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론의 아이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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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라
작품등록일 :
2016.10.26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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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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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0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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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기브온성으로 (5)

DUMMY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대군의 방문으로 이토즈의 부대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방문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나서는 그 소란이 한층 더 커졌다. 병사고 장교고 생각이 다 딴 데 가있어 아무도 맡은 임무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부대 근처를 비밀리 배회하며 염탐하는 인영들을 경계병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염탐을 마친 인영들은 내려왔던 것만큼이나 비밀스럽게 호리 산을 올라갔다. 전원 티쿤으로 이루어진 염탐꾼들은 거칠기 짝이 없는 산길을 막힘없이 달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호리 산성 성문 앞에 도착했다. 경계병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바로 성문을 열어주었다. 염탐꾼들을 이끄는 역할을 담당한 기브온 반군 간부 밴트는 지체 없이 반군의 리더 아톨의 방으로 갔다. 방금 보고 들은 소식 탓에 밴트는 몹시 흥분 상태였다.


“아톨! 아톨!”


양해도 구하지 않고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밴트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톨은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마침 성염순환을 끝낸 참이었다. 옆에는 밴트의 누나이자 반군 간부인 에이런이 그런 아톨을 돕고 있었다. 이토즈에게 당한 부상은 거의 나았지만, 아톨은 아직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고 회복에 전념하고 있었다.


“왜 그래, 밴트. 무슨 일이야. 밑에 가서 뭘 보고 온 거야.”


“큰일이야, 아톨. 큰일 났어!”


“네 얼굴빛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니란 건 알겠어. 그래. 무슨 일인데.”


“지원군이 왔어!”


밴트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군이야! 못해도 2천은 돼 보여. 그것도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군이야!”


“뭐?”


아톨이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 전 스콜헬름의 군대가 광야로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어?”


“응. 분명 그랬지.”


“그런데 여기로 지원군이 왔다고? 모그리드가 지금 우리에게 신경 쓸 여력이 있나?”


“그게 아냐, 아톨. 내 말 끝까지 들어봐. 모그리드에서 온 지원군이 아닌 것 같아.”


너무 빨리 말을 쏟아내느라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으므로 밴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모그리드 중앙군이 아닌 것 같아. 그런 느낌이 아니야.”


“그런 느낌이 아니라니. 그럼 다른 성에서 보냈다는 건가?”


“그 정도가 아니야. 지원군을 데리고 온 사람이 대박이야. 일단 십이신장 중 제3신장 요압.”


“정보부장이 직접 군대를 데리고 왔다고?”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은 기분에 아톨은 머리가 다 아파왔다.


“첩보질 하느라 여념이 없어야 할 양반이 왜 여기로.......?”


“근데 요압 뿐이 아냐.”


“뭐야. 십이신장이 또 있어?”


“어. 십이신장도 더 있어.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루리아.”


“뭐?”


“루리아 공주! 루리아 공주가 여기 있대!”


흥분이 최고조에 달한 것인지 밴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톨과 에이런은 그저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에이런이 겨우 질문을 던졌다.


“그게...... 확실해? 직접 봤어?”


“직접 보진 못했어.”


조금 진정이 된 밴트가 재빨리 대답했다.


“워낙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어서...... 근데 경계병들이 떠드는 소리에 의하면 루리아 공주가 여기 직접 왔대. 그래서 지금 밑에가 난리도 아냐. 모그리드인들의 반응을 보니 진짜 공주가 오긴 온 모양이야.”


“아니. 근데 루리아 공주나 요압이나 다 모그리드에 있던 사람들 아니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아톨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중앙군을 끌고 여기 왔다는 거잖아...... 그래야 말이 되잖아. 근데 중앙군이 아닌 것 같다고?”


“어. 우리가 중앙군이랑 직접 붙어봤잖아. 같은 병사들이 아니야.”


“게다가 지금 스콜헬름 군대와 대치 중인데...... 공주가 십이신장들을 데리고 왜 여기까지 직접 온 거야? 설마.......”


아톨의 표정이 돌연 어두워졌다.


“스콜헬름과 본격적으로 전쟁하기 전에 우리를 토벌하러 온 거 아니야? 아브넬이 직접 오기 어려우니까 후계자의 능력 증명도 할 겸 십이신장들을 이끌고.......”


“군주로서 위엄을 세우기 위해?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본인 정치적 입지도 세우면서 동시에 모그리드인들 사기도 올리면서.......”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


심각해진 두 남자 아톨과 밴트에게 에이런이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예전에 아볼로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잖아. 키론의 아이...... 루리아 공주가 만약 직접 광야로 들어온다면 그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기 위해서일 거라고...... 그러니까 루리아 공주가 광야로 온다면 그건 우리에게 호재라고.......”


“.......”


“......그래. 그런 말을 하긴 했지. 아볼로가.......”


아톨은 한숨처럼 내뱉은 말을 차마 끝내지 못했다. 당시 아볼로가 그 말을 했을 때, 기브온인들의 리더는 아톨 자신이 아닌 성주 로칸이었다. 로칸의 동생 뮬과 마훌도 거기 있었다. 에이런의 말이 지금은 없는 그 세 사람을 떠오르게 한 것이다. 아톨 뿐 아니라 밴트와 에이런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우울한 침묵이 한동안 방안을 채웠다.


“일단 아볼로를 부르자.”


결국 아톨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는 현 상황을 그들에게 해석해줄 수 있는 사람은 기브온인들의 책사 노릇을 하고 있는 아볼로 밖에 없었다.


“아볼로에게 들어보자. 루리아 공주가 여기까지 직접 온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지.”


“.......”


아볼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밴트는 입을 조금 내밀긴 했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에이런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세 사람은 사람을 보내 아볼로를 데리고 오게 했다. 10분 후, 아볼로가 문을 열고 아톨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평균 이상의 키와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검은 곱슬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고 수염도 짧게 기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남자의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부분은 그의 두 눈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또렷한 광채를 발하는 그의 고동빛 눈은 보는 이들에게 묘한 신뢰감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지혜와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고 외견에서부터 그런 점들이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톨에게 질문을 던지다 문득 아볼로는 밴트를 보았다. 순간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밴트님이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오신 모양이군요. 무슨 일입니까?”


“.......”


아톨은 밴트에게 설명하라는 눈빛을 보냈고, 밴트는 아톨과 에이런에게 얘기해 준 내용을 고스란히 아볼로에게도 들려주었다. 아톨이나 에이런과 달리 아볼로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루리아가 이곳에 왔다는 대목에도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아볼로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오히려 마음이 급해진 아톨이 밴트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해, 아볼로?”


“공주 마마께서 여기로 직접 오신 것에 대해 말입니까?”


“그래. 루리아 공주가 직접 행차한 거에 대해 말이야. 나와 밴트는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아닐 겁니다.”


허무할 정도로 명쾌히 아볼로가 대답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마마께서 광야에 오시면 결코 현 모그리드 정부를 돕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닐 것이라고. 스콜헬름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마마께서 스콜헬름과의 전쟁을 바라실 리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토벌해 현 정부 좋은 일을 하실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왜 공주가 모그리드에서 대군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


아톨이 집요하게 물었다.


“십이신장들까지 데리고. 그중 하나가 요압이라고 했어. 3신장인데다가 정보부장인 군부의 거물이잖아.”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온건파의 수장이기도 하지요. 이토즈와 마찬가지로.”


아볼로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톨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럽습니다.”


“부자연스럽다?”


“그렇습니다. 광야에 스콜헬름 군이 들어왔다는 이때, 정보부장이나 되는 인사가 여기까지 직접 온 것이나 나라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가 여기까지 온 것이나......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전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의문이 해소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의문? 어떤 의문?”


“왜 이렇게 모그리드가 조용한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아볼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스콜헬름은 우리를 상대로 섬멸전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공주 마마께서 광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콜헬름의 무적3군이 광야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다음.......”


“다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채근하는 아톨을 달래듯 아볼로가 말했다.


“너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비록 여기 갇혀 바깥세상의 소식을 제대로 접하고 있지 못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밖이 조용하다는 건 말입니다. 공주 마마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붉은 눈을 이어받은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주인이 말입니다.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 현 정부에게 있어 이건 반드시 써먹지 않으면 안 될 카드입니다. 마마의 진심이 어떻든 간에 그들은 백성들과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하는데 마마를 사용해도 벌써 사용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건국기념일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후로도 잠잠 무소식입니다. 그러다 뜬금없이 오늘, 여기에 마마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무슨 의미인데?”


“이상한 건 그것뿐이 아닙니다.”


아톨의 반문에 답하는 대신 아볼로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톨은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아볼로는 언변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물 흐르듯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 아톨과 밴트, 에이런 모두 이미 정신없이 빠져든 상태였다.


“이토즈의 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 여기 있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들에게 기브온성을 내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그들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스콜헬름군을 상대로 모그리드가 힘에 부치는 상황이라면, 제6신장인 이토즈와 그의 수하들은 벌써 중앙으로 복귀했어야 정상입니다. 만약 스콜헬름군이 격퇴된 상황이라면, 중앙에서 지원군이 와 우리를 향한 공세에 열을 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도 저도 아닌,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포위만 풀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건 우리가 워낙 거세게 저항해서 그런 거잖아.”


밴트가 뚱하게 내뱉었다. 아볼로는 바로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공격을 잘 막아낸 덕이지요. 저들 역시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는 우리를 토벌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을 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무리를 해서라도 토벌을 감행하든가, 포기하고 더 강대한 적을 상대하든가. 현재로서 이토즈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사실 이게 몹시 큰 의문이었습니다. 대체 스콜헬름군과의 대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기에 이토즈가 돌아가지도, 공격하지도 않고 있는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루리아 공주가 여기 온 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줬다는 건가?”


“완전히는 아닙니다.”


아톨의 물음에 아볼로의 목소리가 갑자기 신중해졌다.


“역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보니 완벽히 다 알 순 없습니다. 다만.......”


아볼로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로서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말씀드렸듯 공주 마마와 요압이 이 타이밍에 이곳으로 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그렇지만 루리아 공주가 본인 입지를 위해 우리를 직접 토벌하러 온 것이라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


“그것도 물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볼로가 인정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마마께서는 현 정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오신 게 아닐 겁니다. 스콜헬름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오셨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하면?”


“......마마와 요압이 여기 있는 것은, 현 정부의 뜻을 반하는 결정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밴트가 두 눈만 껌뻑였다. 아톨도 아볼로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런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아!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그녀의 안색이 핏기가 사라지며 하얗게 변했다.


“설마 루리아 공주와 요압이 현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는 뜻인가요?”


“뭐?!”


아톨과 밴트도 소스라치게 놀라 아볼로를 돌아보았다. 아볼로가 보다 결연한 얼굴로 세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저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마마께서는 처음에는 수도 모그리드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든 강경파들을 설득시킬 요량이셨겠지요. 분명 실패하셨을 겁니다. 칼립 하임 네이슨은 이번 전쟁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예언자 아만과 마녀 고멜라, 군대장관 아브넬이 받쳐주고 있지요. 온건파인 요압의 도움을 받는다 한들 마마께서는 역부족이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이 없지요.”


“말로 듣지 않으니 힘으로 꺾어버린다?”


“내전?”


밴트가 연이어 비명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모그리드놈들 진짜 다 미친 거 아냐? 스콜헬름이랑 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 지들끼리 싸우겠다고? 동족끼리 피를 보겠다는 거야?”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볼로가 밴트에게 반문했다. 밴트는 뭐라 말하려다 아볼로의 눈빛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볼로의 두 눈은 냉정히 가라앉아 있었다. 밴트는 그제야 아볼로가 자신들과 같은 기브온인이 아닌 모그리드인임을 새삼 떠올렸다.


“내전. 저도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이긴 합니다.”


아볼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저는 현 정부의 인사들을 잘 압니다. 이 나라의 리더들을 말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꽉 막힌 사람들이며 스콜헬름과의 전쟁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 왔는지...... 그들의 광기는 이미 말로 가라앉힐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선 칼을 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내전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스콜헬름과의 전쟁만은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내전만이 이 민족이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 알고 있어.”


아톨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당신이 처음 우리를 찾아온 것도 그런 목적이었으니까. 힘이 필요했던 거잖아. 모그리드 정부와 맞서 싸울 군사력. 아무 배경 없는 당신에게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 존재는 모그리드에서 우리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왔었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볼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절 믿고 기꺼이 도와주신 것에 대해 말입니다...... 비록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우리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여전히 무뚝뚝한 투로 아톨이 말했다.


“당신 말을 듣지 않고 우리가 무리하게 공격을 이어가는 동안...... 호리 산성에서 대피 준비를 해준 것에 대해 말이야. 당신이 준비해주지 않았다면 모그리드가 멸망하기 전 우리가 먼저 멸망했을 거야.”


“.......”


로칸이 떠오른 것인지 아톨이 감사를 표했음에도 아볼로는 더욱 무거운 얼굴이 됐다. 아톨은 바로 주제를 바꿨다.


“만약 당신 말이 맞는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지?”


“마마와 협력해야 합니다.”


아볼로가 즉답했다.


“오늘 이곳에 온 지원군의 수가 2천이라 했습니다. 중앙군이 아니라면, 이들은 아마 요압의 군사, 즉 주다성의 군사일 것입니다. 이 정도만으로는 아브넬이 이끄는 중앙군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군세를 불리려 할 것입니다. 기브온인들의 합류는 당연히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 아톨은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에 아볼로는 한층 강경한 어조로 설득을 이어갔다.


“이곳에 아직 4천에 가까운 기브온 전사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군세를 단숨에 두 배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마와 요압도 이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협력을 요청해올 것입니다. 그들과 우리의 뜻은 같습니다. 스콜헬름과의 전쟁을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협력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밴트가 볼멘소리를 토해냈다.


“저 이토즈란 놈 손에 죽은 기브온인들이 몇인데! 아톨도 크게 부상을 입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한편이 돼야 한다니. 난 안 내켜. 지금까지 죽일 듯이 싸워온 게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굴 순 없잖아!”


“분명 감정적으로는 쉽지 않지요. 하지만 크게 보셔야 합니다, 밴트님.”


기다렸다는 듯 아볼로가 대답했다.


“우리가 모그리드 정부에 반기를 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콜헬름과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온 민족이 유일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분이 우리와 뜻을 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예언에 의지해 이 나라를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칼립 하임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권위와 상징성을 가진 사람은 공주 마마뿐입니다. 모그리드인들만이 아니라 기브온인들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마마께 힘이 돼드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만해, 밴트.”


아톨이 밴트의 말을 잘랐다.


“아볼로의 말이 맞아. 우리가 싸우는 목적을 잊으면 안 돼. 우린 이 말도 안 되는 전쟁을 막기 위해 일어난 거야. 로칸과 뮬, 마훌 모두 그 목적을 위해 희생된 거고. 만약 루리아 공주가 우리와 같은 뜻이라면, 돕지 못할 이유가 없어.”


“아톨님. 그럼 당장이라도.......”


“당신도 기다려, 아볼로.”


아톨이 아볼로의 말도 잘랐다.


“모그리드인들과 척을 지게 되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더 이상 그들의 관습과 생각을 공유하지 않게 된다는 거지.”


아볼로가 입을 다물자 아톨이 말을 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공주니 정통 후계자니 하는 말에 무조건 무릎을 꿇었겠지만 더는 아니야.”


“.......”


“내겐 여전히 우리 기브온인들의 안위가 최우선이야. 우리 민족의 운명을 과연 맡길 만한 사람인지, 루리아 공주를 직접 만나 얘기해보고 결정할 거야. 그러니 기다려. 당신말대로 저들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면, 먼저 우리에게 접근하겠지.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만약 공주 마마가 마음에 차지 않으신다고 하면.......”


“그땐 농성을 계속할 거야. 공주는 우리 없이 싸워 이겨나가야겠지. 우린 스콜헬름이 모그리드를 무너뜨릴 때까지 버티는 거고. 그뿐이야.”


“.......”


아톨의 의지가 확고함을 엿본 아볼로는 더는 따지지 않았다. 어쨌든 아톨에게 대화의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아볼로는 생각했다. 그의 스승이 가르쳐줬던 것처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예측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루리아가 반드시 기브온인들을 만나러 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의 역할은, 어떻게든 아톨이 루리아에게 감복해 그녀를 따르게 만드는 일이었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기브온인들을 움직여 전쟁을 멈추는 데는 이미 실패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은 루리아였다.


저쪽도 시간이 없을 것이다. 빠르면 연락이 오늘 안에 오겠지. 아톨의 방을 나서는 아볼로의 머릿속은 갈수록 바빠지고 있었다.





수도 모그리드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광야 한복판에는 진지가 하나 있었다. 마치 평범한 군부대처럼 위장하고 있는 이곳은 고멜라의 소유였다. 진지는 일종의 연구소였다. 흑마술 연구소. 왕국을 비롯한 도시국가들에는 법으로 금지돼 있는 사술 중에서도 최악의 사술인 흑마술 말이다. 모그리드에서는 허용돼 있긴 했지만, 역시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꺼리는 게 당연한지라 고멜라도 차마 수도 내에는 연구소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광야 복판에 연구소를 차려놓고 본인이 순간이동으로 왔다 갔다 하는 실정이었다.


상아궁에서의 일을 끝낸 고멜라는 지체 없이 연구소로 이동했다. 그녀는 몹시 들떠있었는데, 가장 하고 싶었던 실험에 가장 적합한 최고의 실험체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십이신장 하나가 생사불명이 돼버리긴 했지만, 괜찮다. 이 실험체를 십이신장급으로 만들면 되니까. 고멜라는 자신이 있었다.


고멜라는 손을 뻗어 팔과 다리를 비롯한 전신이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유노의 뺨을 어루만졌다. 유노는 기둥에 결박돼 있는 상태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고멜라의 술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싸우는데 미쳐있어 별명도 미친개. 여기 잠깐 있으면서 보인 행보만 봐도 들어온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쿡쿡. 고멜라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생존본능을 완전히 압도해버린 광기. 그것도 전투에 굶주려있는 광기.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광전사. 그런 아이를 진짜 광전사로 만들어버리면, 얼마나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려나요?”


“고멜라님.”


혼잣말을 하고 있는 고멜라에게 콧수염을 기른 모그리드 복장의 남자가 하나 다가왔다. 그는 고멜라와 같은 흑마술사로 고멜라의 수하이며 이 연구소의 책임자였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좀 더 걸렸군요.”


“죄송합니다. 사지가 부러져 있다 보니...... 그래도 아이의 회복력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상당히 무리한 마술을 시전했으니 별 탈 없이 받아냈습니다.”


“좋아요. 그럼 준비한 ‘영’은?”


고멜라의 질문에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식은땀마저 흘리는 게 뭔가 불안해보였다. 그러나 고멜라가 눈빛으로 답을 재촉하자, 마지못해 다시 입을 열었다.


“예. 명령하신 악령을 준비해놨습니다. 하지만.......”


“하지만요?”


“고멜라님.”


남자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이 악령은 악령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이 악령이 깃든 사람의 육체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될 정도입니다. 너무 강합니다. 저 아이가 상당히 강력한 티쿤이긴 하지만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고멜라가 즉답했다.


“감당하지 못하면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그것뿐입니다.”


“고멜라님.......”


“그리고 최악의 악령이라고 해서 일부러 잡아온 것 아닙니까? 최악의 광전사를 만들기 위해서요. 그 악령이 저 아이 안에 있는 모든 광기를 끄집어내줄 겁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만들어주겠죠. 그렇게 광전사가 된 저 아이를.......”


쿡쿡. 참지 못하고 고멜라가 말하던 중에 웃었다.


“마마께 선물로 드릴 겁니다.”


“.......”


“오직 마마의 명령에 따라 싸우고 죽는 미친개로 말이죠. 기뻐하시겠죠? 친구와 영원히 함께하시게 될 테니.”


쿡쿡. 고멜라가 또 웃었다. 남자는 웃지 못했다. 그도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사술을 부리는 흑마술사였지만, 고멜라는 그런 그가 봐도 가끔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면이 있었다.


“자, 어서 의식을 진행하죠.”


고멜라가 콧노래 부르듯 명령했다.


“악령이 저 아이를 집어삼키는데 못해도 수일은 걸리지 않겠어요? 가능하면 마마께서 돌아오실 날에 맞추고 싶네요. 서두릅시다 우리.”


작가의말

기브온인들이 기억 안 나시는 분들은 전초 편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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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차기작 공지 +7 20.07.22 269 8 2쪽
180 후기 +7 20.05.02 286 13 6쪽
179 에필로그 +7 20.04.27 253 11 26쪽
178 시므리 (8) +3 20.04.13 173 6 21쪽
177 시므리 (7) +1 20.03.30 135 7 22쪽
176 시므리 (6) +4 20.03.23 162 6 20쪽
175 시므리 (5) 20.03.16 134 7 21쪽
174 시므리 (4) +1 20.03.09 132 7 17쪽
173 시므리 (3) +3 20.03.02 157 10 17쪽
172 시므리 (2) +3 20.01.13 178 9 20쪽
171 시므리 (1) +3 19.12.30 171 8 23쪽
170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5) +3 19.12.23 150 6 17쪽
169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4) +1 19.12.15 157 4 22쪽
168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3) +2 19.12.03 163 10 18쪽
167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2) +4 19.11.18 182 9 18쪽
166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1) +1 19.11.11 179 7 24쪽
165 삼마 (5) +2 19.11.04 177 5 19쪽
164 삼마 (4) +3 19.10.21 175 11 24쪽
163 삼마 (3) +2 19.10.08 186 8 19쪽
162 삼마 (2) +4 19.09.30 196 9 17쪽
161 삼마 (1) +4 19.09.10 199 7 23쪽
160 친구 (7) +1 19.09.03 179 9 25쪽
159 친구 (6) +1 19.08.26 177 11 21쪽
158 친구 (5) +1 19.08.19 176 1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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