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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뢰의사신
작품등록일 :
2016.11.2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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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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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0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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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DUMMY

“...아직 남았잖아.”


“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플루아의 사람들이 있잖아.”


에스메랄다는 커진 눈에 겨우 내가 비치기 시작했다.


“2년이나 떨어지게 되었더라도 늘 너를 걱정하던 카티아가, 너에게, 플루아의 모두에게 미움 받으면서까지 너를 지키려던 집사장이 있잖아!”


“아...”


에스메랄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라고 해서 그걸 깨닫지 못했을 리 없다. 단지 그만큼 알렉스를 믿고 있었기에 주위가 보이지 않았을 뿐이겠지.

단지 이제는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도, 에스메랄다 자신을 위해서도.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면...


“만약 그 사람들만으로 안 된다면...”


“에...?”


“나를 믿어. 내가 너의 마지막 희망이다.”


나를 올려다보는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등으로 느끼며 나는 다시 디 그리스와 마주 섰다. 서툰 내 말이 얼마나 전해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해줄 말도 없다.

이런 건 길 같은 주인공들의 역할이지 나 같은 지나가던 사람1이 맡을 만한 일은 아니니까.

대신 나는 지나가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희망이라... 뭘 보여 줄지 기대했더니 겨우 그런 겁니까. 뭐, 그 보잘 것 없는 것마저 꺾어 버리는 것도 좋은 여흥거리가 되겠지요.”


디 그리스는 조소를 보내며 팔짱을 꼈다. 아직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를 텐데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에스메랄다로부터 흡수한 절망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지.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어떤지 직접 확인해 봐.”


“기꺼이 그러지요.”


내 도발에도 디 그리스는 여유만만이었다. 완전히 얕보고 있구만.


“당신은 도대체...”


뒤 쪽에서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듯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조금 전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한 것 같던 때와는 달랐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야.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어.”


이럴 때 멋있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뭐, 이런 게 나니까 어쩔 수 없지.


“아.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 해둬.”


중요한 걸 까먹을 뻔 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너랑 나 둘만의 비밀이다.”


마지막으로 말을 남기고 벙찐 표정의 에스메랄다를 뒤로 한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셋이겠지.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닌가?-


‘그럴 리가. 그도 그럴 게 너는 나’


-나는 너...로군. 훗.-


설마 내가 먼저 이 말을 꺼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어느새 이런 정신 나간 상황에 적응해 가는 걸지도 모르지.


‘그럼 가볼까?’


-흥. 얼마든지 어울려주마.-


나는 테스카의 대답을 들으며 손을 뻗었다.


“변신.”


뻗은 손으로부터 시작된 검은 불꽃이 나를 좀먹듯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코 싫은 느낌이 아니었다.

괴물들의 앞에서 폭주했던 때처럼 내 몸을 불태우던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포근히 나를 감싸는 느낌에 몸을 맡기자 불꽃은 조용히, 그리고 빈틈없이 나를 집어삼켰다.

영혼이 섞이는 기묘한 느낌 속에 불꽃이 사그라들자 언젠가 보았던 칠흑빛 코트형 갑옷이 나를 뒤덮고 있었다.

나이자 내가 아닌 내가 깊게 숨을 내뱉었다. 투구 너머로 변조된 아직은 낯선 목소리가 잠들어 있던 나를 일깨웠다.


“자. 네 죄를 세어라.”


나는 칠흑의 건틀렛으로 감싸인 손으로 디 그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변해버린 내 모습을 본 디 그리스는 팔짱 낀 자세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큰소리 친 것 치고는 별 볼일 없는 모습이군요. 실망입니다. 그리고...”


디 그리스는 소리 나게 목을 꺾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 죄라니 그런 건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생각 날 때까지 놀아볼까.”


나는 그대로 주먹에 힘을 모았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힘이 움직이는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나가 디 그리스의 몸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디 그리스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온전히 내 주먹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놀랐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군요. 과연 그 작은 몸은 이 속도를 위해서인 거였습니까.”


잠시 멍하게 있던 디 그리스가 뒤늦게 맞은 걸 깨달았다는 듯이 깜짝 놀라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몸엔 아무런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에잇.”


벌레를 쫓는 것처럼 가볍게 휘두른 디 그리스의 팔을 피해서 뒤로 몸을 날리자 디 그리스의 팔이 휘두른 궤적을 따라 바닥과 벽에 균열이 생겨났다.


“하지만 속도만큼 힘은 없는 모양입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상처는커녕 아픈 표정조차 짓지 않는 디 그리스의 모습을 보니 좀 전의 공격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듯 했다.

다시 주먹에 힘을 넣고 디 그리스에게로 몸을 날렸다. 이번엔 오른쪽으로 돌아서 디 그리스의 왼쪽 어깨를 공격했다. 마치 벽을 때린 것처럼 휘두른 주먹을 타고 충격이 돌아왔다.

그 반동을 타서 반격이 오기 전에 거리를 벌렸다. 그 동안에도 디 그리스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절망을 과하게 받아들인 탓에 오히려 몸이 둔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디 그리스는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으니까.

대신 둔해진 만큼 방어력이 오른 건지 웬만한 공격으로는 생채기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느리지만 공격에는 무시 못 할 힘이 담겨 있었다.


“간지럽지도 않은 공격입니다만... 계속 맞고만 있는 것도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디 그리스는 사정거리 밖으로 피한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타격을 입히지 못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으니 언제까지고 여유롭게 있을 수는 없을 테지.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다시 공격하려던 나보다 디 그리스가 한 발 먼저 움직였다.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듯이 한껏 숨을 들이켰다 내뿜었다.

그 숨결엔 불 대신 스산한 빛을 뿌리는 작은 바늘 들이 무수히 섞여 있었다. 어제 저택의 정원에서 나를 습격했던 작은 바늘들과 같은 것이었다. 단지 훨씬 더 빠르고 수가 많았다.

날아오는 바늘의 궤적을 피해서 벽을 향해 달렸다. 발칸 포처럼 쏟아지는 바늘들이 내 뒤를 쫓듯 바닥과 벽에 박혔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바늘을 끌고 달리다 디 그리스의 오른쪽 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지나가는 바늘이 내 몸에 닿기 전에 다시 힘을 모은 주먹이 디 그리스의 다리를 섬광처럼 꿰뚫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느껴진 심상치 않은 풍압에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잠시 후 내가 있던 자리에서 날카로운 촉수가 튀어나와 허공을 찔렀다. 조금만 늦었다면 피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거 참 촐랑촐랑 잘 피하시는군요.”


촉수가 사라진 뒤 나타난 디 그리스의 오른 다리는 역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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