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론의 아이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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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라
작품등록일 :
2016.10.26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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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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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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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1)

DUMMY

요압과 아비새가 모그리드의 동문을, 그리고 지토와 루리아가 모그리드 북문을 뚫고 상아궁까지 침입하는 동안 제이와 호렙, 칼름 그리고 나나니가 남문에 도착했다. 입다가 군을 뒤로 물린 탓에 남문 역시 호위병 하나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흐음. 묘한 눈빛으로 제이가 호렙을 돌아보았다. 호렙이 말했다.


“상황 끝인 모양인데요.”


“입다, 삼마, 그리고 시므리. 중앙군도 잔뜩 남아있었고. 루리아 군세에 비견될 바는 아니라지만 그렇게 약한 전력도 아닌 것 같은데, 벌써 끝났다고?”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진 것 같진 않습니다. 여기는 전투의 흔적이 전혀 없어요.”


주위를 둘러보던 칼름이 한마디 했다. 흐음. 제이는 입을 삐죽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이곳을 지키던 군이 알아서 물러간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호렙?”


“글쎄요. 한 번 들어가서 확인해보죠.”


제대로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서는 남문만 깔끔하게 정리된 것인지, 모그리드 수도내도 그런 것인지 좀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이는 더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남문을 통과해 본격적으로 모그리드 내로 진입했다. 시가지의 대로를 척척 걸었다. 수도 내를 지키는 병력은 전혀 없었다. 종종 밖에 나와 있는 백성들이 눈에 띄었지만, 극히 적었다. 대부분 집에 꼼짝도 않고 틀어박혀 수도를 삼켜버린 내전의 기운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듯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모그리드를 둘러보며 제이는 눈을 빛냈다.


“흥미롭군. 모그리드인들, 혼란스러운 모양이야.”


제이가 중얼거렸다.


“스콜헬름에 항복을 천명한 루리아를 대놓고 받드는 건 아직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 그렇다고 돌아온 루리아를 반대할 마음도 안 생기는 것 같고. 네이슨을 죽인 반역자인 시므리의 편을 들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아주 흥미로워.”


“잘된 일이네요. 모그리드인들이 밖으로 나와 싸우기라도 시작했다면 상황이 어려워졌을 수도 있었는데. 일반 백성이라고 해도 전원 훈련된 전사들이라고 할 만하니까요.”


“그래. 재미있네. 있잖아, 호렙. 이번 모그리드 내전이 내게 주는 영감이 아주 많아. 역시 오길 잘 한 것 같아. 앞으로 우리의 계획에도 아주 좋은 도움이 될 만한 샘플이야.”


“.......”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이 샘플이라는 건 이것 이상의 전쟁을 벌써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는 소리겠지. 호렙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제이와 달리 호렙은 앞으로 그들 앞에 펼쳐질 그 제이의 계획이라는 것이 별로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참하지 않을 생각도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수도 내가 이렇게 조용하다는 건 진짜 상황이 다 끝났다는 의미일까?”


본론으로 돌아간 제이가 고개를 갸우뚱 해보였다.


“상아궁으로 가볼까, 호렙? 지토도 루리아도 다 거기 있을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이네요. 어서 가보죠.”


내심 이미 다 끝나있기를 바라며 호렙이 대답했다. 하지만 좋지 않은 감이 피부를 찌를 듯 선명했다. 이 치열했던 내전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리 없었다. 무언가가 또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좋지 않은 무언가가.......


제이가 다시 뛰기 시작했으므로 호렙 일행도 빠르게 그 뒤를 쫓아야했다. 감이 안 좋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제이는 왠지 신이 나 보였다.





삼마의 부탁을 받은 루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시므리는 역적이었다. 칼립 하임인 네이슨도 루리아에게 반기를 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극단적으로 다른 정치적 성향에 의한 충돌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이슨은 루리아를 폐하고 그 권위를 빼앗으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시므리는 달랐다. 시므리는 루리아를 끌어내고 자신이 모그리드의 권좌에 앉으려는 목적이었다. 네이슨을 죽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역자였다.


인간 대 인간으로 시므리를 용서하는 것은 루리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리아는 충분히 그럴 만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시므리를 용서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용서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그리고 루리아는 요압이 절대로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루리아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브넬 건으로 요압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이 시므리를 용서한다 해도, 요압이 제멋대로 개입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다분했다. 정치적으로 요압과 또 충돌해봐야 루리아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명분과 정치력에서 밀리는 루리아는 결국 또 요압의 행동을 묵인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군주로서 권위가 서지 않는 만큼 이제 새로운 정부를 꾸려야 하는 루리아에게 부담이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시므리도 카블라 왕가의 혈족이 아닌가.


이 모든 사태를 온전히 시므리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는 노릇. 목숨만은 보존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삼마 장군.”


마음을 굳힌 루리아가 삼마를 달래듯 말했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모그리드인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루리아는 얼른 말을 이었다.


“시므리 장군은 사로잡을 것입니다. 당연히 죄를 묻겠지만, 목숨까지 가져가는 것은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마마. 하지만......!”


듣다 못한 베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루리아의 결정에 대한 명백한 반대였다. 하지만 베델이 말을 끝내기 전, 지토가 베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지토의 박력에 천하에 무서워하는 것이 없는 베델도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멈춰 섰다. 지토가 말했다.


“마마께서 이미 결정하셨다. 일단 받들어. 불만이라면 다 끝나고 나중에 말해도 늦지 않아.”


“......!”


지토가 입을 막은 것은 베델만이 아니었다. 베델 뿐 아니라 노이어, 이스르엘, 플랑데 같은 십이신장들의 입도 한꺼번에 다 틀어막아버린 것이었다. 시므리의 목숨을 지켜주겠다는 루리아의 말에 베델 못지않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노이어는 끙 하는 신음과 함께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들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삼마조차 압도해버린 지토 앞에서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이스르엘이나 플랑데도 매한가지였다.


“명령입니다. 삼마 장군에 의하면 시므리 장군은 상아궁 내 어딘가에 숨어있습니다. 흩어져서, 최대한 빠르게 시므리 장군의 위치를 파악하세요.”


지토 덕에 기운을 얻은 루리아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므리 장군을 찾으면 절대 혼자 상대하지 마시고, 시간을 끌며 위치를 알리세요. 아시겠습니까? 이스르엘 장군, 노이어 장군, 그리고 플랑데 장군. 재니서리들의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대동한 병력과 재니서리들을 이끌고 가서 시므리 장군을 찾아주세요. 서둘러주세요.”


“......알겠습니다, 마마.”


하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결국 다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흩어지는 쪽을 택했다. 루리아 곁에 여전히 지토가 눈을 부라리며 서있었기 때문이다. 루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인원이 상아궁을 수색하기 시작한다면 시므리를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요압이 상아궁까지 오기 전, 시므리를 찾아 사로잡아야 한다. 시므리를 찾기 전, 요압이 먼저 도착하기라도 하면 요압도 아비새와 나하리를 풀어 시므리를 찾을 것이고, 분명 보자마자 죽이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요압과 보이지 않은 기 싸움을 벌여야 할 테니.......


“고마워요, 오빠.”


병력들이 빠르게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루리아가 쓰게 웃었다.


“정말 오빠가 없었으면 제가 이 사람들을 다 어떻게 다뤘을지 모르겠어요. 언제나 고마워요, 오빠.”


“괜찮아. 난 이런 역할을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지토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말을 이었다.


“우리도 가자. 우리도 시므리를 찾아야지. 녀석의 냄새를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분명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좋아요.”


루리아도 간만에 의욕을 냈다.


“최대한 빠르게 찾아봐요. 시므리 장군만 잡으면...... 정말 이 전쟁도 다 끝이니까.”


퍼엉!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루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치열한 전투상황을 암시하는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이렇게 빨리 시므리의 행방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지토와 루리아는 조금 당황한 채 동시에 폭음이 울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킁. 지토는 공기 중에 대고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문득 지토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냄새가......?”


시므리의 냄새가 나지 않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루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괜한 말을 입에 담은 것 같았다. 아직, 아직 끝이 아니었다. 전혀 끝이 아니어다.





시므리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플랑데였다. 그런데 발견했다고 해야 하나. 그저 플랑데와 플랑데가 이끄는 병력이 향하는 방향에 시므리가 나타났을 뿐이었다. 산보하듯 여유롭게 수십에 달하는 플랑데 앞에 나타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어보였다.


플랑데는 처음에는 바로 시므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분명 생김새는 시므리와 같았는데, 피부색이 달랐다. 분홍색이었다. 예전 시므리는 두 눈만 분홍이었는데 새롭게 나타난 시므리는 전신이 분홍이었다. 심지어 이빨과 머리카락 색깔마저 그랬다. 도무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일색의 기괴함에 플랑데는 절로 기분이 나빠졌다. 플랑데로서는 시므리가 대체 스스로에게 무엇을 한 것인지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기분 나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시므리의 가슴 정중앙에 반짝이고 있는 붉은 구슬이었다. [왕의 보물]. 그 위력을 삼마를 통해 충분히 목격한 플랑데였다. 그런 것이 시므리의 가슴 한복판에 달려 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항복해라 시므리!”


찝찝함을 이기지 못한 플랑데는 답지 않게 신중하게 처신했다. 시므리를 보자마자 공격하기보다는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재니서리들과 삼마도 모두 항복했다. 수도 모그리드 뿐 아니라 상아궁도 다 우리가 장악했다. 이곳에 더 이상 네 편은 없어. 마마께서 네 목숨만은 살려주시겠다고 하시니......!”


플랑데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대화를 거부하고 다짜고짜 공격한 것은 시므리였다. 광소를 터뜨리며 오른팔을 한 번 휘저었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양의 성염의 파동이 일면서 주위를 깔끔하게 초토화시켰다. 검을 뽑은 플랑데는 재빠르게 유검으로 반응해 간신히 파동을 비켜갈 수 있었지만, 함께 있었던 장졸들은 그러지 못했다. 절반 이상이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휩쓸려 명을 다했다.


플랑데는 식은땀이 등에 맺히는 것을 느꼈다. 역시 [왕의 보물]. 사용하는 에너지량이 너무 차원이 다르다. 플랑데가 외쳤다.


“거리를 벌리고 산개해라! 뭉쳐있으면 안 된다!”


플랑데의 말을 재빨리 알아듣고 장졸들이 멀찌감치 물러섰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시므리가 다시 한 번 오른팔을 휘두르며 똑같은 성염의 파동으로 공격해왔다. 다만 이번에는 충분히 거리를 벌린 덕택에 모두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히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거리를 벌리고선 시므리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뿐, 아무도 가까이 다가갈 생각을 못했다.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시므리의 광역기술에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시므리로서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대포 중의 무대포라고 할 만한 플랑데마저 쩔쩔맬 정도의 힘이 자신에게 있었다. 넘쳐흘렀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고의 네스토 능력을 가진 시므리였지만, 스스로의 두 눈을 뽑아버림으로써 티쿤으로서의 한계를 일찌감치 확정해버렸기 때문이다. 힘으로 십이신장급 티쿤을 압도한다는 것은 시므리에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티쿤으로서의 한계가 명백하니 언제나 네스토 능력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의 육체는 더 이상 예전의 흠 있는, 불완전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리고 [왕의 보물]이 공급하는 성염의 양은 예전 성염보유량의 수십, 아니 수백 배였다. 질 것 같지 않았다. 시므리는 자신했다. 완벽한 육체에 무한한 성염. 티쿤 알람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았다.


“시므리......!”


“뭐야 저 녀석......!”


폭음을 듣고 근처에 있던 이스르엘과 노이어도 달려왔다. 두 사람은 완전히 분홍색으로 변해버린 시므리를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악성부터 토해냈다. 시므리는 폭소했다. 십이신장이 셋이나 있고 재니서리와 다른 티쿤들도 수십이 있는데, 질 것 같지가 않았다. 도무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시므리는 역장을 발휘했다.


시므리의 발밑에 분홍빛 웅덩이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웅덩이로부터 분홍빛 촉수가 우후죽순으로 돋아 다니더니, 이스르엘과, 노이어, 플랑데 세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동시에 공격하고 들어갔다. 촉수는 날아오는 속도도 빨랐지만, 그 끝의 기운이 몹시 날카로운 것이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세 십이신장은 방어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편을 택했다. 함부로 반격을 가하기에는 촉수의 수가 워낙 많았고, 공격도 멈춤이 없었다. 세 사람은 병력을 계속해서 뒤로 물리며 쏟아지는 촉수들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정말이지 최고로군.


미친 듯이 웃으며 시므리는 생각했다.


십이신장 세 명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힘. 아무리 남발해도 떨어질 줄 모르는 이 힘. 최고야. 고작 하나의 보물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 정도라면.......


......나머지까지 다 흡수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7개 전부를 말이다. 시므리는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이 뛰는 것 같은 흥분을 느꼈다. 7개가 다 모이면 티쿤 알람 한 명 분의 성염이다. [에테르]로 만든 이 육체는 자유자재로 변환이 가능, 그 무시무시한 양의 성염도 다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사실상 티쿤 알람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가. 무한의 성염. 완벽한 육체. 무적의 존재다, 키론과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므리는 눈앞의 십이신장들에게 흥미를 잃었다. 새롭게 얻은 힘에 대한 테스트는 충분했다. 이젠 더 이상 누구도 그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보물들을 찾는 것에 집중하자. 삼마에게 하나, 지토에게 하나, 그리고 자신이 하나 가지고 있다. 아직 네이슨이 숨겨둔 보물이 네 개나 남았다. 이 네 개를 먼저 확보한 후, 나머지 두 개도 빼앗아 되찾도록 하자.


나머지 네 개는 어디에 숨겨뒀을까?


몇 년간 상아궁을 샅샅이 뒤져왔지만 찾지 못했던 시므리였다. 어디에 있을까. 네이슨은 대체 이 보물들을 어디에 숨겨뒀을까. 대충 분홍빛 촉수들로 적들을 교란하며 시므리는 지난 시간 동안 수도 없이 해왔던 고민을 새삼 다시 했다. 네이슨, 이 늙은 여우가 이 보물들을 대체 어디 숨겨뒀을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곳이 있었다. 네이슨 집무실 근처의 외궁. 그곳에는 모그리드 전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모아놓은 방이 있다. 광야 밖 상아궁 내에 있던 방을 본떠 만든 곳이었다. 시므리는 좋아하지 않는 장소였다. 그곳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전부 한쪽 눈이 붉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그는 함부로 들락날락할 수 없는 장소였지만 말이다. 그곳은 네이슨이 지칠 때마다 본인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드나드는, 일종의 네이슨만을 위한 쉼터였다.


혹시 거기 있을까? 예전에도 그런 의심을 하고 주의 깊게 살폈지만 건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네이슨과 고멜라의 눈치가 보여 마음껏 뒤지고 다닐 수가 없었지. 다시 한 번 가볼까? 선대왕의 초상화도 그곳에 있으니 [왕의 보물]과 아주 연관이 없는 장소라고도 할 수 없다. 어쩌면 보물들은 그곳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몰랐다.


결심을 굳힌 시므리는 바로 움직였다. 양팔을 휘저어 한층 강한 성염 세례를 퍼부었다. 기겁한 세 십이신장과 부하들이 더 뒤로 물러나는 틈을 타,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목적지인 외궁을 향해 달렸다. 엄청난 속도였다. 새로운 몸이 예전 몸보다 강력한데다 운용하는 성염의 양도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므리가 딱 자리를 뜬 찰나에 지토와 루리아도 현장에 도착했다. 루리아는 상아궁의 지붕을 타고 달리며 이미 멀어져 가고 있는 시므리를 볼 수 있었다. 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시므리 장군......!”


거침없이 달려 나가던 시므리가 이에 움찔하고 반응했다. 궁전 지붕 위에 멈춰 선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이를 놓칠 지토가 아니었다. 검은 아우라를 전신에 두르고 로켓처럼 시므리를 향해 쏘아져 나아갔다. 크크크. 시므리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왼쪽 팔뚝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왼쪽 팔뚝이 갑자기 넓게 펴지더니 방패처럼 단단해졌다. 그 위를 지토는 용서 없이 때렸다.


쿠웅!


시므리가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지토도 뒤로 밀려났다. 시므리는 계속 킥킥댔다.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몸을 만들 때 통각을 없애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신 체내 충격이 어느 정도 가해지는지는 감지할 수 있게 해놓았다. 방금 주먹은 꽤나 매서웠다. 방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왼팔에 꽤 손상이 가해진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시므리는 왼팔을 공중에 몇 번 휘저었다. 새로운 에테르가 생성돼 그의 팔을 덮고, 완벽하게 수복시키고 있었다. 이건 지토도 못할 회복력이었다. 아니, 회복이 아니라 재생에 가까웠다. 하. 지토도 무심코 바람소리를 뱉어냈다. 뭐냐 이건. 어떻게 돼먹은 몸이야?


“이크.”


갑자기 시므리가 뒤를 향해 펄쩍 점프해 지토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좋은 대처였다. 언제부턴가 시므리의 머리 위에서 형성됐던 물방울 감옥이 시므리의 위치가 고정되는 틈을 타 떨어졌기 때문이다. 펑 터져 사방으로 퍼져가는 물방울을 보며 시므리는 히죽였다. 제법이다 공주님. 괜찮은 성염술이야. 당했다면 귀찮을 뻔했어. 눈깔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알긴 아나보군.......


“항복하세요, 시므리 장군!”


지붕 밑까지 쫓아온 루리아는 급하게 생성해낸 역장 위에 서서 시므리를 설득하기 위해 외쳤다.


“그만하세요! 이제 그만! 도대체 뭐 때문에...... 도대체 뭘 위해 그런 모습까지 돼가면서......!”


지금 죽여 버릴까?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루리아의 위아래를 훑으며 시므리는 생각했다. 그는 루리아의 호소 따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 것은, 눈앞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는 지토 때문이었다. 과연. 아브넬을 이긴 전사다웠다. 방금 주먹 한 번 받아본 것뿐인데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다. 일대일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지토 외에도 십이신장들이 많이 있었다. 아직 일대다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왕의 보물]도 하나뿐이니.


시므리는 [왕의 보물]에서 성염을 더욱 많이 흡수해 두 다리를 단단히 강화시켰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선 다음, 전속력으로 외궁을 향해 뛰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지토와 그 일행이 뒤를 쫓아올 것이 분명하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먼저 도착해 장소를 뒤지면 된다. 그 후 뒤따라온 녀석들은 차례차례 요리하고....... 지금의 자신이라면 누구보다도 빠를 테니 충분히 각개격파가 가능할 것이다.


쾌재를 부르며 시므리는 달려 나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시므리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소리 없이. 시므리는 흠칫했다. 낯선 얼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얍실하게 옆으로 길게 찢어진 두 눈에 안경을 쓰고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팔리드 대공 제이였다. 시므리는 조금 놀랐다. 이 녀석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것인가?


언제부터 있었냐고 묻는다면 방금 전부터였다. 늦게 상아궁에 도착한 제이 일행도 시므리가 만든 폭음을 듣고, 전투현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지토와 루리아보다는 조금 늦게 말이다. 지토의 일격을 방어한 시므리가 루리아의 수공술을 피해 뒤로 물러나는 모습. 딱 거기까지 본 제이였다. 직후 제이의 두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온통 분홍빛으로 변해버린 시므리의 모습이었다.


“호렙. 저거 뭘까? 왜 저런 모습이 된 거지?”


“글쎄요?”


어지간한 일에 동요하지 않는 호렙조차 시므리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몰골에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제이의 궁금증에 답해주기 위해 시므리의 현 상태를 분석하는데 충실했다.


“저거 저 녀석 능력...... [에테르] 같은데요? 그 물질이 분홍색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저 녀석 두 눈도 분홍색이고...... 뽑아버린 두 눈을 대체하기 위해.”


“근데 지금은 눈 뿐 아니라 전신이 분홍색인데?”


“그러게요. 설마 온몸을 [에테르]로 대체했을 리는 없고......?”


딱 거기까지 말한 참이었다. 그런데 제이가 돌연 움직였다. 싸우다 말고 빠져나가려는 시므리의 앞으로 말이다. 엄청난 속도였다.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티쿤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제이가 달려 나가던 시므리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제이의 경쾌한 몸놀림에 시므리도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황하진 않았다. 앞을 가로막는다면 치워버리면 그만. 시므리의 어깨에서부터 분홍빛 촉수 두 개가 돋아나 제이를 노리고 뻗어나갔다. 하나는 제이의 머리를, 다른 하나는 제이의 심장을 노리고. 꼬치처럼 꿰어버릴 심산이었다.


제이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오른발로 땅을 한 번 세게 밟았다.


투웅!


제이의 주위에 갑작스레 역장이 생성됐다. 물웅덩이. 수공술이었다. 어? 누구보다도 빨리 제이의 기술을 알아본 루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이가 만들어낸 역장은, 다름 아닌 루리아의 역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루리아의 역장과 똑같은 수공술의 역장이었다.


제이가 만들어낸 물의 역장은 자동으로 솟구쳐 올라 시므리가 뻗은 두 개의 촉수로부터 제이를 보호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촉수와 충돌한 물의 역장은 물보라가 되어 산산이 공기 중에 흩어져버렸는데, 시므리는 요란하게 튀는 그 물보라가 다름 아닌 자신을 덮쳐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시므리의 느낌은 옳았다. 흩어진 물보라는 시므리가 반응하기도 전 한데 뭉쳐 거대한 물방울이 되더니, 시므리를 가두었다. 졸지에 물방울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 시므리는 입을 벌렸지만, 목구멍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차가운 물 뿐이었다.


동시에 제이는 궁전 지붕 위로 동전 한 닢을 던졌다. 금화였다. 의외로 손쉽게 제이가 시므리를 잡자 안심하고 있었던 지토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지금 무슨 짓.......”


퍼엉!!!


대폭발이 일었다. 궁전이 무너졌다. 궁전이 무너지는 정도가 아니라 땅이 푹 꺼졌다. 폭발의 여파로 활짝 입을 벌린 땅은 의외로 상당히 깊고 넓었다. 무너지는 궁전의 잔해를 모조리 다 집어삼켜버릴 정도였다. 그 거대하고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지토도 뒤로 몸을 던져 피해야 했고,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다 물러나야 했다.


아귀처럼 입을 쩍 벌린 땅속으로 물방울에 갇힌 시므리는 속절없이 추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곁에는 같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제이였다. 제이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그의 계산 안이라는 것 같았다.


“아하.”


즐겁다는 듯 제이가 짧게 감탄사를 토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시므리는 옆에서 똑똑히 들었다.


뭐지 이 녀석은?


작가의말

뇌지컬과 피지컬을 모두 가진 남자 셋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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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시므리 (8) +3 20.04.13 173 6 21쪽
177 시므리 (7) +1 20.03.30 135 7 22쪽
176 시므리 (6) +4 20.03.23 162 6 20쪽
175 시므리 (5) 20.03.16 134 7 21쪽
174 시므리 (4) +1 20.03.09 132 7 17쪽
173 시므리 (3) +3 20.03.02 157 10 17쪽
172 시므리 (2) +3 20.01.13 178 9 20쪽
171 시므리 (1) +3 19.12.30 171 8 23쪽
170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5) +3 19.12.23 150 6 17쪽
169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4) +1 19.12.15 157 4 22쪽
168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3) +2 19.12.03 163 10 18쪽
167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2) +4 19.11.18 182 9 18쪽
» 그의 재능은 끝이 없고 (1) +1 19.11.11 179 7 24쪽
165 삼마 (5) +2 19.11.04 177 5 19쪽
164 삼마 (4) +3 19.10.21 175 11 24쪽
163 삼마 (3) +2 19.10.08 186 8 19쪽
162 삼마 (2) +4 19.09.30 196 9 17쪽
161 삼마 (1) +4 19.09.10 199 7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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