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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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bleu
작품등록일 :
2016.10.22 21:14
최근연재일 :
2017.10.2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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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0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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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42. 연애의 정석

DUMMY

문을 열면 남쪽 세상. 단풍이 물드는 계절.

라스카의 집들이 기분은 마음뿐이고 아직 성급했다. 공관은 당연하게도 빈집이었다. 조명도 없어서 어두컴컴했다. 마리엔의 국왕이 집무실에서의 예복 차림으로 서 있기에는 부적절한 공간이었다.

제스카르는 긴 옷자락을 간수하며 또다른 집주인을 바라보았다.


“좋아 보이시는군요, 국왕 전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몇 년 만이죠?”

“5년 만인 것 같군, 로엔 라피트 경. 그러나 그대에게서는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데.”


라스카가 끼어들었다.


“마법은 잘 됐네요. 그런데 서서 이야기할 순 없으니...... 마리엔에 가서 이야기할까요?”


제이드는 앞으로 외교상 파트너가 될 마리엔 국왕이자 라스카의 친형제인 제스카르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몇 분만 시간을 주면 자리를 정리해 보지.”

“어떻게요?”

“뭐가 필요할까. 일단 조명부터.”


공관의 응접실에 어울리는 은은한 빛깔의 샹들리에가 나타났다. 집안이 확 밝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공간처럼 보였다.

창문들이 일제히 열렸다. 스필레인 양식의 레이스 커튼들이 가을바람을 안고 부풀어 올랐다. 하오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 바닥에 모자이크 모양의 빛을 떨구었다.

양초가 꽂힌 스콘스 벽등들. 테이블 콘솔 위에서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는 향초들.


“청소부터 했어야 했나?”


맑은 바람이 실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제스카르와 라스카의 길다란 검은 머리채가 그 바람에 휘날렸다. 안 쓰는 집에 쌓이게 마련인 묵은 먼지들을 처리한 제이드는 곧바로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어두운 색 마룻바닥이 거울처럼 닦여 나가고 그 위에 두터운 융단이 깔렸다. 가구들이 나타났다. 3인용 소파, 4인용 소파, 1인용 안락의자와 커피 테이블, 커피 테이블 위의 커피 주전자와 도자기 찻잔, 사이드 테이블, 사이드 테이블 위의 쿠키 접시와 차 상자, 간이 책장, 간이 책장에 꽂힌 잡지들과 사전들.


침착한 제스카르도 마법과 물건들의 향연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제이드는 마지막으로 꽃무늬 패턴이 들어간 아이보리 색 벽지를 선택해 인테리어를 마무리한 뒤, 생각났다는 듯 라스카에게 물었다.


“꽃 장식도 할까?”


라스카는 4인용 소파를 쓰다듬었다. 파스텔 톤으로 가죽을 염색한 솜씨가 기막혔다. 그런데 새것이 아니었다. 프레임이며 쿠션이며 눈에 익었다. 반들반들 길이 든 목재와 가죽에서 기품과 세월이 자르르 흘렀다.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선생님. 레나 언니한테 엄청 혼날 것 같은데요.

라스카도 무척 좋아하는 소파였다. 그래서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꽃장식 좋죠.”


색색의 꽃들이 여기저기서 망울을 터뜨렸다. 제이드는 제스카르에게 자리를 권했다.


“급한 대로 응접실 모양은 갖추었지만 누추해서 죄송합니다. 앉으시지요. 설명드릴 게 많으니까요.”


제스카르는 테이블 위에 나타난 국화 꽃 장식을 바라보며 소파에 앉았다. 좁고 긴 유리병에 샛노란 꽃송이가 홀로 꽂혀 있어 시선이 집중되는 효과가 있었다.

라스카가 옆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집 꾸미는 건 제 맘대로 해도 된다면서요?”

“물론이지. 이건 임시니까 막 바꿔도 돼.”


라스카는 입술이 뾰족해졌다. 이 방이 마음에 꼭 드는 게 문제였다.

마실 것이 나왔다. 본인을 위해서는 커피를, 라스카에게는 코코아를, 제스카르에게는 허브티를 따라주며 제이드는 미소지었다.


“편안한 분위기라 좋군요, 전하.”


그는 간결하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제스카르는 여러 생각으로 정신이 분산되려는 것을 참으며 그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명석하기로 이름난 마리엔 현 국왕은 금세 핵심을 파악했다.


“세 나라 간의 균형을 장소로서 구현하려는 것인가?”

“정확합니다. 저는 전쟁할 생각이 없거든요.”


그는 제이드에게 한 나라의 편을 들려는 생각이 없음을 간파했다.


“마리엔도 전쟁은 원치 않는다.”

“교역이나 할까요?”


척하면 척.

제스카르는 무릎 위에 얹어 두었던 두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은 라스카와 닮았다. 핏줄이란 신기한 것이다.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다. 밀렌다 국왕의 인장이 찍힌 공식 문서를 원하며 날인은 두 나라가 동시에 하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말입니까?”

“그렇다. 스필레인이 동의한다면, 3국이 함께 모여 회합을 갖는 것도 좋겠지.”

“좋습니다. 회의실을 따로 꾸미고 회합실이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라스카는 그의 작명이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름 따위 아무려면 어떠랴.

마리엔 국왕의 동의를 얻어낸 제이드는 거침없이 다음 주제로 이행해 갔다.


“흔쾌한 말씀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뭐지? 그런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만.”

“라스카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축복해 주시겠죠?”


제스카르는 허를 찔린 표정이 되었다. 우습게도 옆에서 라스카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헉.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는데.”


종알종알 투덜투덜 투정 부리는 여동생과 달리 마리엔 국왕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내 동생이 좋다면......”

“그 말씀은 허락과 축하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결혼은 이미 했던 것 아니었나? 3년 전에.”


제이드는 명랑한 얼굴로 진실을 까발렸다.


“3년 전에 하려고 했다가 못 했습니다. 제가 죽고 나서 서류만 꾸민 모양입니다.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고 식도 안 올렸지요. 라스카가 서운해 하는 것 같기에......”

“제 핑계 대지 마세요!”

“......그대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도 도리가 아니니 온 가족의 동의를 받아 축복 속에 제대로 하려고 합니다만.”


제스카르는 반쯤 마신 찻잔을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라스카는 마리엔의 친왕이고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고를 자유가 있다. 도리라고 했나? 오라비 된 도리로 나는 여동생의 선택을 축복해 주어야겠지. 가족의 인연은 중한 것이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 나는 할 일이 많이 남았으니 이제 마리엔으로 돌아가고 싶다.”

“들어온 문을 열고 나가시면 됩니다. Amund Patio로 바로 연결되니까요.”“놀라운 마법이군. 그럼 이만.”

“살펴 가십시오. 자주 들러 주시고요. 이곳을 생각하며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진정 놀라운 마법이었다. 제스카르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접견실의 싸늘한 공기와 종이 냄새가 코끝에 끼쳐 왔다. 제스카르는 묵은 공기를 싫어해서 접견실에 환기구를 만들도록 했다. 공기는 맑아졌지만 대신 추웠다.

자리를 비운 동안 벽난로가 식었다. 그는 벽난로를 뒤적여 불씨를 살린 후 장작을 던져 넣었다. 불꽃이 타올랐다. 서류로 돌아가려다가, 그는 벽난로 옆의 간이의자에 앉았다.

제스카르가 접견실의 원탁에서 서류를 검토하거나 대신들을 만나는 동안 라스카가 종종 이 의자에 앉아 있곤 했다. 처음에는 궁정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대신들과 얼굴을 익히기 위해, 나중에는 오빠에게 국사를 조언하고 말벗이 되어 주기 위해.

제스카르는 제이드 라피트에게 악감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라스카와 재결합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여동생이 마리엔 남자와 재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길 바랐다.

나중에는 그 아이가 왕위를 물려받게 될지도 모른다. 먼 미래의 일이지만.

어쨌든 그때까지 라스카는 이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 아닌가?

물론 결혼은 라스카의 마음에 드는 상대와 하는 것이다. 그 상대가 에녹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란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에녹은 능력과 출신이 훌륭할 뿐 아니라 그만하면 인품도 괜찮았다. 같은 아픔을 겪었으니 라스카와 서로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에녹과는 어려서 같이 자란 사이였기에, 제스카르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믿었고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동생이 잘 모르는 남자를 데려오는 것보다는, 피차 잘 아는 사람과 결혼해서 가까이 두고 자주 왕래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제스카르는 냉철한 젊은이였다. 차가운 이성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가 마리엔의 국왕이라 할지라도, 그에겐 현실적으로 제이드 라피트의 뜻을 거스를 방법이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대마법사라는 자들이 싫다.

떠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제멋대로구나.


그는 불가를 떠나 원탁으로 돌아갔다. 차가운 공기가 머릿속을 씻어냈다. 오늘 오후에는 접견 일정이 없었다. 그는 아까 보던 서류들을 치워 버리고, 회합실의 아이디어와 그것이 마리엔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외교대신 니나 안도라스와 이야기하기 전에 본인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Amund Patio는 적막했다. 젊은 국왕은 고군분투한 끝에 시종을 불러 마실 것을 가져오게 하기로 했다. 시종은 문 밖에 서 있을 것이었다. 그는 문고리를 당겨 문을 열었다.


“......?”


라스카가 액자를 벽에 거는 중이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액자 속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다른 위치를 지시했다.


“여기도요.”


제이드는 즐거운 얼굴로 못을 박아 넣었다. 땅!


“라스카, 또 실패했어.”

“아, 진짜 못하네!”

“언제 해봤어야지.”


라스카는 못과 망치를 넘겨받았다.


“이렇게 하란 말이에요.”


땅! 못은 벽면과 수직을 이루며 벽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제이드가 박수를 쳤다.


“훌륭해.”

“빨리. 다시 해봐요.”


제스카르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무의식중에 이곳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놀라운 마법을 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당연했다.

목이 말랐다. 그는 제타 궁정의 복도를 머릿속에 그리며 다시 문을 열었다.


드드드드드드! 소음과 먼지가 발생했다. 라스카가 귀를 막은 채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반칙이야!”


못이 스스로 회전하며 벽을 파고들었다. 제이드가 말했다.


“방향과 속도, 회전력. 이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야. 몇 개 더 박으면 돼?”

“음. 다섯 개?”


집 꾸미기에 여념이 없던 둘은 문고리를 붙잡고 서 있던 제스카르를 발견했다.


“아, 전하. 어쩐 일이신가요? 잠깐 쉬시겠습니까?”

“아니야. 볼일은 없다. 돌아가겠다.”


또 공기가 바뀌었다. 드라카스의 가을에서 제타의 초겨울로.

제스카르는 원탁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라스카는 이 의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외풍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라스카는 마리엔 혈통인데도 남쪽에서 자라서 그런지 추위를 못 견뎌했다. 제타에서 보낸 첫 겨울엔 독감이란 독감은 골고루 다 걸리고 손끝에 동상까지 생기는 바람에 궁정 주치의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시녀 엘라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곧 익숙해질 거라는 말로 위로했었다. 하지만 익숙해질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드라카스는 크렐라인의 따사로운 태양과 라파의 쾌청한 하늘을 모두 가진 도시였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제스카르는 문을 흘끔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나갈 수 있겠지.


제이드와 라스카는 부엌과 식당을 꾸미는 중이었다.


“1층에 하나, 3층에 하나, 두 개 만들겠어요. 1층은 공식 행사를 위한 거고요, 3층은 가족끼리 밥 먹는 곳이에요.”

“네 맘대로 해.”

“오늘은 1층에서 저녁 먹을까요?”


응접실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목재의 따스한 빛깔이 배어나오는 부엌이 나타났다. 제이드가 수도와 화로를 조정하는 동안 라스카는 신이 나서 식탁 위에 접시를 늘어놓았다. 공관에서의 격식 있는 만찬을 위해 12인용 식탁에 새하얀 테이블보를 깔고, 은제 촛대에 불을 밝히고, 데이지와 수선화, 수반으로 장식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황혼 빛이 새어 들어왔다.

온갖 조미료와 향신료들, 다양한 종류의 치즈, 유제품, 빵과 채소, 고기들이 찬장에 꽉꽉 들어찼다. 제이드가 찬장에 영구 보존의 마법을 걸었다. 라스카는 빵 한 덩이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이 빵도 어디서 많이 먹던 건데......’


뭐,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기쁜 일이었다.


“선생님,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앉아 계세요. 재료 하나도 건들지 마세요. 버터, 달걀, 그리고 허브랑 소금을 좀 꺼내주시겠어요?”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며?”


제스카르는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응접실과 식당이 너무 가까워서 발각되고 말았다. 라스카가 환한 얼굴로 그를 소리쳐 불렀다.


“오빠, 밥 먹고 갈래? 밀렌다 식으로 요리해 줄게!”


여기서 거절하면 꼴이 우습게 될 것 같았다.


음식은 소박했다. 마리엔 궁정에서 먹던 음식보다 기름기가 적고 담백했지만 그의 입맛에는 매웠다.


“정확히 말하면 밀렌다 식이 아니라 밀렌다 남부식입니다, 전하. 좀 매울 텐데요. 어떠신가요?”

“그런가? 괜찮아, 오빠?”

“아니, 먹을 만해. 고맙다, 라스카.”


궁정에서 국왕을 찾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닐까? 제스카르는 종종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가지곤 했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식사가 끝나고 음료를 권한 후 제이드가 제안했다.


“소화도 시킬 겸 쉬다 가시죠. 뭘 할까요. 카드놀이라도?”


라스카가 발딱 일어나 대륙을 가로지르더니 제타 궁정의 자기 방에서 카드 상자를 가져왔다.


“카드놀이는 마리엔 식이 재미있어요. 가르쳐 드릴까요?”


마리엔의 밤은 길다. 긴 밤을 보내기 위해 다양한 실내 오락거리가 발달했다. 제스카르도 이 놀이를 할 줄 알았다. 다양한 그림 쌍으로 이루어진 카드들을 맞춰 나가며 여러 조합에 따라 점수를 쌓는 게임이었다.

제스카르는 산적한 일거리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궁정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돌아가 봐야 해.”

“정말? 하룻밤쯤은 쉬어도 될 텐데.”


여동생의 아쉬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는 Amund Patio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노려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응접실 소파에서 책을 읽던 제이드와 눈이 마주쳤을 때, 제스카르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붉혔다.


“여기를 생각하면서 문을 열면 된다고? 혹시 잘못된 것 아닌가? 무조건 연결되도록?”

“아니오. 마법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쉬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


카드 게임이 시작되었다. 세 사람 중에서는 제스카르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다. 제이드는 오늘 처음 해 보는 것이었고, 라스카는 지난 3년 간 오락거리에까지 마리엔 식 소양을 쌓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잘하시는군요. 돈이라도 걸까요?”

“제타 궁정에서는 어떠한 놀이라도 금전을 거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도박은 마리엔의 3대 죄악이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알코올 중독과 자살이었다. 밀렌다 사람은 이들의 공통점을 알 수 없을 테지만, 마리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바로 자기 파괴적 행위라는 것이었다.

길고 어두운 북쪽 나라의 밤. 춥고 고독한 밤.


“그럼 다른 것을 걸지요. 다음 판부터는 지는 사람이 노래를 한 곡씩 하도록......”

“잠깐! 왜 스물세 살의 얼굴로 마흔세 살 같은 말씀을 하시죠? 시대에 뒤떨어진 벌칙이에요.”


라스카가 여지없이 이의를 제기했다. 얼굴과 마음은 스물세 살이라도 인생 경험은 40살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제이드는 억울했다. 그리고 23세다운 오기가 생겼다.


“좋아. 그럼 팔뚝 맞기라도 해. 두고 보자.”


카드 한 벌이 뒤섞이고 다음 게임이 시작되었다. 제이드 라피트가 첫 승을 가져갔고, 라스카가 벌칙을 받았다. 그녀는 전의를 불태우며 다음 판에 임했다. 그러나 벌칙을 피하지 못했다. 두 게임 연속 2등을 한 제스카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을 쓰는 건가? 다음 카드로 뭐가 나올지 아는 것 같군.’


라스카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오빠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우리 둘이 연합할까? 서로 패를 보여 주면서 협력하자. 저 인간 팔뚝을 꼭 때려야겠어.’

‘연합한다고 소용이 있나? 마법을 쓰는 것 아니야?’

‘아니. 그냥 기억력이 좋은 거야.’


다음 판은 치열했다. 승부처가 왔다. 제이드가 집중한 표정으로 패를 뽑았다.


“라스카는 스페이드3을 들고 있을 테고, 전하께서는 다이아몬드1과 하트8을 들고 계시겠지요? 항복하시죠. 제가 이겼습니다. 둘이 한편인 것 같은데 둘 다 진 겁니다.”

이런 무자비한......

라스카는 실망해서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패는 제이드가 추리한 그대로였다.


“에이. 재미없다.”


제스카르도 조금쯤은 약이 올랐다.


“한 번만 더 할까?”


그러나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제이드 라피트는 마리엔에서 태어났더라면 불법 도박사로 떼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적발 시에는 최소 징역 10년이다.

제스카르는 약이 올라도 그런 마음을 감추었지만, 라스카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건 사기예요. 애초에 공평하지 않다고요.”

“이 게임은 결국 확률 문제야. 한 20판 더 하면 한 판 이기게 해주지.”

“아, 짜증나네!”


이 꼴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젊은 국왕에게는 더 힘든 일이었다.

마리엔은 사람들 간 거리를 중요시했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농담을 즐기는 것은 품위 있는 행동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반대로 가족 간에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의무가 있었지만, 제스카르는 제대로 된 가족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제스카르는 너무나 격의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지난 3년 간 그는 여동생이 자기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판단이 흔들렸다.


“라스카, 게임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잖아. 흥분할 필요 없어.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겠다.”

“그치만 약오르잖아.”


라스카는 오늘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목소리를 낮추라니 무리한 요구였다.


“우리끼린데 뭐 어때? 오빠는 고지식한 구석이 있어.”


제스카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리엔 인은 안색 조절이 안 된다.


“아니야. 내가 고지식한 게 아니라...... 예의를 지키자는 거다. 언행이 민망하게 보여서는 안 되지 않겠어?”

“고지식한 거 맞네 뭐. 몇 분이라도 먼저 태어나서 그런가?”


라스카가 투덜거리자, 제스카르는 엄숙하게 말했다.


“고지식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 가족으로서 네 체면을 생각해서 의견을 말한 것뿐이야. 그리고 라스카, 네가 잘못 알고 있는데, 몇 분 먼저 태어난 건 네 쪽이다. 그러니까 내가 오빠지.”


후두둑. 라스카가 들고 있던 카드들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방금 뭔가 간과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아. 엄청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것 같아.”

“체면을 지키라는 말이 그렇게 충격적인가?”

“아니. 아니아니아니. 그 말 말고.”


라스카의 얼굴색이 몇 번이나 변했다. 하얗다가 파랬다가 빨갛게.


“몇 분 먼저 태어난 게 누구라고? 내 쪽이라고?”

“당연하지. 우린 쌍둥이니까......”

“아니지! 내가 먼저 태어났으면......”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


“내가 누나지!”


황당! 분노! 억울!

그러나 어처구니가 없기는 제스카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네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네가 동생이지. 뭐가 문제야?”


제이드는 이 광경을 즐겁게 감상했다.


“아마 쌍둥이의 형제관계를 정하는 방법이 두 나라가 다른 모양이야.”


제스카르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먼저 태어난 쪽이 동생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먼저 생겼기 때문에 뒤쪽에 자리하게 되지. 그래서 나중에 태어나게 되는 거야.”

“아니야. 세상 빛을 본 순서대로 정하는 거야. 먼저 태어난 쪽이 누나야.”

“그래서 네가 누나라고?”

“맞잖아?”

“그런, 순 억지가......”


라스카는 선생님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죠?”


제이드는 카드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나는 빠질게.”


남매는 한참을 투닥거렸다. 라스카가 요구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누나라고 불러 보라고. 그 얼굴이 진지해서 제스카르는 그냥 한 번 불러 줄까 생각해 봤다. 어차피 몇 분 차이 아닌가.


“싫어.”

“왜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싫었다.


제이드가 참지 못하고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스카가 다시 한 번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바라보니, 예견된, 그러나 볼 때마다 놀라운 일이 또 벌어져 있었다.


“선생님, 그 새 또 나이 먹었어요.”


정력이 과하고 충동적인 청소년기, 말도 웃음도 많은 20대 초반을 지나, 침착함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한 20대 중반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 두 사람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귀엽다는 말은 마리엔의 국왕으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고, 라스카는 옛날부터 선생님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감흥이 없어진 말이었다.


제이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느 쪽이 누나고 오빠면 어떻습니까. 사이좋아서 보기 좋군요. 전하, 자주 놀러 오십시오.”

“선생님, 이제 와서 어른인 척 하지 마세요.”


애들 화해시키는 데나 쓸 법한 헐렁한 술수로 해결될 것 같은가. 라스카는 결국 그 날 누나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못 들을 것이다.


밤이 깊어 자리가 파했다. 제스카르는 Amund Patio로 돌아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제타 궁정의 복도가 나타났다. 그는 아무 의심 없이 그 복도를 걸어 자신의 침실로 갔다. 내일은 오늘 밀린 일을 해야겠지만 그런 걱정을 할 사이도 없이 잠이 찾아왔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깊은 잠이었다.


작가의말

연애의 정석 편을 끝내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진짜 한 회 남았습니다.

연휴 동안 비축분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실패......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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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42. 연애의 정석 17.10.06 79 3 14쪽
259 #42. 연애의 정석 17.10.04 105 3 17쪽
258 #42. 연애의 정석 17.10.02 125 3 28쪽
257 #42. 연애의 정석 +2 17.09.29 184 3 24쪽
256 #42. 연애의 정석 +2 17.09.27 173 2 12쪽
255 #42. 연애의 정석 17.09.25 79 2 16쪽
254 #41. Homecoming 17.09.22 108 3 13쪽
253 #41. Homecoming 17.09.20 113 3 10쪽
252 #41. Homecoming 17.09.18 122 2 10쪽
251 #41. Homecoming 17.09.15 113 3 11쪽
250 #41. Homecoming 17.09.13 92 3 17쪽
249 #41. Homecoming 17.09.11 114 4 19쪽
248 #41. Homecoming 17.09.08 86 3 9쪽
247 #41. Homecoming 17.09.07 123 3 8쪽
246 #41. Homecoming 17.09.04 129 4 8쪽
245 #41. Homecoming 17.09.01 113 4 16쪽
244 #41. Homecoming 17.08.31 120 4 9쪽
243 #41. Homecoming 17.08.30 112 4 10쪽
242 #41. Homecoming 17.08.29 118 4 9쪽
241 #41. Homecoming 17.08.28 127 4 14쪽
240 #41. Homecoming 17.08.15 130 3 10쪽
239 #41. Homecoming 17.08.14 110 3 8쪽
238 #41. Homecoming 17.08.13 111 3 14쪽
237 #41. Homecoming 17.08.12 121 3 7쪽
236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11 113 4 12쪽
235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10 114 4 13쪽
234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9 125 4 12쪽
233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8 141 3 9쪽
232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7 117 3 8쪽
231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6 146 4 11쪽
230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5 159 4 12쪽
229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4 120 3 10쪽
228 #40. 믿음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17.08.03 126 4 7쪽
227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8.02 155 4 14쪽
226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8.01 90 3 8쪽
225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31 106 4 8쪽
224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30 131 4 13쪽
223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29 236 3 12쪽
222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28 145 4 7쪽
221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27 208 5 9쪽
220 #39. 친왕 전하께 이 꽃다발을 17.07.26 137 5 10쪽
219 #38. 안녕, 내 사랑 17.07.25 146 4 9쪽
218 #38. 안녕, 내 사랑 17.07.24 133 5 7쪽
217 #38. 안녕, 내 사랑 17.07.23 12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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