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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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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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4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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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기대는 기대게 돼(5)

DUMMY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에 있어야할지, 여기 있어도 되는건지. 나는 쓸쓸한 기분에 잠겼다. 처음 온 도시에 홀로 남겨진다는 건 그런거였다. 미크로셀에 처음 왔을 때도 비슷했다. 그래도 거기선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반 랜드레이는 챠라가 날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했지만 지금 같아가지고선 혼자 있는거나 다름 없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이 무슨 소용이라고.


미크로셀은 보이는 것만큼 활기찬 곳이었다. 길거리에 사람들도 많았고 잘은 모르겠지만 태양이 밝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이 세상엔 다른 곳보다 빛이 강한 곳이 있다는데 미크로셀도 분명 그 곳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여기가 너무 칙칙한 것이던가.


흰색 벽돌로 오밀조밀 예쁘게 만들어진 집들이 유난히도 커보였다. 날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커서 괜히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저 창문은 눈이고, 저 화분은 코고, 문은 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적갈색 기와는 반반으로 잘 빗어넘긴 머리칼 같아 집이 아니라 으름장을 놓으려는 신사의 얼굴 같기도 했다.

외로움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한 여름인데도 바람이 쌀쌀했다.


한참 동안 혼자 길거리를 서성이고서야 겨우 사람의 그림자라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가로등에 불을 붙이러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높은 곳에 불을 놓아야하는 사람치고는 체구가 왜소했다. 게다가 펑퍼짐한 외투에 후드모자까지 푹 눌러써서 그 사람이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지 못 했다면 완전 수상한 사람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긴 막대 끝에 걸린 철사고리로 유리덥개를 열고 불을 붙인 뒤 다시 덮는 과정을 무리없이 꽤나 능숙하게 해냈다.


웬만한 도시가 아니라면 가로등을 따로 밝히지는 않는다. 여긴 참 분위기와 다르게 마을에 돈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진귀한 구경을 계속하기로 했다. 원래 사람이란 억지로 무언가를 하게 됬을 때 다른 일에 더 시선이 가기 마련이었고 더더욱이 지금 같은 경우엔 그 억지로 시킨 일이라는 것이 서성이는 것뿐이지 않이었고 눈앞엔 보기드문 것이 있으니 아다리가 맞아떨어졌다.


가만히 앉아 지켜보는 이가 있는데도 가로등지기는 묵묵히 자기 소임을 다했다. 아니면 내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고.

고리를 걸어 유리덮개를 들고 불을 붙이고 다시 덮고, 들고 붙이고 덮고. 자기 키보다도 더 긴 막대로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걸 잘도 다루었다.

저런 걸 하는 사람도 따로 정해주는 건가 싶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멀찍이서부터 오기 시작해 네번째의 가로등에 불을 붙일 차례가 되자 가로등지기는 유리덮개를 들다 말고 다시 내려놓았다.

이어서 무슨 문제가 생기기라도한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저 사람이 불 붙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정말 수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정도로 과한 움직임이었다.


부산히 굴던 가로등지기는 어느순간 우뚝 멈추었다. 기분탓일지 모르지만, 또 눈은 커녕 얼굴도 보이진 않지만, 나는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갑자기 날 볼 이유도 없었고 내 뒤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깜깜한 벽뿐이다.


확실히 내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앞을 보았을 때 가로등지기는 좀 더 가까이 와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만약 내가 저 사람이 불 붙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정말 정말 수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뭔가 떨어져 굴러 멀어지기라도 했나보지.


그러는 동안에도 가로등지기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내 뒤에 뭔가 굉장한게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굉장해서 나는 기척도 못 느끼고 모습도 볼 수 없는 그런 굉장하고 심지어 꼭 가까이서 보고 싶은 것. 그런 게 아니고서야 저토록 걸음을 빨리할 수 가 없었다.

그렇게 아니겠지, 하는 동안 가로등지기는 내 두 걸음 앞까지 와서 멈춰섰다.


"저기. 제가 무슨 짓을 하겠다고 보고 있던 건 아니거든요?"


나는 변명아닌 변명을 했다. 왜 변명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도시가, 쓸쓸한 마음이, 날 나약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가로등지기는 아무말도 없이 가만히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른 것일지도 모를 가느다란 턱이 살짝 씰룩였다.


"흐후훗..."


가로등지기가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모자를 벗자 그 안에서 옅은 금발 머리가 쏟아져 내렸다.

난 또 다시 마음에 짜게 식는 것을 느꼈다.


"글리도... 알아."


글리 캐스트는 미소 지을듯 말듯 입가를 씰룩이고, 웃을듯 말듯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어우. 무섭게 노려보는 건 싫은데."


내가 속으로 모욕적인 말을 고르는 동안 글리가 먼저 말했다.


"이번엔 가로등지기야?"


내가 물었다.


"글리는... 착한 아이니까. 남의 일을 대신해줄 수도 있지?"


"선생님이 남의 물건엔 손대지 말라고 안 가르쳐 주시디?"


나는 가로등지기의 막대를 가리켜 말했다. 그것도 그렇고 내 토큰도 그렇고 글리가 착한 아이 운운할 녀석이 못된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레이크가 그렇게 말해버리면 글리는 기분이 상해버릴지도 몰라."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고개를 저으며 유감을 표하던 글리는 문득 고개를 멈추고 날 노려보았다가, 다시 싱긋 웃었다.


"하지만 글리는 오늘 즐거워. 왜냐면...? 친구가 초대에 응해준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친구를 초대하는 게 처음이기도 했고. 그 처음이, 레이크라서, 글리는, 아주... 기뻐."


글리는 검지손가락으로 내 가슴 한가운데를 콕 찔렀다.

초대라, 누가봐도 초대라고 하기엔 아주 많이 과격했다.

나는 벌레라도 앉은양 손가락을 쳐냈다. 글리는 그런 게 가소롭기라도 한 건지 소리를 참아가며 쿡쿡댔다.


"생각을 해봐, 레이크? 친구가 집을 찾아오면 설레잖아. 게다가 그게 처음이라고 얼마나 두근대겠어?"


글리는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물러서기도 전에 내 팔을 잡아 팔짱을 꼈다.


"봐. 알 수 있겠어?"


글쎄 내가 팔꿈치로 느낄 수 있는 건 몸에 맞지 않는 옷의 펑퍼짐함뿐이었다.

나는 대꾸조차 할 마음이 들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어우, 지금 정말 뭘 느껴보려고 하는 거야? 응큼하긴."


글리는 또 다시 내 가슴팍을 검지로 콕 찔렀다. 그러면서도 팔짱은 풀지 않았고 오히려 날 끌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친구와 걷는 밤길이라. 글리는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잘도 흉내를 내었다.


"레이크는 어때? 전에도 이런 거 해본적 있어?"


"그냥 걷는거잖아."


"으으음. 그냥 걷는거니까 그런 건데. 뭐... 글리가 원했던 대답은 아니지만 무뚝뚝한 것도 나쁘지 않지."


"밤도 아니고."


"맞아. 레이크 말이 맞아. 아직 불을 켜기엔 이른 시간이야. 그래서 글리가 대신 켜준거야. 글리는 여기 가로등의 불을 아주 좋아하거든. 봐, 예쁘지 않아? 아롱아롱 흔들리는 작은 불씨들이."


글리는 정말 황홀하게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꼭... 땅 위에 내려온 별님 같아. 반짝반짝..."


자기가 붙여놓은 불씨들을 하나하나 보던 글리는 밝혀진 길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날 찔러보았다.


"레이크는 어떻게 생각해?"


뭐라고 해줄까.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전에 글리가 또 자기 할 말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하긴. 누가 반짝반짝 빛나는 걸 싫어하겠어. 반짝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지? 레이크도 좋아하지? 그럴 줄 알았어."


가만히 듣고있다가는 날이 완전히 깊어질 때까지 혼자 알 수 없는 소릴 떠들 것 같았다.


"난 지금 너랑 있는게 즐거워서 이러고 있는게 아니야."


"혹시 점심을 못 먹었나?"


혹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냐고 묻듯이 글리는 훅 내 배를 쓰다듬었다.

난 반사적으로 등을 굽혔다.


"헤, 뭘 놀라고 그래? 글리는, 순수하게 걱정해주고 있는 것뿐인데."


"네가?"


지금도 대뜸 팔짱을 껴서 사람을 끌고가고 있는 주제에?

글리가 무기를 가지고서 날 위협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나는, 아니 우린 서로 알고 있었다.


난 글리가 원하는대로 해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도록, 그렇게 될 때까지 글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또 그렇게 원하는대로 풀려갔을 때 글리는 결코 위험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 그리고 글리는 그걸 아는 날 알고있다.

영악하기 그지없었다.


"좀 떨어지지 그러냐."


"헛. 친구에게 거절당하면 글리가 슬퍼할지도 모르는데? 눈물을 뚝뚝 흘릴지도 몰라. 마음속에서."


그리 말하는 글리는 웃고 있었다.


"실은 말야. 글리는 클리펜즈의 밤거리가 너무 무서워. 여기 사람들은 옆에 있는 델루람에서 장사를 하거든. 거기가 훠얼씬 더 사람이 많으니까 많이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참 똑똑하지?"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는 게 아니라 정말 없는 거였다.


"하지만 참 멍청해. 생각해봐. 이렇게 텅 빈 거리에서 누군가 한 명, 꽃을 파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엄청난 부자가 되지 않을까?"


정말 모를 소리였다. 알다가도란 과정조차 모를 정도로.


"지금 사업제의하는 거야. 괜찮을거 같지 않아? 장사 아이디어는 아무한테나 안 알려주는 거라고. 아니면 밑천이 없나?"


그렇게 말하며 글리는 내 바지에 주머니가 달린 부분을 툭툭 쳐보았다. 반대편도 똑같이 해보더니 다음번엔 손을 쑥 밀어넣기까지 했다.


"와. 정말 아무것도 없네?"


남의 빈곤의 그렇게 재밌는지 실실웃던 글리의 목소리가 불현듯 낮게 깔렸다.


"아무것도 없잖아, 레이크."


붉은빛의 눈동자도 점점 날카롭게 날 노려봤다.


"아무것도...! 미력의 돌은? 가져오기로 약속했잖아, 글리랑."


"그러는 넌 날 보자마자 토큰은 안 돌려주고 뭔 소릴 하는건데."


우리는 팔짱을 끼고 찰싹 달라붙은 체로 우스운 신경전을 계속했다.


"토큰은 잃어버릴까봐 두고 왔지. 집에. 그렇게 작은 물건은 언제 주머니에서 세어나가도 모른다구."


"나도 하도 굴러다녀서 어디다 잘 넣어놨어."


"그게 어딜까?"


"너희 집 구경 먼저 하고 알려줄게."


"어우, 짓궃은 친구라도 친구는 좋아."


이제 어떻게 할까. 팔짱을 끼고 있다는 건 서로를 구속하고 있단 의미였다. 나도 그렇지만 글리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전에도 겪어봤지만 글리는 날 힘으로 이기지 못한다. 그건 녀석도 알고 있었다.


"으음, 그래. 레이크가 글리랑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유감스럽지만 그래도 별 수 없지. 글리는 착한 아이니까. 깜빡한 친구를 나무라선 안 돼."


글리는 새침을 떨며 서운한 표를 내었다.

성질 다 부려놓고 이제와서 그러는 게 참 가증스럽다.


"글리가 착하게 행동하면 레이크도 착해져서 돌을 돌려줄거야. 그렇지?"


글리는 갓 구워진 파이를 앞에 둔 아이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 말이 백 번 옳았다. 글리가 착하게만 행동하면 나도 돌을 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챠라가 보고 있다더니 나 혼자 있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건지. 다시는 내가 이 말아먹을 용사님을 믿나봐라. 안 믿는다.

절대. 절대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다혈질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지.

오랜만에 봤다고 뭔가 엄청난 성장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다. 차라리 같이 가서 따져주겠다던 에반젤린 말을 들을 걸. 왜 그랬을까.

다 부질없는 기대요. 때 늦은 후회였다.


"아. 맞다. 레이크."


문득 글리가 걸음을 멈췄다. 자연히 함께 걷고 있던 나도 멈추게 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멀찍이서 보였던 탑이었다. 탑. 보통 이런 건 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레이크는 단거 좋아해?"


글리가 이어 물었다.


"뭐?"


"단거 말이야. 설탕, 사탕, 잼 같은거."


"어... 잘 모르겠는데."


그건 내 취향을 모르겠다는 것보다도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지 모르겠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흐후훗? 그렇구나. 아 별 건 아니고. 그 취향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오갈수 있거든."


별 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그것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글리가 설명을 잘 못해서 미안해, 레이크."


그 말을 끝으로 글리는 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노크했다.

여길 들어가도 될까. 들어가는 순간, 이젠 보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챠라의 시야에서 벗어나게되는 걸텐데.


"어라? 레이크도 혹시 친구 집에 놀러온 건 처음이야? 손이 가만있질 못하네?"


글리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손가락을 가리켜 비웃었다.


"걱정하지마. 레이크라면 괜찮을 거야. 레이크, 아이, 힐, 데른이라면."


탑의 문은 갑작스럽게 열렸다. 어떤 조심성없는 녀석이 문을 그렇게 잡아당기나 얼굴을 보니 아주 황당한 녀석이었다.


"너는! 미크로셀에서!"


그 건방졌던 놈. 그러니까 마법팔찌 하나 믿고 설쳐대던.


"레이크 아이힐데른!"


아니. 그러니까 그...


어쨌든 그 녀석은 날 보더니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여길 어떻게!"


나는 녀석에게서 튀어나오는 침을 막기 위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기 미안한데. 너 본명이 게일 라스펠트였냐. 토토 란드였냐?"


정말 미안했기에 나는 나름 정중하게 물었다.


"게일 라스펠트다!"


게일 라스펠트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 토토 란드였지."


"게일 라스펠트라고!"


"알았어. 토토 라스펠트. 그래서 넌 고향에 안 끌려가고 왜 여기있는 건데."


뜬금없이 맥빠지는 녀석이 나타나버리는 바람에 난 말소리에 한숨이 섞여나왔다.


"게일...! 아니. 그야 당연히 나의 천사님을 보좌하기 위해서지. 그렇죠, 글리?"


게일이 글리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으응, 게일은 노력을 하는 친구라서 좋아해."


글리는 아주 익숙한 듯 겉옷을 벗어 게일에게 넘겨주었다.


"프리실라는?"


"옷방에서 계속 준비 중이었는데요."


"그럼 곧 나타나겠네."


글리는 씩 웃으며 현관에서 이어지는 복도 가운데에서 벗어나 가생이 벽에 기대섰다.


"너 아주 잘 만났다. 이번에야말로 박살내주마."


"너 그 팔찌 쟤한테 받은 거였냐."


"그 뿐인줄 알아? 이름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 거란것도 알려줬지."


"참 좋은 거 가르쳐놨다."


나는 슬쩍 글리를 보았다.


"게일 라스펠트라는 이름도 글리가 지어준 거야. 혀를 타고 나가는 발음이 멋지지않아?"


글리는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면서 이름의 비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렸다.


이제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아니면 글리가 한 것이라서 괜찮은 것인지 게일은 개의치않고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쨌거나! 이제 새로운 비밀병기가 있으니, 너 같은 한주먹거리도 안 되지만! 우선은 글리가 말한대로 프리실라 님을 만나는 게 먼저야. 따라와라. 원랜 마중 나오는 걸 좋아하는데, 무슨 문제가 생긴거 같은데."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던 게일은 그러지 않고 날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렇다고하니 나는 우선 이쪽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달리 선택지가 없다는 게 더 컸지만.


게일을 따라 이동한 탑의 내부는 생각보다 집 같이 생겼다. 우리 집 같은 그런 모양새는 아니었고 따져본다면 론데미르 가에서 봤던 저택하고 비슷하게 생겼다. 차이점이라면 실내의 둘레를 계단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층을 이동하지 않아도 내부는 충분히 넓었고 게일은 굉장히 멋들어진 침실 안 쪽에 하나 더 있는 방으로 날 안내했다.

방 안에 방이 있다니 이 무슨 사치란 말인가.


"프리실라 님!"


게일이 문을 열고 안쪽에 소리쳤다.

나도 슬쩍 문 안을 보았는데 순간 퀴퀴한 냄사가 코를 찔렀다. 역하기보단 오래된 헝겊의 냄새 같았다. 방 내부는 어두웠고 입구부터 선반이 공간을 크게 두층으로 나누었으며 위 아래로 옷이 쫙 걸어져 있었다.

정말, 내 생에 그렇게 많은 옷을 본적이 없었다. 우리 고향에 있는 옷을 전부 다 합쳐도 그것보단 적을 것이다.


"프리실라 님! 손님이 왔습니다!"


게일이 한 번 더 소리쳤다.

잠시 후 내부에서부터 등불이 밝혀져왔다.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좁은 곳에서 그렇게 뛰어도될까 싶을정도로 급하게.

곧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헐레벌떡 달려나와 비명을 지르며 문가에 퍽 쓰러졌다.

정말, 정말 너무 세게 부딪쳐서 차마 괜찮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괜찮을리가 없으니까.

그 사람이 길게 기른 흑발머리가 촥 퍼져서 무슨 밤송이 같은 생김새가 되었을 정도니 얼마나 역동적이게 넘어졌는지는 훤했다.


"으으..."


여자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고보니 좀 성숙해보이는, 부인은 아니고 또래도 아닌 숙녀의 얼굴이 보였다. 키도 꽤 큰편이라 나보다 눈높이가 조금 높았다.


하얗다못해 괜찮은건가 싶을정도로 파리한 피부에 눈밑은 어두웠고 눈이 커다란 인형같은 얼굴이었지만 너무 커서 좀 무섭기도 했다.

그런 여자가 날 보며 다가왔다.


"어... 어..."


프리실라라던 그 여자는 툭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파랗게 뜬 입술로 말했다.


"네가... 네가... 내 동생이니...?"


"예...?"


대답하기 전에 난 게일 라스펠트를 보았다. 무슨 힌트를 주지않을까, 그래서였다. 하지만 녀석은 눈치도 없이 내게 어떤 언질을 주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별 수 있나. 내게 남은 진실뿐이었다.

아주 당연한 진실.


"아... 아니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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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50. 삼월의 토끼(5) 20.04.01 147 2 12쪽
287 50. 삼월의 토끼(4) 20.03.27 137 3 14쪽
286 50. 삼월의 토끼(3) +4 20.03.25 144 3 20쪽
285 50. 삼월의 토끼(2) +2 20.03.22 177 3 22쪽
284 50. 삼월의 토끼(1) +2 20.03.17 139 2 15쪽
283 49. 오목과 오목(5) 20.03.13 148 2 16쪽
282 49. 오목과 오목(4) +2 20.03.01 171 2 18쪽
281 49. 오목과 오목(3) +6 20.02.27 154 2 22쪽
280 49. 오목과 오목(2) +4 20.02.21 157 3 23쪽
279 49. 오목과 오목(1) 20.02.19 164 2 26쪽
278 48. 볼록과 볼록(5) 20.02.13 153 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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