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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엑소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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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즙
그림/삽화
포도즙
작품등록일 :
2017.01.24 20:34
최근연재일 :
2018.09.2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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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1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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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03 - 플라벨룸(19)

엑소시즘(Exorcism)




DUMMY

2016년 10월 8일

중간 평가 1일 전.


다들 내일 있을 중간 평가 준비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 듯했지만, 태양은 준비할 게 딱히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한가로이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중간 평가는 세 종류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첫 번째는 필기시험.

태양은 존 교수의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았지만, 솔직히 필기시험에 대한 걱정은 별로 없었다.

학창시절부터 공부엔 재능이 꽤 있고 특히 벼락치기 능력이 탁월해서 민호에게 도움을 받아 미리 외워두었다.


두 번째, 체력 시험.

체력 시험은 무엇이 나올지 모르기에 사실 지금 당장 대비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휴식을 취하는 게 내일 있을 평가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세 번째, 성력시험.

말 그대로 성력 발현에 유무였다.

세아의 도움으로 성력 발현에 성공한 태양은 그 뒤로부터 꽤 능숙하게 성력 발현이 가능했다. 그래서 이 부분도 걱정이 없었다. 역시 어떤 일이든 처음이 힘든 법이랄까.


방안에는 태양밖에 없었기에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조용했다.

매일 시끄럽던 방안이 이토록 조용했던 게 언제인지, 민호는 청소 당번이라 숙소 화장실 청소 중이었고, 히데오는 내일 있을 필기시험 때문에 강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치오는 어디 갔는지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도서관이라도 갈까······.'


태양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잉여스러움에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이곳이 하얀 지옥이라 불리는 플라벨룸이라서 그런 걸까?

도서관이라도 갈까 싶었지만, 보안구역이 아니고서야 읽을 만한 책도 없으니 관두기로 했다.


‘그냥 잠이나 자자.’


그런데 그 찰나에 갑자기 히데오가 방문을 거칠게 열며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큰일 났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고르는 걸 보니 여간 큰일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히데오는 원체 사소한 일에도 야단법석을 치는 사람이었기에 솔직히 태양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갑자기 난 큰소리에 짜증이 올라왔을 뿐.


“아, 뭐가.”


“윌리엄스가 사고를 칠 거 같아!”


히데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엄스라······확실히 그놈이 관련되어 있다면 대수로운 일일 수도 있다.


“무슨 뜻이야.”


“지금 윌리엄스가 치오를 인질로 세아를 불렀어!”


“엥?”


“내가 여자 숙소에 친한 애가 있는 데, 걔가 그러더라고!”


그제야 태양은 저번에 윌리엄스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분명 세아에게 복수하는 걸 도와 달라 했었지?

솔직히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었고 세아도 별일 없이 지내고 있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결국, 윌리엄스는 그 어린애 같은 짓을 시행한 것인가. 그것도 치오를 강제로 끌어들여서 말이다.

참으로 치졸한 방법이었다.


“어떡하지?!”


“뭐 별일 있겠냐? 자기도 강제 퇴소당하지 않으려면 심한 짓 못 하겠지.”


태양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히데오가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윌리엄스가 얼마나 미친놈인데!”


그건 인정. 생각해보니 윌리엄스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긴 할 거다. 그것도 벼르고 벼르던 상태였고.


그렇지만 태양은 역시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남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상대는 이번 기수 최고 실력자 세아였으니까.

분명 또 첫날처럼 엎어치기나 당하지 않을까.


무심한 태양과는 반대로 히데오는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이 꽤 거슬렸는지, 태양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걱정되면 가서 도와주던가.”


“야! 나 혼자는 무리라고!”


“그럼 교관이나 조교한테 얘기하면 되잖아!”


“그게 다들 어디 갔는지 안 보여. 내일 중간평가 때문에 회의라도 들어갔나 봐! 어쩌지?”


정말 문제 일으키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아마 윌리엄스도 이것을 알기에 오늘까지 기다린 거겠지.


“몰라. 난 잘 거니까, 알아서 해.”


태양은 관심 끄기로 정하고 반대로 돌아누웠다.

남의 일에 오지랖 떨며 간섭할 만큼 자신은 한가하지 않으니까···는 솔직히 한가하긴 하지만.


“야! 태양!”


히데오의 간절한 부름에도 태양은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


근데 생각해보니, 쉽사리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아의 실력을 알고 있는 윌리엄스가 아무런 생각 없이 세아를 불러내진 않았을 것이고 치오마저 이용한 걸 보면 이번에 세아에게 제대로 앙갚음을 하기 위해 이를 악 물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세아라는 여자는 실력은 분명 뛰어나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술한 구석이······.


‘아, 짜증 나.'


신경 안 쓰기로 했는데, 계속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댔다.

덕분에 잠을 청하기는 글러 버렸다.


“아씨, 그래서 어디로 갔는데!”



태양은 히데오가 알려준 곳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숙소 옆 낡은 건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커다란 강당이었다.


‘아니,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


그깟 자존심 때문에 보복하려는 윌리엄스나 그런 협박에 응해주는 세아나 전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자신만 피곤하게 되지 않았는가.


‘저긴가?'


태양의 눈앞에 낡은 건물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음침한 분위기. 마치 전쟁의 상흔처럼 성한 곳이 없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손으로 툭 건들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래도 문은 제법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태양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히데오는 만일을 대비해 교관을 찾으러 갔다.

그래서 교관이 올 때까지 상황을 끌까도 했지만, 그들이 오면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 세아랑 치오만 데리고 나오자 하는 심산으로 문을 열었다.


끼익-


낡은 문이 찢어질 듯한 굉음을 내며 열렸다.

그 요란스러운 소리 덕분에 안쪽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등장한 태양에게 집중되었다.


“뭐야, 너냐?”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태양을 반겨주었다.


“······.”


윌리엄스는 뻥 뚫린 넓은 강당 끝에 있는 단상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강당 중앙에 세아가 특유의 도도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런 세아를 윌리엄스의 무리로 보이는 남자 다섯 명이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재밌는 건, 하나같이 발정 난 짐승처럼 음흉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분명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태양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는 윌리엄스의 말을 무시하며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무리 중 한 명이 치오를 위협 하듯이 뒤에서 안고 있었다.


“형······.”


치오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황은 딱히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예상하기도 했고.

세아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이기에 치오를 인질로 삼고, 수적 우세함을 이용해 세아를 궁지로 몰아놓고 있는 것이리라.


“진짜 한심하다.”


태양은 속에 있던 솔직한 심정을 내뱉었다.


“그 말은 너 따위에게 어울리는 단어야. 한심하게 위아래도 모르고 깝죽거리는 것들 말이야. 그래서 내가 친히 알려주는 거다.”


윌리엄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세아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네년이 제일 한심해. 처음부터 나한테 붙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윌리엄스의 시선이 세아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대사.


“뭐해, 안 벗고?”


태양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미친놈.'


태양은 윌리엄스의 저 대사가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플라벨룸. 윌리엄스라도 규정을 위배하면서까지 그녀에게 해를 가할 순 없었으니, 머리를 싸매 고안해낸 방법이 고작 이거였다.

어린아이를 인질 삼아, 세아에게 여성이 느낄 수치심을 주기로. 물리적 마찰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주변에 있는 짐승 같은 남자들은 그게 즐거워서 저런 더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였다.


결국, 저런 방식으로라도 상대를 깔아뭉개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건가?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세아를 보며, 받은 것을 배로 돌려줬다며 자위하는 건가?

자기를 어떻게든 치켜세우려 발버둥을 치는 저들의 모습이, 태양은 참으로 역겹다고 생각했다.


저런 것들이 엑소시스트가 되기 위해 이곳에 와 있다니···.

솔직히 자신도 떳떳하진 않지만, 저들은 진짜 상상 초월이었다.

강오의 말대로 사람 모이는 곳은 다 똑같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세아는 여전히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얼음장 같은 표정이 더욱더 시려 보였다.


태양은 세아도 윌리엄스의 속내 정도는 꿰뚫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의 실력은 교육생 중에 단연 탑. 저 차가운 표정 속에 분명 치오를 안전하게 구할 방법과 타이밍을 재고 있음이 분명했다.


‘뭐?!'


그런데 태양의 예상과는 반대로 갑자기 세아가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 태양은 얼굴을 구기며 세아에게 한걸음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옷자락을 매만지던 그녀의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너 뭐하냐?”


“조건만 이행하면, 치오를 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리고 더는 어떤 갈등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저와 약속했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태양은 어이가 없었다.


“너 제정신이냐?”


“네. 그게 가장 평화적인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미···.”


태양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간신히 삼켰다.

이게 어떻게 평화적인 해결인가.

세아에게 평화적이란 그저 폭력과 갈등만 없으면 된다는 것인가?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 해결 방안은, 세아 본인이 느낄 수치심이 아예 배제되어 있지 않은가.


“너는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지금?”


“네.”


단호하게 대답한 세아의 말투에서 태양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정말 본인의 입장 같은 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여태껏 태양은 세아가 여유가 있기에 남을 열정적으로 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여자는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은 그냥 뒷전이었고 오직 남을 위한 행동만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니까, 지금 같은 경우에 윌리엄스의 조건은 더없이 평화로운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던 거였다. 자신의 처지는 상관 없으니까.


“너 진짜······.”


정말 이건 순진하고 멍청하다는 걸 넘어서 정신병이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뭐 희생? 아가페적인 뭐 그런 건가?

태양으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원래 이상한 여자였지만, 이젠 더욱 이상해 보였다.

심지어 그녀의 바보스러운 점에 화가 치솟았다.


그런데 그런 세아에게 화가 난 것보다 그것을 이용해 먹는 것들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참는 것도 이젠 한계였다.


태양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한방에 저것들을 쓰러뜨리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럴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치오야!”


태양의 목소리가 강당 안에 울리자, 치오가 푹 숙인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도 네가 좋아하는 누나가 저것들 앞에서 창피당하는 꼴은 보기 싫지?”


치오는 입술을 깨물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네!”


목소리에 울먹임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 도움이 필요해.”


치오는 태양의 의중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길어지지 않았다.

치오는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남자답게 외쳤다.


“자선(Caritas)!”


윌리엄스를 포함한 저들은 몰랐다.

그때 그 사단이 치오의 짓이라는 걸.


치오의 시동어가 울리자, 치오를 중심으로 노란 빛무리가 순식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빛무리의 정체는 치오의 노랑 성력.

성력은 주변 공간을 가득 메우며 강당 전체를 반원 형태로 에워싸는 성역을 구축했다.


그리고 곧 치오의 미숙함으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한 노랑 성력이 성역 안에 있는 모두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순식간에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감각에 윌리엄스 무리는 일제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성력의 힘 앞에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이 감각 그때 그 감각이잖아! 설마 이 꼬맹이가!'


윌리엄스는 매초 마다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는 노랑 성력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젠···젠장!'


결국, 윌리엄스도 무릎을 바닥에 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정신만은 유지하려 이를 악물며 안간힘을 썼다.


그 시각 당연히 태양도 묵직한 느낌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때와 같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수월했다.

한번 느껴봤기에 몸이 적응이라도 한 것일까. 왠지 익숙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저 손과 발에 모래 마대를 찬 것 같은 느낌 정도.

매일 체력훈련을 하는 태양에게 그 정도 무게감은 전혀 방해조차 되지 않았다.


태양은 주변을 살폈다.

시전자인 치오는 역시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세아는 조금 힘겨워 보였지만, 제대로 서 있었다.


‘자, 그럼.'


치오와 세아가 괜찮은 걸 확인한 태양은 그대로 윌리엄스를 향해 달렸다.


“헉?!”


태양이 가까워지는 걸 본 윌리엄스는 경악했다.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이 이질적인 기운 속에서 홀로 움직이는 태양.

윌리엄스는 직접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어, 어떻게···움직이는···!”


퍽!


윌리엄스가 힘겹게 뱉는 느린 대사보다 태양의 발길질이 훨씬 빨랐다.


“컥, 컥!”


복부를 세게 걷어차인 윌리엄스는 고통스러운 기침을 힘겹게 내뱉었다.

가뜩이나 치오의 성역 때문에 호흡하기 힘든 마당에 타격에 의한 기침까지 동반하니 그 괴로움은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좀 속이 후련하네.”


태양은 간만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03 - 플라벨룸(19)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다음 화는 내일 바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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