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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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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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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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13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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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지 많은 나무에(1)

DUMMY

바늘.

아주 뾰족한 바늘.

빛을 반사해 첨예한 끝이 반짝일 정도로 아주 잘 갈린 바늘.


그런 바늘이 조심조심 천조각 위아래를 오고갔다.


꽁지에 붉은 실을 묶고서 위, 아래로, 위, 아래로. 한번 왕복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빨간 점이 어두운 베이지 색의 얇은 천조각 위로 덧씌워졌다.


빨간색 말고도 노란색 파란색 등등 형형색색의 불규칙한 색조각들이 천조각 위에 원형의 고리모양을 만들다 말았다. 반쯤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알록달록한 색조각의 고리.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전혀 상관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깊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 내 눈앞에서 얼렁거리는 걸까. 내가 정령술사인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 문양이 왜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고 왜 옷에 달아놓으려고 하는 건지도 난 모르겠다.


그걸 왜 내 방에서 하는 건지는 더더욱 모르겠고!


"레이크. 창문 가리지마요. 안 보이잖아요..."


내 나름대로 눈치를 주겠다고 지켜보고 있는 거였는데 레샤는 빛 가리지 말라고 성을 내었다.

침대 위에 앉아있으니 내 그림자가 창문의 빛을 가린다는 거다.


나는 가끔 어떤 의문이 들었다.

내가 화를 내도 왜 사람들은 무서워하지 않는 걸까?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과거의 영웅들은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하는데 나는 영웅이 아닌 건 둘째 치고 소리를 쳐도 꿈쩍을 안 하니 이건 뭔가 비밀이 숨어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혹시 그에 관련된 책을 구해서 읽는다면 나도 좀 나아질 수 있을까...


음...


"레이크. 안 보인다니까요...!"


레샤가 또 가리지 말라며 타박을 주었다.

그래. 내가 그렇지 뭐.


거 말은 안 보인다 해놓고선 손은 잘만 움직이는데 왜 자꾸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속마음과 달리 나는 군말 없이 몸을 기울여 빛을 내주었다.

혹여 바늘에 손가락이라도 한 번 찔렸다가는 내 무릎이 작살날 거 같았다.


그런 김에 생각도 좀 긍정적으로 바꿔보기로 했다.

자수질을 내 방에서 할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띠링! 하고 머릿속을 스쳐 지난 예감이 내 방이 자수질 하기 좋다고 예언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면 그 불덩이 물덩이 녀석들이 '이쪽이 좋은 거 같아요 이리로 가죠.' 할 수도 있는 거고.


진짜 그럴 수도 있는 걸까.


"야, 레샤."


"...뭔가요?"


여전히 자수에 집중한 레샤는 조금 뒤늦게 대꾸했다.


"너 내 방에서 그걸 왜 하는 거냐?"


나는 불쑥, 레샤에게 물었다.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술사는 자기가 정령술사라는 걸 표시 해야 합니다."


레샤는 별 걸 다 묻는 듯 의아해하다가 이내 순순히 알려주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부분은 아니었다.


네가 왜 자수를 하는지는 안 궁금하다고 왜 '여기서' 자수를 하는지를 말하라고.

그런데 듣고 보니 그것도 궁금해지긴 했다.


"그걸 왜 표시해야 되는데?"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근데 다 그렇잖아요. 사제님이라던가... 어... 사제님이나... 음... 사제님은... 이요."


그러고 보면 사제도 사제라는 걸 온 몸으로 표현하고 다니기는 하지. 정령술사도 같은 이유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이하고 신기한 경우는 아니었다.


"아니 근데 그거 말고."


내가 정말 물어보려고 했던 건 따로 있었다.


"왜 여기서 하는 거냐고."


나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도록 다시 물었다.


"여기서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레샤는 뭔가 미심쩍게 굴었다.


"안 될 이유보단 될 이유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말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레샤는 등을 돌려 자기가 입고 있던 로브의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전에 찢어졌던 모자는 잘 붙어있는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걸까.


"그게 왜. 모자 잘 붙어있네."


"그 밑이요, 밑...!"


밑에?


아아, 그 애 말대로 로브의 모자와 등 부분이 연결되는 부분에 뭔가 이상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정령술사의 문양처럼 알록달록하긴 한데, 솜씨도 고약하고, 촘촘히 짜여있는 게 아니라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마구잡이로 바느질이 되어있었다.


"야우라가 잠깐 달라고 해서 줬더니 이 모양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새로 짜가지고 위에 덧대려고 하는 건데..."


"...잘 했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입고 다닙니까...? 그렇게 좋으면 레이크 옷도 이렇게 만들어줘요...?!"


"내가 언제 좋다고 했냐."


"잘 했다면서요...! 똑같이 만들어준다고요...!"


"잘은 했는데 내 취향은 아닌 거 같아."


"거봐요, 놀리는 거 맞잖아요...!"


레샤가 내 무릎을 때리러 올까 말까, 고민할 찰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터졌다.


"아아아앗!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어!"


안의 레샤를 발견한 야우라가 소리쳤다.


"힉...! 야우라...!"


헐레벌떡 놀란 레샤는 야우라를 피해 도망가려고 했지만 이 좁은 방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고 순식간에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야우라는 레샤를 안듯이 붙잡아 여전히 우렁차게 말했다.


"내가 해준다니까!"


"야우라는 이상하게 만들어 놓잖아요...!"


벌써 절반은 포기한 레샤는 몸의 저항은 포기한 채 축 늘어져 붙잡혀 있었다.


"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해!"


"야우라가 해놓은 걸 한 번 봐요."


"뭐가 어때서."


야우라는 레샤를 놓고 어깨를 잡아 그 애의 등을 보았다. 음... 하고 깊은 고민의 소릴 내던 야우라는 반짝 결론이 난 듯. 그 문양을, 즉 레샤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괜찮네에! 꽤 괜찮지 않아?"


"이번엔 저기 있는 걸 봐요."


레샤는 바닥에 떨어진 천조각을 가리켰다. 야우라는 저건 뭔데? 하면서도 순순히 그 천조각을 집어 들여다보았다.


음...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 고민했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 그 애가 내놓은 결과는.


"이거. 견본이지? 이렇게 따라 만드세요... 하는 그거."


도피에 가까운 결론이었다.


"제가 만든 건데요...?"


당연한 레샤의 대꾸에 흠칫 몸을 떤 야우라는 침묵을 지켰다.


"나, 나도 과정이 그래서 그렇지 완성되면 이렇게 될 거야!"


글쎄 내가 보기엔 야우라가 만든 자수는 완성과는 너무나 먼 곳에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그럼 제 옷 말고 다른 천조각에다 해봐요. 그게 잘 완성되면 그걸 기워서 다니겠습니다."


레샤가 말했다.


"왜 날 못 믿어?"


야우라는 서운한 듯 말했다.


"야우라를 못 믿는 게 아니라아..."


레샤는 한 숨처럼 깊은 숨을 쉬었다.


"왜 날 못 믿냐고! 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려고 한 건데! 내가 꼭 해주고 싶었단 말이야! 해보고 싶기도 했고!"


야우라는 레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 그러니까...! 이 옷은 제가 입고 다녀야하니끄아...! 야우라는 따로 다른 천에 만들라구욧...!"


저보다 덩치가 큰 야우라가 매달리는 통에 레샤는 괴성을 지르며 버텨냈다.


"그럼 내가 완성하면 내 걸로 하고 다니는 거 맞지? 으응?!"


"제대로 만들면요...! 이것도 나름 모양이 중요하다고요. 초급술사는 문양도 맘대로 변형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레샤는 애마냥 자기한테 조르는 야우라를 어찌어찌 달래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저 견본대로만 만들면 차준다는 거지?!"


"견본이 아니라 제 거라니까요..."


"차준다는 거지이이이?!"


"아이 알았어요... 알았다구욕...!"


레샤는 끊임없이 엉겨 붙는 야우라를 밀어냈다.

한동안 끈질기게 버티던 야우라는 마지못해 레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그게 굉장히 충격적이라는 듯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 요즘 나한테 다들 너무 차가워!"


야우라는 무언가에 맞서듯 소리쳤다.


"차갑긴 뭘 차가워 똑같고만."


내가 보기엔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게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래. 웬 비실해 보이는 마법사 녀석이 상자 때문에 낑낑대고 있기에 도와주려고 했더니. 갑자기 이건 비싼 거라고 막 횡설수설하잖아!"


"...진짜 비싼 거니까 그런 거겠지."


"그럼 내가 뭐 훔쳐가기라도 한다는 거야?!"


훔치진 않겠지만...


"부숴먹을까봐 그런 거 아냐?"


"뭐어?!"


나에게 달려들 태세를 보이던 야우라는 달려들지는 않고 나에게 손가락만을 뻗어 삿대질을 했다.


"레이크 너도 똑같아! 너도 저번에 나만 빼놓고 너희들끼리 놀러갔지!"


"놀러가긴 어딜 놀러가."


그런 행복한 기억이 없는데.


"며칠 전에 놀러갔잖아! 가서 약초 캐고 놀았다며!"


"그게 무슨 놀러간 거야! 내가 했던 말 뭘로 들었어!"


"어쨌든 나만 왕따 시키고 갔잖아! 나 서운해!"


"그게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가서 흙바닥에 구르던가! 똑같은 기분일걸?!"


"너어... 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가서 고생만 했다고 했잖아!"


"나랑도 놀러가! 나도 데려가라고!"


야우라는 아예 내 침대 위에 발랑 누워 크게 양팔과 다리를 펼쳤다. 먼저 앉아있던 나는 괜스레 과격히 움직이는 팔과 다리에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당일에는 조용하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에 변덕이 죽 끓는 것보다 더 심하다.

이럴 때는 피난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좋아. 난 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기지개를 폈다.


"놀러 가는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야우라는 반짝 웃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니. 훈련소."


"아 왜에에에!"


야우라가 도망가려는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뿌리치고 가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가야 돼... 가야 되니까 가는 거지... 안 그러냐...!"


나는 힘으로 손목을 잡아 빼며 말했다.


"하루쯤은 빼먹고 나랑 놀아줘도 괜찮잖아...!"


야우라도 몸무게로 버티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이러지 말고...! 레샤한테 자수라도 배우지...?!"


"그런 건 안 배워도 할 수 있어...!"


"그럼 그거나 하라고...!"


"레이크 너...! 나랑 노는 게 그렇게 싫어엇...?!"


어후, 정말 이러다가는 끝이 없을 거 같았다.


"아 그래! 가자!"


나는 홧김에 소리쳤다.


"진짜?!"


동시에 야우라는 내 손을 확 놓아버렸다. 그 덕에 힘이 풀려버린 나는 그대로 벽까지 달려 나가 충돌했다. 어떻게 손으로 벽을 짚어 막기는 했지만 이마는 부딪혔고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야!"


"진짜 가는 거지?"


내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야우라는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얘는 참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정말, 정말, 정말이지 너무 믿고 있었다.


"거봐 레이크 너도 이 누나랑 놀고 싶었던 거잖아. 헤헤."


거기다 또 뱉을 수 없는 내 약한 심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속았어. 이게 뭐야."


야우라가 말했다.


그 애는 언젠가 만들어 두었던 판잣집 그늘 아래 누워 공허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이야기의 끝이 모험의 보상인 보물은 여태까지의 여정에서 배운 너희의 경험이야, 라는 문구를 읽은 사람처럼 세상 다 부질없다는 한숨이 또 다시 흘러나왔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레이크를 믿었습니까?"


여기까지 자수를 가져온 레샤는 야우라의 옆에 앉아 부지런히 바느질을 했다.


"왜 내가 사기를 친거마냥 얘기를 하는 거야?"


나는 옮겨야할 쓰레기들을 수레에 마저 옮겨 담았다.


말했던 대로 훈련소에 온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안 야우라는 이래로 저 꼴로 풀이 죽어서는 뭐가 이렇고 저게 어떻고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


야우라가 클로에에게 자유 시간을 받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훈련소 간다고 하고서 훈련소 왔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전처럼 스렌한테 놀러가던지."


"그런 할아범탱이 뭐가 재밌다고."


"그 말 들으면 꽤 충격 받을 거 같은데."


안 그런 듯 보여도 스렌은 야우라를 챙겼고 가능하면 그 변덕도 맞춰주려고 했다.

가능하면 말이다.


"우리 이런 거 말고 재밌는 거 하자, 재밌는 거."


야우라는 누운 자세 그대로 꼼짝 않고 칭얼거렸다.


"재미라니. 레이크한테 그런 걸 바랐던 겁니까? 레이크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사람이라고요."


그리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샤도 툭툭 한 마다씩 보태었다.


"내가 왜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사람이야."


내 꿈이 광대도 아니고 재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거에 자부심 가지고 싶지도 않았고. 이왕이면 웃긴 사람보다는 믿음직한 사람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까 언급한 스렌이 나보다 더 재미없는 사람이지 않겠느냐고.


사람은 따지고 드는데 레샤는 대꾸 없이 자수질만 계속했다. 그래 그 애처럼 우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했다.

레샤가 자수질을 하듯 나는 쓰레기를 치우고 야우라는...


"우리 이러지 말고 그 카페라는 곳 다시 가볼까? 그 때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저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거... 야우라가 사는 겁니까..?"


간만에 레샤가 도움이 되는 말을 했다.


"나 돈 안 가져왔는데?"


야우라는 벌떡 일어나 앉아 아주 중대한 사실을 고백했다.


"그치만 클로에가 요새 용돈을 잘 안 준단 말이야."


그게 변명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야우라는 황급히 그렇게 덧붙였다.


"그럼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레샤는 담담한 태도로 야우라를 계속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제 보면 자수질에 집중하느라 저가 그토록 매섭게 몰아붙인다는 것도 잘 모르는 거 같았다


"나한테 자신감을 빼면 뭐가 남는데!"


궁지에 물리면 쥐도 문다고 야우라가 헛소리를 했다.

뭐가 남느냐, 라. 뻔뻔함이 남겠지.

나는 그 사실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레이크! 나 돈 좀 빌려줘!"


"나는 이 수레 좀 비우고 올게."


"아앗...! 진짜 너무해!"


너무하시거나 말거나 나는 수레를 끌어 그 자리를 떴다.

그 애들이 딱히 따라오지는 않았다. 덕분에 나는 조용히 홀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치워놓은 쓰레기는 어느덧 또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와 내가 이걸 이만큼이나 했구나 하고 놀랍기도 했고 그래도 이만큼이나 남는구나 하고 질리기도 했다. 또 날짜가 지난만큼 하루에 치워야하는 쓰레기의 양도 늘어서 이제는 예전처럼 가볍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쌓여가는 구나.

수레의 쓰레기들을 부어내면서 나는 새삼 그 사실을 다시 환기했다.

언젠가 이 곳의 쓰레기는 전부 치워질... 아니 정말 어딘가로 치워져 사라지진 않고 가운데를 비운 모양새로 모두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 때는 또...


"아 레이크. 여기 있었군."


내 상념을 깬 건 건조한 목소리였다.

스우렌 우나가 찾아온 것이다.


"어어. 왜...? 무슨 일 있어?"


여기서 만나는 스렌은 대개 비셔스 경의 전령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비셔스 경이 찾는다. 올라가 봐라."


"어... 왜에?"


역시나. 미리 알고가면 좀 나으련만 스렌은 알려주는 게 아니라 일단 가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아무래도 비셔스 경이 스렌에게도 이유를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그 길로 나는 관사로 가 비셔스 경의 방으로 올라갔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1인 소파에 비셔스 경이 앉아있었다.


"아하하, 왔구나. 레이크."


"에... 부르셨다고요?"


"그래. 요새 네가 날 피하는 거 같아서."


뜨끔.

정말 그 소리가 심장에서 들리는 줄 알았다.


"제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우연이겠죠."


"그래."


비셔스 경은 후후, 하고 짧은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거리낄 거 없던 녀석들이 뒤가 구리면 얼굴부터 감추거든."


"아뇨. 저는 그런 일 없어요."


나는 비셔스 경이 아니라 그 아래 소파를 보며 말했다.


"뭐, 큰 일이 아니더라도 물건을 훔쳤다던가."


그 순간 나는 저게, 지금 자수해야 죄가 줄어든다, 라고 말하는 것인지 엄청 셈을 했다.


"아하하, 농담이다."


내가 나름의 답을 내기도 전에 비셔스 경은 아주 가볍게 그 말을 제껴 넘겨 버렸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그랬다면. 내 앞에 서있지도 못 했겠지. 무릎 꿇려 있었을 거다. 포박되어 있을 거고. 음... 그래. 그런 녀석들은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해."


비셔스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지금 자수하라는 건가.


"아하하, 왜 그러나. 꼭 죄 지은 사람처럼."


"아니... 그런 섬뜩한 얘기를 자꾸 하시니까..."


"아하하, 섬뜩할 게 뭐 있어. 내가 지금 레이크 널 부른 건 이쪽으로 에반젤린 사제님이 올 거라서 그런 거야."


"에반젤린이요?"


그 무렵. 누군가 비셔스 경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비셔스 경은 누군지 목소리도 듣지 않고 출입을 허가했다.


"플라나 사제가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스렌이었다.


"아아, 딱 맞춰 왔군."


"안녕하세요, 뮤리엘 경?"


인사말을 건네던 에반젤린은 안에 있던 날 보더니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어머, 레이크님도 계셨네요?"


내가 여기 불려온 건 에반젤린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 들어와요. 사제님. 더운 길에 고생 많았어요."


"뭘요. 제가 부탁드린 일인 걸요."


에반젤린이 부탁을 했다고?

그게 나랑 관계가 있는 건가?


"전에 말씀하셨던 그 꺼벙이는?"


"꺼벙? 아아... 꺼벙이... 는 아니고 게일 형제님이라면 저랑 같이... 어라?"


무언가 찾는 듯 뒤를 살펴보던 에반젤린은 이내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방 밖에서 누군가를 보고선 고개를 저었다.


"아아, 저기 계시네요... 게일 형제 님!"


에반젤린이 부르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진짜 엘프를 볼 줄이야. 참 짧은 생이라도 살고 볼 일이야."


부산스럽게 들리는 어투를 흘리는 그 남자는 의외로 내 또래에 가깝게 보였다. 기르다만 갈색머리는 뒤로 모아 묶어놓았고 짙은 푸른 눈동자는 어떤 투기에 불타고 있었다.


투기라기보다... 기대인가? 무엇이든 간에 그 게일이라던 남자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오... 방부터가 남다른데? 역시 기사단의 높은 사람이라는 건가?"


게일이 비셔스 경의 방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남의 방에 들어와서 자기소개도 없이 방주인인 비셔스 경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서 첫마디가 방 평가라니.

이런 무지막지한 놈은 또 오랜만이었다.


"아하하."


그 모든 결례에 대한 비셔스 경의 반응은 짧은 웃음이 전부였다.


"반갑소. 나는 게일 라스펠트! 왕국 해결사라고 불리지!"


왕국 해결사... 라고?


게일 라스펠트는 내 또래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특이점이라면 지금 녀석이 입고 있는 옷이 판금 조각을 덧대고 묶어 갑옷처럼 쓸 수 있는 옷이라는 것 정도. 지금도 몸통 부분은 뭔가 덧대어 입고 있었다.


고향에서는 모든 위병들이 그런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왕국 해결사라고?

다시금 그 선언에 의문이 생기는 점이었다.


"네가 레이크 아이힐데른이구나?"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게일 라스펠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얘는 어떻게 또 내 이름을 아는 거냐고.

나는 슬쩍 에반젤린을 보았다. 그 애는 미안한 듯 멋쩍게 미소 지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일단 물어봐주었으니 나는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들은 것보다 별 거 없는데?"


게일 라스펠트가 말했다.


"아주 약해 보여."


"뭐?"


...이건 또 뭐야?


작가의말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레이크의 성격이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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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54. 조각조각 사각사각(4) 21.10.19 110 2 20쪽
309 54. 조각조각 사각사각(3) +1 21.10.13 122 1 17쪽
308 54. 조각조각 사각사각(2) +2 21.10.05 202 2 12쪽
307 54. 조각조각 사각사각(1) +1 21.10.02 122 3 17쪽
306 드리는 말씀 21.10.02 144 4 2쪽
305 53. 파편의 편파(5) +2 21.01.26 163 3 20쪽
304 53. 파편의 편파(4) +2 21.01.07 134 2 13쪽
303 53. 파편의 편파(3) +2 20.12.31 137 4 27쪽
302 53. 파편의 편파(2) +2 20.12.21 150 4 19쪽
301 53. 파편의 편파(1) +2 20.12.15 133 3 20쪽
300 52. 편파의 파편(6) +2 20.09.19 174 6 24쪽
299 52. 편파의 파편(5) +2 20.09.09 168 3 16쪽
298 52. 편파의 파편(4) +2 20.09.05 137 5 19쪽
297 52. 편파의 파편(3) 20.08.20 136 4 19쪽
296 52. 편파의 파편(2) 20.08.13 140 3 20쪽
295 52. 편파의 파편(1) +8 20.08.07 166 5 17쪽
294 51. 찰박찰박 해(5) +3 20.04.24 184 2 17쪽
293 51. 찰박찰박 해(4) +2 20.04.21 149 2 19쪽
292 51. 찰박찰박 해(3) +4 20.04.13 151 3 20쪽
291 51. 찰박찰박 해(2) +3 20.04.07 152 3 16쪽
290 51. 찰박찰박 해(1) 20.04.07 143 3 12쪽
289 P.S 푹 익혔어 +4 20.04.02 157 3 10쪽
288 50. 삼월의 토끼(5) 20.04.01 147 2 12쪽
287 50. 삼월의 토끼(4) 20.03.27 137 3 14쪽
286 50. 삼월의 토끼(3) +4 20.03.25 144 3 20쪽
285 50. 삼월의 토끼(2) +2 20.03.22 177 3 22쪽
284 50. 삼월의 토끼(1) +2 20.03.17 139 2 15쪽
283 49. 오목과 오목(5) 20.03.13 148 2 16쪽
282 49. 오목과 오목(4) +2 20.03.01 171 2 18쪽
281 49. 오목과 오목(3) +6 20.02.27 154 2 22쪽
280 49. 오목과 오목(2) +4 20.02.21 157 3 23쪽
279 49. 오목과 오목(1) 20.02.19 164 2 26쪽
278 48. 볼록과 볼록(5) 20.02.13 153 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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