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 재회(再回). (5)
그 시각. 혈지강은 무림맹 회의에 참석해서 남궁천선을 변호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궁천선 대주에 대한 처벌을 그가 파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으면 합니다.”
긴 설명과 함께 발언을 마친 혈지강은 회장에 참석한 인물들을 둘러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상석에 앉은 무림맹주 제갈량을 필두로 17명의 인사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섣불리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짧은 침묵 뒤에 먼저 입을 연 것은 검왕 지천득이다.
“난 그 의견에 찬성이오.”
이미 혈지강으로부터 부탁을 받기도 했거니와, 그것을 제하더라도 그는 찬성을 표했을 것이다.
“음......!”
검왕이 먼저 포문을 열었음에도 다른 이들은 아직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으니 상황을 지켜보던 무림맹주 제갈량이 나섰다.
“안건을 결정하기에 앞서 왕요와 승살 초우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공추 공, 왕요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혈지강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왕요는 요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요괴들을 뜻하며, 직접 겪어본 괴의께서는 왕요가 한 마리만 나타나도 인류의 존망을 걸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초아에게서 왕요의 영이 나타났을 때 혈지강은 기절한 상태였다. 그래서 괴의와 녹림도왕, 초우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불과했으나 세 사람 모두 헛소리를 할 사람들이 아님은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무림맹 인사들은 좀처럼 그것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전에도 말을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소. 일 등급 요괴가 한 마리만 나타나도 감당하기가 어렵소. 그런데 일 등급 요괴가 겁을 집어먹을 정도의 요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하단 말이오?”
“맞소.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오.”
“나도 그렇소. 너무 과장된 것 아니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라면 괴의에 대해서 안다. 녹림도왕에 대해서도 알기에 그들이 근거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님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믿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기도 했거니와, 사실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암울한 일이기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나는 공추 공의 말을 믿소.”
검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하고서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초우 공이 떠나기 전에 그와 대련을 하였소.”
“그게 참말입니까?”
“그렇소.”
검왕은 세인들의 입에서 차기 천하제일인으로 손꼽히는 무인이다. 최근 초우의 소문이 돌면서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둘 중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그것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내심 궁금해 하던 부분이라, 검왕이 초우와 대련을 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한 사람, 제갈량은 눈살을 찌푸리고 검왕을 책망했다.
“검왕 공. 자꾸 이러시깁니까? 제발 함부로 행동하지 마시라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벼운 대련이었으니 너무 책잡지 마시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소.”
제갈량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왕을 잠시 흘겨보다가 다시 본론으로 말을 돌렸다.
“그래서 초우의 무공수위는 어떻습니까?”
“모르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와 대결하며 나는 벽을 뛰어넘었소.”
장내가 술렁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검왕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안다. 지금 당장은 최고가 아니더라도 그는 훗날 천하제일인의 자리도 노림직한 초고수다. 그런 이가 벽을 깨고 한 단 계 더 성장하였다니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큰 복이요, 무인으로서는 놀랍고 부러운 일이다.
허나 각자가 몸담고 있는 세력의 입장에서는 검왕에 대한 부담이 커졌음을 의미하기에 다들 심경이 복잡해졌다. 성격이 급한 하북팽가의 가주대리 팽도우가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나섰다.
“경지에 이르신 것을 경하 드립니다.”
“고맙소.”
“실례가 안 된다면 무엇을 얻으셨는지 저희에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같은 무인으로서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남의 무공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칼부림까지 날 수 있는 무례한 짓이다. 그러나 팽도우는 지금 한 가문의 대표이며, 다른 대표들의 뜻을 대변하고 있기에 과감하게 물었다.
검왕은 어차피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공간에 대한 심득을 보다 이해하게 되었소.”
그러고는 아예 손가락에 참공의 힘을 만들어 보여주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간을 가르는 능력은 언뜻 보기에는 엄청난 능력처럼 보이지만, 내로라하는 고수들의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고급기술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검왕이 보인 능력은 까다로운 기술 정도를 넘어서 아예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당장에 그가 가진 능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몰라도, 만약 몸 전체에 참공의 힘을 두를 수 있게 된다면 가히 천하무적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터. 검왕이 이렇게 당당하게 성취를 드러낸 것도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충격적인 이야기는 그 뒤에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초우 공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였소.”
“예, 예?”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장내가 또 한 번 술렁였다. 모두들 참공의 힘을 보고서 검왕의 무력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가 단 한 수에 졌다니! 무에 대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검왕의 입으로 직접 들은 말이니 거짓으로 치부할 수도 없어 당혹스럽기만 하다.
“내가 공추 공의 의견에 찬성하는 데에는 초우 공의 영향도 있소. 그는 절대 적으로 돌리면 안 되는 자요.”
실력 있는 고수가 문제를 일으키면 피해는 생기겠지만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초우는 무림맹 전체의 전력으로도 상대가 불가능한 괴물이다. 그를 적으로 돌린다면 왕요 한 마리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장내의 분위기가 침중해졌다. 왕요의 존재만으로도 감당하가가 벅찬데 초우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니 앞날이 깜깜해진 기분이었다.
“자, 다들 그리 죽을상을 할 건 없소. 내가 보았을 때 초우 공은 악인이라 판단되지도 않으며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킬 사람도 아니오.”
“그걸 어찌 아십니까?”
검왕의 말에 팽도우가 반문했다. 초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 봐야 기껏해야 혈지강 정도인데, 그마저도 반년도 안 되는 짧은 인연이다. 그러니 그의 의문은 지극히 타당했다.
검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여기계신 공추 공께 초우 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소. 그리고 직접 만나기도 했지.”
“그것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소. 허나 공추 공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소.”
“그게 뭡니까?”
“바로 초우 공의 가족이오.”
“가족......? 그는 외지인이 아니었습니까?”
팽도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듣기로 초우는 외지에서 왔으며, 황제국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족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팽도우 가주대리, 초우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않소?”
“그게 무슨......?”
“요괴의 환란으로 실종된 사람들이 많지. 그중 초씨 성을 가진 유명한 자가 하나 있지 않소.”
팽도우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어서였다.
“아니, 그럼......!”
“그렇소. 정확한 것은 지켜봐야 알겠지만 만가왕 초석주가 초우 공의 가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오. 이미 공추 공께서 정보부에 확인을 한 사항이오. 그렇지 않소, 정보부장?”
검왕의 시선을 받은 정보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현재 승살 초우는 만가왕을 만나기 위해 서장으로 떠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사항으로 보면 두 사람이 가족관계일 가능성은 거의 확실합니다.”
정보부장은 어지간해서는 단언하지 않는다. 그는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고, 정보란 확실치 않으며 유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확실하다는 말을 꺼냈다면 말 그대로 틀릴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제야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만가왕은 평판이 높은 사람이다. 그것은 단순히 큰 상단을 꾸리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고아들을 지원하거나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등의 많은 선행을 베풀기 때문이다. 그가 만가 ‘왕’ 이라고 불리는 것도 민심(民心) 을 얻었기 때문이며, 황제에게 큰 신임을 얻어 9경(九卿)에 버금가는 지위를 하사받기까지 했다. 초우가 그의 가족이라면 어느 정도 믿음이 갔다.
게다가 초우는 오랫동안 가족을 잊지 않고 찾아다닌 사람이다. 그 정도로 정이 깊은 사람이라면 어지간해서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로군요.”
제갈량의 말에 다들 한시름 놓인 표정으로 공감했다. 그리고 검왕은 그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승살 초우는 위험분자로 관리할 대상이 아니라 아군으로서 친분을 다져야할 상대요. 그 점을 유의해주시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의는 그로부터 약 한 시진 정도 더 진행되었고, 대체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남궁천선은 현무대주의 자리에서 파직되는 것을 면하는 대신 3년간 보수를 반으로 차감하는 선에서 징계를 축소하였다. 일의 원흉인 남궁자수 역시 현무대에서 퇴출되는 선에서 끝냈으며, 초우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왕요에 대해서는 아직 뾰족한 수가 없으니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는데, 그 일로 제갈량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검왕과 혈지강을 따로 불러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승살 초우라면 왕요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무인들의 수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지만, 벽을 넘은 검왕보다 강한 무인은 무림 전체를 통틀어서 열 명이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초우는 그를 단 한 수에 제압했다고 하니 얼마나 강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만약 그가 왕요와 맞설 수 없다고 하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건......”
혈지강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했다. 무림맹주 제갈량은 특이한 사람이다. 제갈세가의 가주자리를 두고서도 순순히 양보했다고 하니 물욕이나 권력욕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서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에 손익을 따지지 않는 성인(聖人)이다. 그가 무림맹주로 추대된 것도 그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지난 10년간 무림맹주로서 활동하며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바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없음에도 다른 이들의 경계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다. 그렇기에 대답하기에 앞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맹주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 건지 듣고 싶습니다.”
제갈량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 쯤 무림맹에서 왕처럼 군림했을 지도 모르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세상의 안녕에 관련된 것들뿐이며, 손해를 입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감사인사 한마디면 만족해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 오로지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간다? 그건 한 평생을 고행에 매진하는 승려들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승살 초우라면 그 자리에 충분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갈량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기에 혈지강이 뭐라고 하려는데, 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물론, 공추 공께서 하신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믿어달라는 것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그러했듯이 저는 앞으로도 정의를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혈지강은 납득하지 못했지만 더는 추궁하지 않고 제갈량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초우가 말하길, 왕요 한 마리를 상대로 하면 열 번 중에 서너 번의 승리를 따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희망적인 소식이로군요.”
“그리고 왕요는 다른 요괴들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사람수준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 합니다. 게다가 사이가 좋지 않은 건지 서로를 등한시한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좋은 소식입니다.”
제갈량은 미소를 지었다. 승산이 3할 이상이라면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5할 이상으로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왕요가 나타난다 해도 각개격파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는 혈지강에게 손을 붙잡고 말했다.
“한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승살 대협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저도 함께 대성에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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