈리엘은 그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다.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다.


즈리엘은 제이드 라피트를 벗으로 생각했다. 꽤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유능하고 쾌활한 젊은이를 어느 늙은이가 싫어하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그를 과신하지는 않았다. 그가 강철의 심지를 지녔다 하더라도 영원은 애초에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늙은이의 냉정한 눈으로 봤을 때 의지력이 그의 특장점인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불굴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제법 훌륭한 편이었지만......

때로는 피곤해하고, 때로는 괴로워하고, 사랑에 울고, 죄책감을 느끼고......


“너도 인간이다. 어쩔 수 없다.”


매의 부리부리한 눈에는 차가운 동정심이 어렸다.


즈리엘은 애초에 제이드와 마법사로서 겨룰 생각이 없었다. 그건 헛된 망상이었다.

아주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됐다. 마법사로서의 제이드 라피트가 아닌 인간 제이드 라피트를 패배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고통을 주고 감각을 빼앗을 것이다. 그러면 마법사로서의 역량도 비교불가하게 떨어진다. 아무리 강대한 마력이 있으면 뭘 하나? 아프면 집중을 못한다. 앞이 안 보이면 마법의 선택지가 확 줄어든다.

매는 정신을 잃은 패배자의 얼굴 위로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퍽! 날카로운 부리가 망설임 없이 남은 한쪽 눈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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