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론의 아이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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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라
작품등록일 :
2016.10.26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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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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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2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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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속의 살인자 (6)

DUMMY

광포한 유노의 웃음소리에 카일과 나나니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빼꼼 고개를 들어 상황을 면밀히 살폈다. 드디어 문이 쓰러진 것일까? 루리아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리고 있던 문의 위협이 사라진 것이라면 일단 희소식이긴 했다. 문제는, 힘이 떨어진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은 유노였다. 지금의 유노는 카일과 나나니로선 도무지 감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유노가 다음 타겟을 찾아 나서기라도 한다면, 악몽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은 당장 자신들의 차례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문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달빛처럼 새하얬던 완전무장이 그새 너덜너덜하게 변해있었지만, 어쨌든 다시 일어났다. 우히히! 유노는 문이 다시 일어서자 환호성이라도 지르듯 소리 높여 웃었다. 반가움이라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문은 뭔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노는 듯한 여유로움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유노의 각성인지 폭주인지 알 수 없는 변화는 그에게도 의외였던 것이리라. 그렇지만 여전히, 그는 당황하지도 허둥대지도 않았다. 자신보다 강한 적, 그것도 자신의 기술이 전혀 먹히지 않는 적과 마주하고 있는 당사자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냉정함이었다.


통상의 환검은 안 먹힌다는 거지?


검영 정도는 몇 개가 있든 전혀 반응하지 않는단 말이지...... 문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자세를 잡았다. 전신이 욱신욱신 쑤시듯 아팠지만, 다행히 움직이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곳은 없었다. 그의 완전무장이 아직 버텨주고 있었다. 물론 아까 같은 공격을 한 번 더 당한다면 아무리 그의 완전무장이라도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기술은 완전하지 않아 체력적 정신적 소모가 매우 크다. 주 타겟인 루리아를 아직 해치우지 못한 지금 이런 불완전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 리스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은 유노를 이겨야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의 임무 완료에 유노는 그 무엇보다도 큰 방해였다.


[우히히!]


문의 달라진 분위기는 유노에겐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유노 입장에선 그저 너무너무 재미있고 즐거운 상대와 계속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못 견디게 신날뿐이었다. 유노는 한 걸음에 문을 향해 뛰었다. 후우. 이에 맞추어 문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카일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 말았다.


잘못 본 것일까? 분명 문이 두 박도를 양손에 든 채 서있었는데, 문득 문도 두 박도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하나의, 시퍼렇게 날이 선 칼 한 자루가 놓여있는 듯 했다. 마찬가지로 검술을 익히고 있는 카일은 이것이 어떤 현상인지 깨닫고 무심코 입을 벌렸다.


“설마.......”


카일이 그렇게 침음성을 삼키는 사이에도 이미 유노와 문 사이에는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좀 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우히히?]


어이없게도 유노가 헛손질을, 헛발질을 한 것이다. 문을 내버려두고 엉뚱한 곳에 공격을 퍼붓다가, 그만 눈앞의 문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노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든 문은 오른 박도를 휘둘러 유노의 얼굴을 크게 베고 들어갔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폼의 베기였지만, 그 예기는 사뭇 남달랐다. 소리 없이 공기를 가르고, 심지어 유노의 청록색 아우라마저 비단 찢듯 부드럽게 갈라버렸다. 그렇다고 청록색 아우라의 방해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문의 박도가 오랜만에 유노의 살갗에 닿았다. 붉은 피 몇 방울이 공중에 튀었다.


[우히히!]


유노는 개의치 않았다. 바로 문을 향해 턴하며 일장을 내지를 준비를 했다. 우히히? 그렇지만 유노는 바로 공격을 이어가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문의 두 박도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검영을 낳았다. 두 박도가 몇 배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박도만 그런 게 아니었다. 문도 같이 여러 명으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두 개의 박도를 든 문의 환영이 유노를 마치 둘러싸는 듯했다. 우히히? 검영 따위 쿨하게 무시해버렸던 유노지만 칼 뿐 아니라 문까지 같이 늘어나버리니 누구를 공격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그 틈을 타 문은 다시 한 번 유노를 베고 들어왔다. 이번에 노린 것은 목이었다. 유노의 눈에는 자신을 포위한 문들이 동시에 자신을 베고 들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유노는 성공적으로 그 중 절반 이상의 검격에 반응했지만, 땡이었다. 목 부근에 따끔함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또 다시 유노의 핏방울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우히히!]


화가 난 유노는 난폭하게 몸부림치며 눈에 보이는 문의 환영들을 닥치는 대로, 모조리 공격해 들어갔다. 후퇴를 모르는군. 내심 혀를 내두르며 문은 유노가 환영을 공격하는 동안 일찌감치 거리를 벌렸다. 저 광기어린 임전무퇴 정신은 분명 질려버릴 정도로 끔찍한 것이지만, 결국 유노의 발목을 잡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물러난 문도 멀쩡하진 않았다. 눈 몇 번 껌뻑일 시간을 벌었지만, 재정비를 해보기도 전에 바로 여러 후유증이 그를 덮쳐왔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칼로 관자놀이를 쑤시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를 찔러왔다. 최고조의 긴장상태에서 무리하게 움직인 몸뚱이가, 특히 청록색 아우라를 베어내기 위해 완전히 새롭게, 전력으로 두 박도를 휘둘러야 했던 양팔이 비명을 질러왔다. 문은 이를 악물었다. 두 눈이 무거우면서도 따갑기 그지없었다.


불완전했다.


확실히 이 기술은, 이 경지는 불완전했다. 모든 검술가들이 꿈꾸어 마지않는, 검과 사람이 혼연일체가 된다는 신검합일의 경지. 그리고 이를 이용해 단순히 검영을 늘리는 게 아니라 그 검영의 수만큼 검술가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문만의 환검 기술.


환검이 통하지 않는 유노였지만, 목표물인 적까지 그 수가 늘어나버린다면 그마저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 여겼던 문의 생각이 제대로 먹혔다. 그리고 마땅한 파훼법을 찾지 못한 유노가 (이성이란 게 없으니 찾을 수 있을 리 없지만) 종국에는 모든 환영들을 공격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도 맞아들었다. 문의 전략은 단순했다. 유노로 하여금 자신의 환영에 최대한 헛힘을 쏟아 붓게 만든다. 그렇게 유노의 탈진을 유도한다. 일견 도무지 멈추지 않을 것 마냥 날뛰고 있는 유노였지만, 리미트가 있었다. 리미트가 존재해야했다. 아무리 잠재력이 넘쳐나도 저렇게 급작스럽게 대량의 힘을 쏟아 붓고 있는데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처음엔 1분 정도 봤다. 그러나 1분은 벌써 지난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문의 계산이 옳다면, 곧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틴다. 그때까지만 자신의 환영들로 유노를 현혹할 수 있으면 됐다. 다만 문의 몸 상태도 현재 심상치는 않았다. 유노에게 입은 데미지 탓일까? 수련 때에 비해 신검합일의 경지를 지속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방에 모든 힘을 쓰게 만들어주마.


문도 승부수를 걸기로 결심했다. 다시 한 번 신검합일의 상태로 들어간 문은 지체 없이 환검을 시전했다. 체내 성염을 모조리 소모해 최대한 많은 환영을 만들어냈다. 그 수가 무려 18개. 18명의 문이 나타나 유노를 공격해 들어갔다.


[우히히히히히히!!!]


유노는 좋아하는 것인지 화를 내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만 미친 듯이 웃어대며 18개의 환영을 한꺼번에 맞이했다. 그냥 단순하게 일일이 다 깨부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문의 유도대로. 그렇지만 어차피 지금의 유노에겐 다른 해법이 없었다.


18개의 환영 중 진짜는 오직 하나. 그리고 진짜 문은, 환영들 사이를 매섭게 누비며 유노가 틈을 보일 때마다 사정없이 검격을 가해댔다.


[우히히히!]


첫 기세는 좋았다. 유노는 청록색 아우라가 듬뿍 어린 쌍장을 내질러 처음 몇몇 환영들의 머리통을 부수고, 가슴을 꿰뚫어가며 파괴했다. 그러나 부숴버린 환영의 수가 두 자리 수를 넘었을 즈음, 유노의 움직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팔을 내지르는 속도가 느려졌다. 반응도 느려졌다. 활활 타오르던 청록색 아우라의 기세도 많이 줄어들어있었다. 브레이크 없이 매 순간 최고전력을 뿜어낸 대가를 드디어 치루고 있었다. 유노의 힘이 바닥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온몸에 검상을 입어 피까지 철철 흘리고 있었다. 체력 손실이 가속화된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기어코 유노는 18개의 환영을 전부 없애버리는데 성공했다. 남은 것은 이제 진짜 문이었다. 문도 더 이상 자신의 환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대신 문은 정직하게 유노와 부딪혔다.


유노의 악력은 전과 같지 않았다. 부딪혀 볼만 했다. 지금 정도 수준의 청록색 아우라라면 충분히 베어 넘길 수 있었다. 문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는 심정으로 두 박도를 휘둘렀다. 그리고 유노는, 힘이 급속도로 떨어져가는 와중에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히히! 우히히! 우히히!]


그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덤빌 뿐이었다. 오히려 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된 지금,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유노와 문은 무차별적으로 서로를 공격했다. 방어는 도외시하고 공격에만 집중하다보니 서로의 공격을 상쇄하기보다는, 맞을 것 다 맞아가면서 서로를 때리고 있었다. 문은 완전무장을 뚫고 전해져오는 충격파에 체내가 쉴 새 없이 울리는 것을 견뎌야 했고, 유노는 전신이 난도질당하듯 돼서 피범벅이 된지 오래였다. 구역질인지 핏덩이인지 모를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참아가며 문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유노는 이제 끝이었다. 끝이었다. 이를 방증하듯, 유노를 지켜주고 있던 청록색 아우라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아우라에 가려져 있던 유노의 모습이 점점 선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런데도,


[우히히!]


유노는 멈추지 않았다.


청록색 아우라가 떨어져가는 이 와중에도 유노의 광기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우히히히히! 미친 듯이 웃으며 쉴 새 없이 문에게 달려들어 양손을 뻗어댈 뿐이었다.


청록색 아우라가 없는 유노는 더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문은 더 이상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유노를 베어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마침내 문도 한계였다. 그의 두 박도도 날카로움을 잃은 것이다. 어떻게든 유노를 썰어버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쓰러질 줄 모르는 유노의 악귀 같은 끈덕짐에 그도 조금씩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 자식은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수 있는 거지?


정신이 육체를 초월해버린 건가? 언제까지?


이런다고 해서......!


콰앙!


악에 받친 문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할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지켜보고 있던 카일이 뜬금없이 검기로 이루어진 소리의 돌풍을 날린 것이다. 문을 노린 게 아니었다. 유노를 노린 것이었다. 앞만 보고 전진하고 있던 유노의 옆을 급습해 문으로부터 멀리멀리 날려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유노의 머리통을 쪼갤 심산으로 내려쳤던 문의 두 박도는 허무하게도 허공만 가르고 말았다.


“......!”


문은 카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노 쪽을 돌아보았다. 날아가 버린 유노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탈진했군. 문은 거의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그리고 카일의 예리한 판단력에 감탄했다.


광견이 한계를 이미 넘었음을 눈치 챈 건가? 아니면, 직감인가?


전투가 더 지속됐다간 결국 힘이 떨어진 유노가 문의 두 칼의 먹잇감이 될 것을 알고 끼어든 것이었다. 유노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문에게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정교함. 훌륭한 솜씨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굳이 칭찬을 해줄 여력도 이유도 문에게 없었지만 말이다. 유노와의 전투로 인해 많이 지친 문이었지만, 여전히 루리아를 죽여야 한다는 임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카일은 어디까지나 방해요소에 불과했다.


문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카일 정도는 눌러버릴 수 있었다. 나나니가 있었지만, 한쪽 팔이 부러져 그쪽도 멀쩡하지 않은 건 같았다. 이제 두 놈. 두 놈만 더 치워버리면 임무완료였다.......


쿠웅!


문은 때맞춰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다행히 몸이 제대로 반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그만 움직임에도 유노와의 전투 후유증 때문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이쯤 되니 문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은 고개를 들어 뜬금없이 나타나 자신을 공격한 시커멓고 거대한, 흉물스러운 [괴물]을 올려다봤다. 그 괴물은 거대한 고양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낙.


아낙이었다.


일찌감치 문의 손에 의해 두 동강나 사라진 아낙의 재등장에 도리어 놀란 것은 결전의 각오를 다지고 있던 카일과 나나니였다. 혹시 마라가 회복이라도? 두 사람은 루리아 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변함없이 역장 위에 몸을 뉘인 채 죽은 듯 가만히 있는 마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두 눈을 감은 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루리아도.


두 여자에게서 특별히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 달라졌다. 아낙, 마라의 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아낙이 다시 여기 나타난 것이 그 증거였다.


끝이 없군.


정말이지 별에 별 임무를 다 수행해왔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겨온 문이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까마득하게 아래로 보던 것들을 상대로 하던 임무라 더 그랬다.


어려웠다. 이렇게 안 풀리는 임무는 난생 처음이라 느껴질 정도로.






눈이 멀어버린 상태에서 루리아는 딱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문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잇대가 마라의 능력에 관해 설명해줬던 것이 기억났다. [괴물] 아낙. 밤낮없이 [괴물]에게 시달렸다는 마라의 과거사에서 미루어 짐작컨대 이 존재는 마라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중에서도 발현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마라가 의식을 잃은 지금도 아낙을 어떻게든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의식을 마라의 무의식과 어떻게든 연결할 수 있다면?


자신의 성염과 마라의 성염의 흐름을 일치시킬 수만 있다면?


마라의 뇌내에 흐르는 성염의 흐름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순수하게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도 몰랐다. 정말 실현이 되는지까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혹시라도 성염의 흐름을 잡는답시고 마라의 뇌를 상하게 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됐다. 루리아의 성염이 마라의 뇌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사고라도 발생했다간 마라는 검상에 죽는 것이 아니라 뇌사하고 말 것이다.


매우 위험하면서도 정밀한 작업이 요구됐다. 그것도 눈을 감은 채로 해야 됐다. 그러나 루리아의 망설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그거라도 해야 됐다.


아낙은 강력한 존재였다. 아낙이 있다면 문을 무찌르는데 큰 힘이 될 터였다.


루리아는 먼저 역장에 집중했다. 그리고 역장을 통해, 역장 위에 누워있는 마라의 체내 성염의 흐름을 완벽하게, 면밀하게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크게 다친 탓인지 마라의 체내 성염은 미약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 꼬여있었다. 그러나 루리아는 그 수많은 흐름 중 마라의 뇌와 연관돼 있는 흐름을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신중하게 그 흐름을 자신의 체내 성염의 흐름과 연결시켰다.


문이 선사해준 하얀 세상 밖에 보이지 않았던 루리아의 눈에 풍경의 변화가 생겼다. 정반대의, 까만 세상이 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라의 무의식 속이었다. 마라의 뇌내 성염과 자신의 성염을 연결하는 것으로, 루리아는 마라의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해낸 것이다. 루리아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성염술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물론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기뻐할 틈 따윈 루리아에게 없었다.


루리아는 그 무의식의 세계에서 아낙을 보았다. 아니, 보았다기 보다는 느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주인을 잃은 아낙은 루리아를 보고도 얌전했다. 루리아는 그런 아낙에게 자신의 간절한 의지를 전달했다.


도와줘.


네 힘이 필요해.


여기서 나와줘. 마라 씨를, 우리를 지켜줘.


그리고 아낙은,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루리아의 바람에 응답했다.


어떤 기미도 없이 불현 듯 문의 옆에 나타난 아낙은 바로 문을 공격했다. 루리아가 딱히 명령하지 않아도 문이 주적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듯했다.


루리아는 여전히 앞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구현된 아낙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주변 상황을 인지할 수는 있었다. 아낙의 모든 감각을 루리아가 일정 부분 공유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마라처럼 아낙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낙의 움직임에는 루리아의 의지가 분명 반영되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루리아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낙을 계속 유지시켜야 해. 싸워야 해. 이겨야 해. 이길 수 없다면, 최소한 시간만이라도 어떻게든.


아낙은 루리아보다 한술 더 떴다. 문이 기습을 피하자, 인정사정없이 연계를 이어갔다. 유노와의 전투로부터 아직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문은 그저 피해 다니는 데만 급급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면 됐다. 시간이 필요했다.


카일과 나나니는 여전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왜 마라가 기절해 있는데도 그녀의 능력인 아낙이 구현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둘은 기회를 감지했다. 문은 아낙과 맞서지 못하고 도망만 다니고 있었다. 유노와의 전투 후유증이 크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문은 카일과 나나니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낙의 존재감이 자연스럽게 문에게 사각지대를 만든 것이다.


“카일님.”


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나니가 입을 열었다. 카일도 굳이 나나니를 돌아보지 않고 문의 움직임만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그 장송곡이라는 기술을 한 번 더.”


“그래.”


대검을 양손으로 꽉 움켜잡아 들어 올리며 카일은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기회가 올 거야. 그때 할게. 0급의 움직임이 제한될 때.”


“반격 타이밍입니다.”


나나니가 즉답했다.


“0급이 아낙에게 반격하는 타이밍. 그 한순간 저자의 위치가 고정됩니다. 놓치시면 안 됩니다.”


카일은 답하지 않았다. 문의 움직임에 이미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나나니의 예상은 옳았다. 문은 도망만 다니지 않았다. 문을 공격해오는 아낙은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지만, 움직임이 어딘가 많이 엉성했다. 역시 마라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공격 패턴이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피하기를 반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은 아낙의 약점을 눈치 챘다. 여유를 찾은 문은 한숨을 돌리면서 반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도 두 동강 내주지.


무턱대고 달려오는 아낙을 또 피하는 대신, 지면을 박차고 문은 마주 달렸다. 자세를 최대한 낮게 유지해 자신의 머리통을 노리고 쓸어오는 아낙의 거대한 앞발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두 박도를 교차로 휘둘러 아낙의 허리 부분을 크게 베어버렸다. 유노의 청록색 아우라에 비하면 아낙의 내구성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은 계획했던 대로 다시 한 번 아낙을 두 동강 내버리며 그 옆을 비껴갔다.


바로 그때, 문은 짧게나마 정직한 움직임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아낙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가하는 동안 선택할 수 있는 동선이 명백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 주위에는 함께 휩쓸릴 아군도 없었다. 카일은 남은 체내 성염을 남김없이 대검에 집중했다.


흐느끼다 못해 대성통곡을 하는 것 같은 난폭한 울음소리를 문은 바로 감지해냈다. 그러나 그의 무게중심은 여전히 앞에 쏠려있었고, 그물망 같은 소리 검기는 그런 그를 통째로 집어삼키려하고 있었다. 문은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오른 발목 틀어 몸의 방향을 왼편으로 바꾸어 점프했다. 균형을 잃은 그의 몸이 공중에 뜨면서 왼편으로 기울어 날았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리 검기를 다 피하진 못했다. 검기의 일부가 스치듯 그의 오른 팔뚝 부위를 훑고 갔다. 놀랍게도, 동시에 그의 새하얀 완전무장 일부가 가루가 되어 떨어지면서 문의 맨살을 노출시키는 구멍이 생겼다.


나나니는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문에게 바로 접근하기에는 문과 나나니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더욱이 나나니는 왼팔까지 부러진 상황이었다. 그림자 이동술을 쓴다 해도 문에게 대처할 여지를 주고 말 터였다.


그래서 나나니는 다른 선택을 했다. 최후의 최후까지 몰렸을 때나 할법한 선택이었다. 나나니는, 들고 있던 송곳을 문의 오른팔을 노리고 힘껏 던졌다.


“......!”


여러 가지 이유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던 문은 눈뜨고 나나니의 송곳이 자신의 오른 팔뚝에, 완전무장에 생긴 구멍을 통해 박히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효과는 바로 체감됐다. 문은 오른팔의 감각이 급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치명적인 마취. 깊숙이 박힌 나나니의 송곳이 여지없이 문의 오른팔에 흐르는 성염의 흐름을 끊어 내버린 것이었다.


“.......”


박도를 쥔 채로 굳어버린 오른팔을 쓸 수 없었으므로, 문은 왼팔에 의지해 어렵사리 제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마취가 성공했음을 직감한 카일과 나나니는 오랜만에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띨 수 있었다. 오른팔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은 문의 남은 전력의 절반 이상을 깎아 내버렸다는 뜻이었다. 비록 카일과 나나니도 상응하는 희생을 치러야하긴 했지만, 그래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자면 두 사람이 약화된 것보다 문이 약화된 것이 훨씬 의미가 있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계속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가 또 있었다.


“.......”


문은 카일과 나나니보다는, 눈앞에 꾸물꾸물 재생되고 있는 [괴물] 아낙을 보았다. 아무래도 두 동강 내버리는 정도로는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문은 몰랐지만, 마라의 무의식과 연결돼 있는 루리아가 계속해서 아낙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큰 집중력과 부담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의 무의식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의 현장 속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루리아에겐 그럴 수 있는 힘이 남아있었다.


당장 풀릴 마취는 아니군.


노란 눈을 빛내고 다시 자신에게 달려들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아낙을 보며 문은 생각했다. 오른팔 전체가 신기할 정도로 아무 감각이 없었다. 마침 억지로 틀었던 오른 발목도 시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전신의 근육 여기저기 크고 작은 통증이 샘솟듯 올라와 전달됐다. 신검합일 덕에 발생한 두통도 도로 찾아왔다. 도끼를 머리를 쪼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문은 침착했다.


기묘할 정도로 마음이 평안했다. 한밤의 깊은 고요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문은 예기치 않게 악화돼 버린 상황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임무를 완료하는데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싸울 수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은 맞았지만, 끝은 아니었다.


우연히 환하게 웃고 있는 나나니의 얼굴이 문의 눈에 들어왔다. 문도 피식 웃었다. 어리군. 문은 내심 중얼거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란 걸 모르는군. 특히 우리들의 세계에선 말이야.......


임무 실패의 위기까지 몰릴 가능성, 도리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지 모르는 최악의 가능성을 과연 0급인 자신이 가정 안 해봤을까?


비장의 수? 당연히 준비돼있다.


설마 여기서 사용하게 될 거라고 생각 못했던 것뿐이지.


문은 왼손을 펴 쥐고 있던 박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왼 손바닥을 들어 올려 자신의 두 눈을 가렸다. 눈을 완전히 가리기 전, 자신을 노리고 달려오는 아낙의 모습이 어렴풋이 동공에 새겨졌지만 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오롯이 그의 왼손바닥만 보고 있었다.


빛이, 달빛 같이 새하얀 한줌의 빛이 번쩍했다.


문의 눈에 비친 모든 세계도 하얗게 물들여버리는, 하얀 빛이었다.


작가의말

사실 문이 주인공이었던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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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시므리 (7) +1 20.03.30 135 7 22쪽
176 시므리 (6) +4 20.03.23 162 6 20쪽
175 시므리 (5) 20.03.16 134 7 21쪽
174 시므리 (4) +1 20.03.09 132 7 17쪽
173 시므리 (3) +3 20.03.02 157 10 17쪽
172 시므리 (2) +3 20.01.13 178 9 20쪽
171 시므리 (1) +3 19.12.30 171 8 23쪽
170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5) +3 19.12.23 150 6 17쪽
169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4) +1 19.12.15 157 4 22쪽
168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3) +2 19.12.03 163 10 18쪽
167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2) +4 19.11.18 182 9 18쪽
166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1) +1 19.11.11 179 7 24쪽
165 삼마 (5) +2 19.11.04 177 5 19쪽
164 삼마 (4) +3 19.10.21 175 11 24쪽
163 삼마 (3) +2 19.10.08 186 8 19쪽
162 삼마 (2) +4 19.09.30 196 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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